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 56

푸른 섬 2009. 3. 2. 17:41


 

성도의 죽음

사무엘상31장 1-13

죽음은 누구에게나 닥치는 일입니다.

어린 아이라 할 찌라도 죽음을 피해 갈 순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영원히 살려고 발부둥쳐도 죽음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저께도 제가 아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죽음을 보면 참으로 비참합니다.


자식들을 다 잘 키워 놓았고 자녀들도 그럭저럭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홀로 계시다가 돌아 가셨다고 합니다.


장남이 어머니를 찾아 뵈러가니 이미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을 듣게 되면 우리는 어떤 생각이 듭니까?

세상살이도 다 부질 없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기 모인 우리들은 너무 젊어서 그럴지 모릅니다마는 아마 연세가 드신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남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드리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효도를 하자, 늙으신 부모님을 잘 모시고 살자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온다는 사실이요 그 죽음엔 인간들이 보기에 괜찮은 죽음이 있고 또한 그렇지 못한 비참한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죽음을 두고 인간이 두 가지로 나눈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 설교 시간에 말씀드린 김수환 추기경 같은 경우엔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 복된 죽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방금 예를 든 할머니 같은 경우는 김추경과는 비교가 안 되는 죽음입니다.


제가 중학생 때인가 어느 즈음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사는 어떤 여 집사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었는고 하면 새벽기도 갖다 오는 길에 차에 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마침 저희 집에서 구역예배를 드리는 중이었는데 예배가 끝난 후에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었으면 그런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 사람이 평소 난 오래 살 마음이 없다고 하더니만 그렇게 빨리 죽었네.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개죽음인가 아니면 호상을 맞을 것인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여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히브리서2장15절에 보면 인간들은 죽기를 무서워 합니다.

그래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생을 삽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죽음도 무서워 하지만 어떤 죽음을 맞느냐에 따라 마치 천국과 지옥이 갈린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왜 이런 생각을 할까요?

역시 죽기가 무섭다는 것이지요.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도 좋은 죽음을 맞아야 하며 그래야 좋은 곳에 가서 살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울과 요나단이 동일한 죽음을 당합니다.


사울은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버린 사람이죠.

그러면 요나단은 어떤 사람입니까?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운 다윗을 위해 자신의 자리라도 기꺼어 내어 놓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달리 말하면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놓은 사람입니다.

예수님만 증거 하다가 인생을 끝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보니 너무 서글퍼게 보입니다.

어떻게 사울 왕과 같은 죽음을 당합니까?


사울 왕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어떻습니까?


요나단이 너무 불쌍해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온 인생을 이렇게 구별되지 못한 죽음을 당하게 하신다면 너무하지 않습니까?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 호상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 그분이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젊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한 창인 나이에.

우리가 믿는 주님이 이런 인생을 사셨습니다.


하나님을 뜻을 실행하신 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바울은 어떤 죽음을 맞이했습니까?

역시 제 명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살았던 사람들 중에 호상당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목숨이 단축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보게 되면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 하는 일 때문에 죽은 자들이 참 성도들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도 가족이 있었고 친척들이 그리고 친구들이 믿음의 형제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들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죽느냐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5장25-2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하는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 땅에 모든 인생들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 되심을 증거하는 도구들입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알고 그 인생을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자요 성도 아닌 자는  심판의 그릇으로 그 인생을 살 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떤 죽음을 맞느냐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관심은 십자가 지신 주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 아닌 자는 다른 것에 관심을 둡니다.

시편 73편 4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아마 우리들이 경악할 정도로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이런 죽음 어떻습니까?


이 뿐만이 아닙니다.

3절을 보게 되면 악인이 만사 형통한다는 사실입니다.


5절에는 다른 사람과 같은 고통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습니다. 너무나 잘나갑니다.

너무나 잘나갑니다.


모두가 다 부러워 하는 인생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결말 죽음의 모습이 얼마나 호상입니까?

고통없는 죽음. 객사 당하지 않는 모습.


그러나 이런 죽음의 모습으로는 절대로 천국과 지옥을 나눌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다가 개죽음 당하는 인생이 오히려 천국 백성임을 확인 시켜 줍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관심은 십자가 지신 주님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어디에 관심이 있습니까?


자기 몸입니다.

육체입니다. 

썩을 것에 온갖 정성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의 죽음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섭섭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홀로 있다가 죽은 할머니나 새벽기도 갖다 오다가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나 온 국민이 슬퍼하는 죽음을 당한 김 추경 이들에게 십자가의 피 흘리심의 공로가 없다면 정말 모두가 개죽음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피 흘리심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라면 복된 죽음입니다.


이런 시각을 갖고 살아가는 인생이 참으로 복된 인생입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42-49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사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악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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