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 55

푸른 섬 2009. 2. 22. 17:00

성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사무엘 상30장23-25

마태복음20장에 보면 포도원 품꾼과 그 주인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어떤 품꾼은 하루 종일 일했고, 어떤 품꾼은 단지 한 시간도 안 되게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이 일삯을 주는데 똑 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는 것입니다.


하루 종을 더위와 싸워가면서 땀을 뻘뻘 흘린 사람 입장에서 볼 때 주인의 처리에 대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참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주지 않느냐고 따지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비유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인간들의 사고 방식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가를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천국과 상관 없는 즉 예수님의 피흘리심의 은혜와 상관 없는 자들의 생각이 이와 같습니다.

항상 자신들이 땀 흘린 만큼 받을 수 있다는 당위성에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의 피흘리심의 은혜 속에 산다고 하면서 그 마음의 생각이 피흘리심의 은혜와 상관 없는 자들이 수도 없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 아주 큰 장례식이 치러졌습니다.

한국카톨릭의 아버지라고 할까요. 김수한 추기경이 죽었는데 온 나라가 난리입니다.


몇 년 전에는 성철 중이라는 사람이 죽었는데 그때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에 죽은 것에 대해 너무나 안타까워합니다.


언론들은 앞다투어 이 사람들의 생애를 조명하면서 얼마나 우리 인간세상에 좋은 일을 많이 하고 가신 분들인가라고 보도합니다.


그저께 뉴스를 보니 세상의 빛이었다고 맨트를 달았습니다.


수십만이 죽은 사람의 얼굴을 보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 선 모습.


참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너무나 비교되는 죽음이요 장례식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들 자신들이 볼 때 자신들의 가치에 합당한 업적을 이룬 사람에 대해서 그냥 보낼 수 없는 것입니다.


톨스토이 단편 중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 고통을 함께 하는, 진심어린 사랑으로 산다고 합니다. 단편들 내용의 핵심이 대부분 그렇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 톨스토이가 인간의 마음을 너무나 잘 표현해 두었습니다.


진심어린 사랑이 곧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것인데, 김수환 추기경의 행동이 천국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 지금도 뉴스에 나오는 강모씨라는 살인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런 인간은 지옥가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저런 인간이 천국가면 우린 천국 안가겠다는 것이 인간들 입장아닙니까?


살인자의 모습과 사람들이 보기에 수많은 선한 일을 한 사람의 죽음으로 보면서 사람은 과연 무엇으로 사는가? 주님의 피 흘리심의 은혜로 사는가? 아니면 자신의 노동을 먹고 사는가?


틀림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수고의 댓가, 땀 흘림의 댓가를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이 아말렉과 전쟁을 한 후 의견이 나누어 집니다.

한 쪽 의견은 전장에 내려갔던 사람이 더 많은 분깃, 즉 수고의 댓가를 더 많이, 다 가지는 것이 옳다는 주장입니다.


목숨을 걸고 싸움을 한 사람과 그렇지 않고 피곤하여 다윗을 따르지 못한 이백명에게는 싸움의 댓가를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생각은 어떻습니까?

만일에 여러분들이 열심히 일하여 얻은 결과물을 타인과 똑 같이 나누라면 나누겠습니까?


아마 폭동이라도 일으킬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저들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다윗은 똑 같이 나누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옳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피흘리는 전쟁에 참여한 사람이나 피곤하여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사람 모두가 동일하게 나눕니다.


그 근거를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23절입니다. 

“다윗이 가로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정신이 번쩍 드는 말씀이지요.


전쟁은 여호와 홀로 하신 전쟁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눈에는 자신도 그 전쟁에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참여시키심은 오히려 참여한 인간을 부인시키기 위해 참여시키셨는데 인간은 자신의 수고댓가를 찾아 먹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8장1-15절을 보면 연보에 대해 나옵니다.

좀 길지만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이러므로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조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한 것 같이 많이 거둔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본문에 보면 연보라는 것이 나오는데 연보한 것을 칭찬합니다.

그냥 생각 나서 연보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할 수 있는가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쪽에서 돈이 얼마정도 필요하다를 알려 주었고 마케도냐 교회들은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연보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도 작정하여 연보를 시작했으니 작정헌금을 다 하라는 뜻하게 들립니다. 마치 삯꾼이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을 통해 성도가 무엇으로 사는가를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보면 진실한 사랑, 가난한 형제들을 도와주는 진실한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인것 같습니다.


죽은 김수환 추기경처럼 사는 삶, 아니면 성철 중이나 테레사 수녀처럼 사는 것이 성도의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심어린 사랑을 바울이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지 결코 돈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돈이란 어떤 것입니까?

생명과도 바꿀수 있는 것이 돈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피같은 생명같은 돈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생명을 내어 놓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무엇으로 살아가는 지를 증거하는 인생입니다.


물론 돈을 내어 놓았다 , 내 피같은 살같은 돈을 내어 놓았다. 그러니 내 주님의 은혜를 알지가 아닙니다.


주님의 피흘리심, 십자가의 은혜를 전하는 모습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수고 했으니 당연히 이 돈은 내 것이요, 내가 수고했으니 내 수고의 댓가를 내가 챙겨야지가 아닙니다.


9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사는 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성도는  무엇으로 삽니까?


주님의 피흘리심의 은혜로 삽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신이 은혜와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해 어떻게 참여할 수 있습니까라고 적극적으로 그것도 간절히 묻습니다.


여기에 대해 답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은혜를 받은대로 하시오가 아니라 지금 얼마가 필요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은혜를 아니가 그냥 알아서 하고 알아서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똑 같은 모습이죠.


나 누구를 돕고 싶은데 얼마가 필요합니까? 얼마가 필요합니다.

뭐가 다릅니까? 별로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이 결과물을 자신에게 돌리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자신에게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떻습니까?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비슷하고 동일한 모습을 보이면서 성도는 그 속에서 주님의 피흘리심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은혜요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은혜를 모르는 인간은 자신의 행위의 댓가를 먹고 살지만  성도는 주님의 피흘리심의 은혜를 증거하는 삶을 삽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사무엘상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해 56  (0) 2009.03.02
강해 54  (0) 2009.02.15
강해 53  (0) 2009.01.18
강해 52  (0) 2009.01.12
강해 51  (0) 2009.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