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 54

푸른 섬 2009. 2. 15. 19:56

싸움의 대상

사무엘 상29장 1-11

사람은 한곳에 오래 머물다보면 고약한 버릇이 나옵니다.

자리 유지하려는 버릇, 대접받고자 하는 버릇, 그 자리를 영구히 고착화 하려는 버릇.


인간이라면 그렇지 않은 인간 없습니다.

그래서 남을 죽이는 것 쯤은 여사로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왜 우리 자리를 위협하느냐?


누구든지 내 자리를 위협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라멕이 부르는 노래에 우리는 경악하는 것이 아니라 맞다 맞다 하는 것입니다.


성도란 이 땅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싸움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자기를 쳐 복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고린도 전서 9장27절입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니다”


왜 자기를 쳐 복종했겠습니까?


자기 속에서 늘상 주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들이 튀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없다면 자기를 쳐 주님께 복종할 이유가 없지요.


바울이라고 해서 완벽한 인생을 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바울이기 때문에 우리와 뭔가 다르지 않았겠느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나 우리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로마서 7장22-8장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하는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도란 구원 받았으니 더 이상 곤고하지 않아야 한다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란 구원 받았기에 늘 상 십자가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더욱더 가까이 나아가는 자입니다.

십자가가 더 또렷하게 보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성도를 해방해 주셨음에 너무나 감사하는 인생으로 사는 것입니다.


곤고한 인생이기에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는 것이지요.

곤고한 인생이 아니라면 십자가는  소용없습니다.


이미 구원받아 신의 경지에 올랐는데 무슨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성도는 늘상 자신과 싸우는 자입니다. 물론 성도 자신이 싸우는 싸움은 아닙니다.

자기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과 또 다른 분의 역사로 싸움이 이루어 지는 현장이 성도의 몸, 죄된 몸입니다.


이런 싸움이 없는 몸은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성도가 이 싸움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싸움은 외부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에베소서6장10-17절을 봅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이 말씀을 보면 이보다 더 치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복음을 치열한 싸움으로 보기를 싫어합니다. 그냥 복음 전파로 보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복음 전파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왜 이렇게 전쟁용어로 영전 전쟁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과거 구약시대 때, 즉 요즘 우리들이 보는 다윗의 전쟁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에는 칼로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되지만 지금은 복음으로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전쟁의 내용은 다르지만 전쟁의 방식은 일치합니다.

오직 한가지입니다.


피흘림의 정신입니다.


이것은 과거 진짜 칼을 들고 전쟁을 할 때나 지금 말씀의 검을 들고 할 때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군사수가 많고 좋은 계략가가 있어도 피 흘림의 정신이 없으면 전쟁은 백전 백패입니다.


다른 점은 그 당시 승리자는 승리자의 기쁨을 육체적으로 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복음 전파의 승리로 육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런 승리로 인해 더 많은 핍박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은 순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는 전쟁을 수행하는 군사입니다.

뭔가 비장감이 듭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다윗의 이상한 행보가 나옵니다.


다윗은 어떤 전쟁을 해야 합니까?

여호와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원수 즉 이스라엘의 원수와 전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누구랑 전쟁하려고 합니까?

블레셋의 원수인 이스라엘과 전쟁하려고 합니다.


이게 제정신입니까?

자신이 블레셋 아기스와 함께 이스라엘을 치려고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오래 살다 보니 자신이 블레셋 사람이냥 착각을 한 것일까요?

싸움의 대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때 누가 다윗을 막아섭니까?

바로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입니다.


다윗의 과거 행적을 알기에 다윗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8절입니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의 앞에 오늘가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나로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


이것이 다윗의 진심일까요? 진심이지요.


그래서 30장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무슨 전쟁, 어떤 싸움을 해야하는지 분명하게 알려주시는 부분입니다.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가버렸습니다.


다윗과 그 일행들이 이 사실을 확인한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습니다.


어떤 상황인지 아시겠지요.

다윗은 블레셋과 함께 이스라엘을 치는 전쟁에 참여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들의 터전이 불타버리고 자신들이 사랑하는 여인들을 다 잡혀 가 버렸습니다.


이 일로 인해 백성들이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에봇을 가져오라 하여 여호와께 묻습니다.


그 군대를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네게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다윗이 진정 해야 할 일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전쟁을 하라는 것입니다.


터전을 불태워 버리시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사로잡혀가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다윗이 진정 어떤 전쟁을 해야 할 지 제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전쟁의 대상은 여호와의 원수들입니다.

그래서 전리품 배분에 있어서 그는 철저하게 이 전쟁이 여호와 전쟁임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다윗의 가로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려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겉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전쟁의 승리가 자신들의 힘과 지략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붙이시는 전쟁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의 대상이 누군지를 탈취물을 그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는 모습을 통해 분명히 보여 줍니다.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성도는 싸움꾼입니다.

싸움의 대상은 분명합니다. 혈과 육이 아닙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더 부자 되느냐 얼마나 더 건강 하냐 얼마나 내 자식이 잘 되느냐가 아닙니다.

주님의 피 흘리심을 널리 전하는 것이 싸움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전할 때 피 터지는 전쟁이 벌어집니다.

회개하는 자가 생기는가 하면 대부분은 미움을 받는 일, 핍박받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도라는 자가 다윗처럼 세상에 속하여 살다보니 싸움의 대상을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물론 주님의 성도는 이방인 즉 멸망받을 대상을 사용하셔서라도 성도의 갈길을 알려 주십니다.


성도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닙니다.

내가 내 자리를 차기 하기 위한 싸움이 아닙니다.


다윗이 블레셋 진영에 오래 살다보니 그 자리가 자신이 머물 자리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 날려 버리셨습니다.


만일 성도가 영적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어떤 안정성을 유지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자리를 만들려고 한다면 그에게 있어 싸움의 대상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되신 예수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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