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마태복음1장18-25

푸른 섬 2008. 12. 29. 10:47

임마누엘

마태복음1장18-25

지난 목요일이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예수님과 관련된, 기독교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텔레비전에서 많이 방영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기독교관련 프로그램들은 잘 나타나지 않고 어느새 오락프로들이 그 자리를 많이 차지했습니다.


크리스마스시즌이 되면 부르는 노리들을 크리스마스 캐롤이라고 하는데 이 노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래들이 장난반 오락반. 예수님의 오심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축 성탄이라고 하면서 실제로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이제는 성탄절이 하나의 오락절, 노는절기, 아니면 연인들의 날 이런 의미로 바뀌어 졌습니다.


교회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과거는 좋았고 지금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의 풍조가 그러하다는 것이지요.

과거의 풍조는 놀이라기보다는 약간 진지함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경제가 발전되고 사회가 발전되니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많은 스트레스 속에서 스트레스를 풀어 주는 오락, 쾌락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를 보더라고 그렇습니다.


20년전, 10년전, 현재의 교회놀이들을 보면 많은 변화가 있습니다.

과거엔 그래도 성경말씀이 많은 부분은 차지 했습니다마는 지금은 놀이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것도 예배라고 하여서 말입니다.


왜 교회가 이런식으로 바뀌는데, 설교의 내용은 다르게 생각하더라도 그 형식이 왜 이렇게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제가 앞서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말씀에 대한 진지함은 골치만 아픕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에는 피곤한 것이지요.

항상 쪼개어야 하니 말입니다.

진지함속에 토론을 , 논쟁을 하다보면 얼굴도 붉히고.


이런 것들은 세상을 사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진지함을 제거하고 재미있게 사는 것입니다.


집 아래를 내다보면 천연잔디구장과 인조잔디구장이 보입니다.

이전에는 둘다 천연잔디구장이었는데.


요즘을 그렇습니다 마는 날이 조금 따뜻한 날보면 주일 아침9시도 되기전에 사람들이 모여 공을 찹니다.

뭐가 그리 재미 있는지.


아마 재미있겠죠.

저와 가까운 어떤 사람도 축구가 종교일 정도로 열심히 축구를 하니 말입니다.

예배는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축구가 중요하죠.


성도들과의 관계는 별로 중요치 않습니다.

축구인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죠.


그리고 그 룰을 지켜 줄때 왕 따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교회보다 축구를 아니면 다른 운동을 , 아니면 놀이를 더 좋아할까요?


자기를 발산 할 수 있거든요.


제대로된 설교는 자기 자신을 팍팍 짓누릅니다.

자신의 욕망과 배치되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옵니다.


축구야 룰을 지켜 주면 그만이죠.

그러나 말씀안의 모임은 룰이 좀 까다롭습니다.


모일때 마다 룰이 다르다고나 할까요?

사람들의 모임이 복잡하잖아요.

특히 말씀을 이야기 하게 되면 열명이 모이면 열명의 의견이 나오고 여기에 좀 강한 견해를 가진 자 둘만 있으면 분위기가 삭막해 지지 않습니까?


이에 비해 놀이는 그렇지 않죠. 물론 가끔 깽판지기는 사람이 나오긴 하지만 이런 사람은 간단하게 제거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교회는 그렇지 않잖아요. 쉽게 제거가 안되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도 놀이터로 만드는 것입니다.

쉽게 제거도 하고, 가금적이면 논쟁은 제거하고. 싸움이 없는 정말 평화로운 곳으로 말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이사야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장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듣기에 좋은 말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땡 잡았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수 있는 분이잖아요.


나의 놀이를 지지해 주고, 더 즐겁고 재미있게 해 주실 분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사야 8장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 그리 즐거운 일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제가 참혹한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되면 참혹한 세상이 펼쳐집니다.


이사야8장을 보게 되면 임마누엘의 등장이 이스라엘의 참혹한 상황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앗수르 왕의 지배로 짓밟힐때로 짓밟힌 상황에서 임마누엘의 등장은 이 원한을 갚는 등장입니다. 


이들의 뜻이 필경 이루지 못하고 저들이 필경 패망하도록 하시는 분이 임마누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8장13-15절을 보면 매우 혼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자로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앗수르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이요, 예루살렘 거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에서 태어 나심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두부류로 쫙 갈라지는 것입니다.


한쪽은 피할 곳이 되고 한쪽은 올무가 되고.


이 일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사람들에게 올무로 작용합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라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피할 곳이 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올무가 되고 함정이 됩니다.


고린도 전서1장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라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자리입니다. 또한 십자가라는 고난을 감당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어느누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전하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려고 하겠습니까?


물론 이런 자들은 있죠. 자기 긍정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자들 말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조차 십자가의 도는 미련하게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성탄트리의 화려함 속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미련한 자임을 드러낼 뿐입니다.


인간들은 걸리고 넘어지고 잡혀지는 것을 너무 싫어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놀이터로 만드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란 싸움이 없어야 된다.

그게 아니죠. 교회란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 싸움. 치열한 논쟁도 벌어지고 때론 얼굴도 붉히고 그러면서 자신들이 미련함을 드러내는 곳이 교회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온 세상이 소동, 난리법석을 떨듯이 우리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하고 계시다면 당연히 난리가 나야 합니다.


난리가 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이것은 타인과 관계 속에서 일어날 수 있고, 내 속에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그러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에겐 더 이상 영적 싸움이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의 특징은 늘상 싸움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존경하는 사도 바울 보세요. 죽을때까지 싸움꾼압니까?

스데반은 어떻습니까?


죽으면서까지도 상대들을 열받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 눈에는 이런 것이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면 피하는 곳도 되고 걸림도 되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를 놀이터로 생각지 마세요. 그냥 오랫동안 다녔으니까 또 모인다가 아닙니다.


걸림돌과 피할 곳 되시는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다시 확인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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