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 52

푸른 섬 2009. 1. 12. 10:05

성령안에 사는 삶

사무엘 상27장1-12

다윗이 사울을 살려보낸 후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참으로 한심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1절을 보세요.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사람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볼때 무엇이 진정한 다윗의 마음일까요?


아마 어떤 정신분석학자가 보면 정신병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믿었으면, 그래서 사울을 살려 보냈으면 끝까지 믿는 삶. 그리고 당당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떻습니까?


다시 두려움에 사로 잡혀 버립니다.

오히려 다시 블레셋 땅으로 피하여 사울에게 자신을 죽이는 것을 포기하기를 기다라고 있는 모습입니다.


다윗이 정신병이라서 이런 모습을 보일까요?

그런 것이 아님을 우리들이 잘 알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라면,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다윗의 삶과 자신의 삶이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우리는 정신병 정세를 보이는 것입니다.

믿었다가 나를 의지 했다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참 성도의 모습이지요.

이런 모습가운데 성도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갑니까?


사울을 두려워 하며 그냥 사울왕이 포기하며 기다리기를 바라는 삶, 무력한 삶을 살아갈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다윗 자신이 그러한 결심과 결정 행동을 했다면 그럴수 있을 지 모르지만 지금 다윗은 철저하게 성령님께 사로잡혀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비록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성령님께서 다윗을 다윗대로 그냥 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다윗의 생애를 통해 은혜를 받은 인생, 즉 예수님을 전하는 인생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스스로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다윗이 정신병자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실은 스스로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는 자들이 은혜의 세계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대로 판단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아주 없는 사람처럼보였다가 다시 또 무엇을 보여 주는고 하면 그 자리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실패했다. 이제 믿음 없겠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구나라고 할때 그런 자리에서 주님은 주님의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를 사용하셔서. 정신병자 같은 다윗을 사용하셔서 말입니다.

제가 좀 과격한 표현을 쓰고 있죠.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남의 땅에 가서 , 그것도 도망하여서 말입니다. 그곳에서 그는 여호와의 전쟁을 벌립니다.

그술사람., 기르스 사람, 아말렉 사람을 공격합니다.


참 희한하지 않습니까?

사울은 두렵고 이들은 두렵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사울보다 이들의 군사력이 약할까요?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나라에 거한다면 거냥 조용히 사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그가 아기스에게 대답하는 것을 보세요.

유다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사람의 남방이니이다.


거짓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이 약탈한 곳은 유다의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지금 거하고 있는 나라의 왕 아기스에게 거짓말을 하죠.


이러면 우리는 당장 이렇게 말합니다.


봐라 봐라. 다윗이 지금은 거짓말 하고 있다.

거짓말이 얼마나 나쁜 짓인지 아느냐?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블레셋으로 가서 살고, 또한 그곳에서 약탈 전쟁을 하면서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 거짓말도 하고.


여러분 이런 다윗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다윗을 두고 손가락질을 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이라는 것이 그런것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어떻게 다윗과 같은 삶이 성령님께 이끌리어 사는 삶이라 하겠습니까?


별로 와 닿지 않죠.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성령님을 받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주님께 이끌림을 받는 성도인데 어느날 사업이 망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주일날 교회도 못 나오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주일날까지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죠.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다고 하는 사람이 결국 밥에 굴복하는 구나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과연 성령님의 인도 하심속에 있다고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어려울 것입니다.


다윗이 그렇다는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인정하십니다.

다윗이 잘났다가 아닙니다.


지금 피하여 도망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다윗은  여호와의 전쟁을 펼친다는 것입니다.

이게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더 이상 주님을 믿지 않는 상황인 것 같은데 주님은 주님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이런 본문들을 보면서 미칠 지경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일관성 있게 풀어 보려고 하는데 자꾸 탁탁 막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같은 것을 보면 일관성있게 풀기 위해 다윗의 잘못을 계속 책망하는 것입니다.


블레셋으로 도망갔다. 그곳은 이방인들이 사는 곳인데 우상이 득실되는 곳인데 그곳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제대로 믿겠느냐. 얼마나 이방의 영향을 많이 받겠느냐.


그리고 약탈 전쟁. 이것도 문제지만 이것은 그냥 넘어가자.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런 전쟁을 허용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시스에게 거짓말 하는 것. 이것은 또 좀 심하다.


오늘 같은 본문을 보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지요.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고 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철저하게 죄인을 죄인되게 드러나게 하시고 주님의 일은 오직 주님만 하심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하신다는 것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자꾸 죄인을 인간으로, 사람으로 취급해 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성령님을 받게 되면 변화가 생겨 그 이후로 뭔가 쭉 변화된 삶이 보일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볼때 ,성경을 볼때  이런 식으로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각이 무슨 시각 인고 하면 성령받지 못한 사람들의 전형적이 모습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랑을 받은 세리와 창기들을 보면 역겹게 느끼는 것입니다.


처음에 자신들도 세리와 창기 였지만 지금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안보니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자꾸 자꾸 보게 되면 야. 주님이 다 하셨구나. 인간은 이런 죄인이었구나. 내가 그렇구나라고 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멀리하면 할수록 무슨 생각이 드는고 하면 나는 그래도 저들보다 나아라는 생각을 굉장히 많이 하게 됩니다.


이러다가 본래 그 사람이 육에 속한 자임이 드러나기도 합니다마는.


성도는 늘상 말씀을 가까이 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의 말씀이 꿀송이 보다 단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믿을 분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말씀해 주시기 때문에 꿀송이 보다 더 단 것입니다.


이보다 더 단 말씀이 어디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도 모르고 꿀송이보다 더 달다고 하니까 힘없는 자기에게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사업 잘 되게 해주고, 부자 되게 해주고, 자식 잘 되게 해주고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성령속에 살아간다는 것은 뭔가 특별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처럼 정신병자처럼 보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을 믿는 복받은 주님의 백성이 되기시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도 다윗처럼 정신병자 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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