마태복음

참혹한 크리스마스

푸른 섬 2008. 12. 22. 10:11

참혹한 크리스마스

마태복음2장1-18

거리를 나가보면 크리스마스라고 사람들이 난리를 피웁니다.

경제는 어렵지만 어려운 가운데서도 장사한번 잘 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곳곳에 메리 크리스마스, 즐거운 성탄이라고 써 붙이고 식당마다, 호텔마다 화려하게 장식을 해 놓았습니다.


저들이 예수님의 오심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오심을 제대로 안다면 결코 그렇게 즐거울 수 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어린이들은 성탄절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예수님 탄생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셨는데 왜 즐거워하고 선물하고 기뻐합니까?

그거야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하는 거죠.


이거야 뭐 잘못되었다 잘했다 할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고 하면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른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일인지를 알지 못하니 자기들끼지 선물주고, 물건 팔고, 희희낙락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태어 나셨을때 일어났던 사건을 기록해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때 어떤 일이 일어 났습니까?

한 아기와 한 왕의 전쟁이 벌어 집니다.


한 왕, 즉 헤롯왕은 한 아기로 인해 정신이 확 돌아버렸습니다.

그래서 어찌되었든지 아기 예수를 제거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지시하여 애굽이라는 곳으로 예수님을 피신시키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헤롯은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들을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두 살 아래 아이를 가진 부모들에게는 엄청나게 큰 슬픔을 가져 왔습니다.


억울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무엇인데 왜 우리 아이가 죽어야 합니까?

우리가 그 동네에 살았다고 생각해 볼까요?


우리의 아이들이 다 죽었다.


예수님 때문에.


받아 들일 수 있겠습니까?


아니. 지금 우리 아이들이 병들어 죽었다 하더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땅에 찾아오심은 이렇게 참혹함을 대동하고 찾아 오셨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아기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땅이 애굽화 되어버렸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애굽이라고 선언해 버리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유일하게 선택받은 백성들이 사는 땅이 애굽이라면 이 땅의 모든 곳이 다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다 애굽이라는 말입니다.


애굽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대적자 아닙니까?

하나님의 원수아닙니까?


그리고 심판받는 대상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모두 심판 받아 마땅한 애굽과 같은 곳이라고 확정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심판받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헤롯왕의 행동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향해서는 죽자사자 제거 작전에 돌입하기 때문입니다.

이 헤롯 속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나는 그렇게 헤롯처럼 악독하지 않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싫어한다는 것이 곧 헤롯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하냐고 물으신다면 이것은 나의 단언이 아니라 말씀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주변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우리의 즐거움을 누릴 것인가?

돈을 좀 더 벌 것인가에 마음이 빼앗겨 있지 않습니까?


이런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서는 별로 고려할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의 강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거 자꾸 예수님의 오심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아기 탄생의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을 동시에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강림을 고대합니까?

고대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처음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세상이 난리가 났는데,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로써 심판하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내가 붙들고 있던 모든 것이 불에 다 타버릴 것인데 예수님의 강림이 기쁘겠습니까?


기쁘지 않습니다.

예수님 제발 오시지 마세요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인간의 소망으로 대체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분명 기쁜 소식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입니까?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는 참으로 예수님의 오심이 기쁜소식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에겐 참혹함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도 반드시 참혹함의 경험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아기들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이 없다면 성도라 볼 수 없죠.


이 경험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내가 경험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지요.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태복음2장18절 말씀이 성도속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 졌느니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간단합니다.

자식 죽었는데 위로받기를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자식이 죽었습니까?


바로 예수님 때문에 죽었습니다.


예레미아31장15-17절을 보겠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나 여호와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희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


자식들이 다 죽었는데 소리를 내어 울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자식을 잃고도 위로받기를 거절하는 성도의 본 모습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참혹함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참혹함을 경험하면서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사는지 분명히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곧 예수님의 십자가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만 소망을 둔다는 것에 온 힘을 다해  거부하고 미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에게 소망이 있음에 즐거워합니다.


성탄절이 그러하죠.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은 참혹한 성탄절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런 참혹함이 일어나고 그래서 사람들의 위로를 받기를 거절하고, 오직 십자가지신 예수님께만 소망을 두는 자가 주님의 참 백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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