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세이

영혼론 2

푸른 섬 2011. 10. 9. 13:19

2.

[그러나 이러한 당혹감은 죽음 이전과 이후에 존재하는 영혼의 동일한 영혼이라는 진리에 의해, 다시 말해서 영혼은 죽음 이전이나 이후 모두에서 동일한 본성을 유지한다는 진리에 의해, 그리고 또한 죽음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여러분, 죽음 이전과 이후가 동일하게 되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자체가 깨져 버립니다. 왜 깨지냐 하면, 영혼이라는 게 직접 작용하는 것 아닙니까? 소위 말해서 영혼이라는 것이 살아생전에 정보를 모으잖아요. 그래서 지금 나쁜 영혼들, 불량 영혼이에요. 나쁜 영혼들이 이 땅에서 살면서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나쁜, 불량 영혼이 되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심판받아서 지옥 갔잖아요. 그런데 죽고 난 뒤에는 나쁜 것을 못 보잖아요. 그러니까 천사들 보고, 하나님을 볼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만일 동일한 영혼 같으면 어떻게 돼요? 계속해서 직접 작용을 계속 발휘하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나쁜 생각을 안 가지고 무슨 생각을 가진다? 좋은 생각을 가져 버리면 그 사람을 지옥 보낸 하나님의 심판이 나중에 빼내 줘야 돼요. 너 죽고 난 뒤에 사람 되어 버렸네. 안 되겠다. 너는 지옥 갈 사람이 아니고, 천당 가자. 나중에 도로 그 사람을 어떻게 해요? 천국으로 보내야 할 판이에요.

여러분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신학을. 영혼이 동일하냐, 안 하냐? 여러분 고견을 부탁합니다. 동일합니까, 동일 안 합니까? 그런데 만약에 죽기 전의 영혼과 죽음 후의 영혼이 동일하다고 만약에 그렇게 되면, 지옥 간 사람들 다 빼내주고 천당 다 보내야 돼요. 죽일 수 없네. 착하게 사네. 이러면 천당 보내고 끝나요.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죽고 난 뒤에는 영적인 영혼의 직접 능력은 스톱이 돼야 돼요. 스톱이 된다면 이것은 동일합니까, 동일하지 않습니까? 안 동일하잖아요. 그렇죠? 논리가 그렇잖아요.

그래서 천주교는 어떻게 합니까? 비록 영혼이 지옥 가더라도 남들이 그를 위해서 밑의 후손들이 기도해 주면 그게 감동감화 받아서 어머니, 내가 이렇게 어머니가 천당 가고 어머니가 지옥에 있는 나 보고 이렇게 지금도 천당에서 기도하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나쁜 짓 안 하지. 아이,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지옥에서도 회개하면 뭐가 됩니까? 천국으로 빠질 수 있고, 천국에 간 그 엄마는 지옥에 있는 아들이 지금 나의 정성을 이해해서 나쁜 마음 영혼, 불량한 영혼 되더라도 우량 영혼으로 개조할 수 있도록 열심히 도고, 중보의 기도를 열심히 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천당 가기 바빠. 자식만 그런 게 아니죠. 같은 계원들끼리도 다 해줘야 되지요. 초등학교 동창생들, 46회 동창들 위해서 다 해야 되지요. 왜? 성당 다니다 지옥 갔으니까. 천당이 되게 바쁜 데가 됐어요. 뭐, 합당합니다. 면류관 반환할 시간이 없어요. 전부다 그거 하느라고 바빠. 방금 제가 이야기한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참, 그러니까 영혼을 따로 빼낸다는 거 이렇게 위험해요. 이러한 얽히고설켜 있는 난제들도 모르고 그저 개신교들도 죽으면 육체는 흙에 묻히고 영혼은 하늘에 갑니다. 이렇게 하는데 그러면 짓궂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러면 그 영혼은 이 땅의 우리의 중심을 이야기하는 거요, 우리의 자아를 이야기하는 겁니까? 물어오면 목사는 난 모르니까 그것은 알아서 하소. 하고 넘어가지요.

[따라서 죽음 이후에 영혼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로 비자연적으로 진리에 의해 어느 정도 설명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의 문제점이 여기에 등장하는 거예요.

[영혼의 자립성은 인간 영혼이 신에 의해 직접 창조된 것이며]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직접 창조. 여러분, 영혼이 하나님께 직접 창조된 겁니까, 아니면 성경을 봐서 우리 인간 자체가 창조된 거예요? 영혼이 직접 창조된 게 아니고, 인간이 창조된 것 아닙니까?

왜 토마스 아퀴나스가 영혼을 직접 창조 하느냐 하면, 인간의 육체는 어디서 창조되었냐 하면, 직접 창조가 아니고, 간접 창조지요. 그러면 인간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빠, 엄마에서 태어났지. 뭐. 간접 창조죠. 직접 창조가 아니고. 간접 창조인데 다만 그 아이의 정신상태는 부모가 간여 못하고 누가 손댄다? 신에 의해서 손댄다. 따라서 육체는 별로 말하지 않고, 영혼은 직접 하나님이 간여하기 때문에 부모라도 개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이가 무슨 생각하는지 부모는 모르기 때문에. 부모는 외인이기 때문에. 바깥에 있기 때문에.

자립적 영혼을 주장하는 이유가 뭐다? 제가 뭐라 했습니까? 그것은 각자각자 받은 하나님의 사명에 충실히 하라. 이런 윤리적인 교훈을 그런 목적을 제공하는 그런 훌륭한 신학이 되기 위해서 이러한 신학이 준비되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기독교는 인간이 지상에서 유일회적으로 현존하는 개체 인격이라고 명확하게 규정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사상은 이미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교의 종교적 개인주의를 통해서 사전에 준비된 바였다. 이렇게 인간을 개인으로 보려는 사상의 출발점은 예수님의 사신(私信)에서 그 동기를 발견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전에 있는 신학자들과 차별 나는 게 뭐냐? 라고 물으신다면, 그전에 있는 신학자들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했죠. 그전의 신학은 뭐냐? 하나님과 집단 인간들, 인간 전체가 하나님에서 어떤 운명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끝이 난다. 이렇게 보던 것이 이게 어거스틴에서 정리되었지요.

어떻게 정리되었습니까? 모든 인간의 영혼은 어디서 나왔다? 어디서 흘러 나왔습니까? 아담이라는 죄로 오염된 영혼이 모든 인간이 물려받았지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항상 이야기할 때 어떡해? 모든 인간, 모든 사람. 이렇게 해서 모든 성경을 설명을 해 왔었다 이 말이지요.

토마스 아퀴나스의 공헌도가 뭡니까? 공헌보다도 변화된 게 뭡니까? 이렇게 일단 이건 맞고, 이건 알고 그 다음에 뭘 따집니까? 따지는 것이 영혼은 개별적이라는 것. 아시겠습니까? 여러분 이것 기억하세요. 어거스틴은 뭡니까? 포괄적으로 인간에 대해서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면, 토마스는 개별적으로 이야기했으며, 이 개별적이 강조된 것은 나중에 종교개혁 때 루터와 칼빈에서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루터, 칼빈이 툭 튀어나온 게 아니고 벌써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서 나온 거예요. 토마스 아퀴나스 그 다음에 둔스 스코투스. 둔스 스코투스는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한 걸음 더 나가요.

어거스틴은 하나님과 전체 인간의 관계, 토마스 아퀴나스는 전체 인간은 그건 맞고, 더 구체적으로 개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존재의 존재성, 둔스 스코투스는 존재성 중에서도 본질에 대해서. 존재와 본질을 구분합니다. 존재는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제일 밑바탕. 그런데 본질은 인간의 됨됨이는 자기하기 나름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우리 책임이 다한 것이 아니고 일단 하나님 믿었으면, 그 다음에 각자각자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 사람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겁니다.

노력 여하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사고가 등장하면서 뒤에 둔스 스코투스 다음에 윌리안 오캄이 나옵니다. 오캄이 나오면서 과학정신이 발달합니다. 신을 안 믿는다는 것이 아니고 믿습니다. 믿고, 그 다음에 우리 생활을 향상한다는 것은 신에게 의지할 필요 없고, 이것은 우리가 따로 개별적이고 자립적 존재. 자립적으로 우리 살림은 우리가 꾸려 나가야 이것이 신이 내린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게 나중에 데카르트, 칸트, 뉴턴, 근대 과학의 사상의 기초가 되겠죠. 아시겠습니까?

신이 안 믿겠다는, 신을 버리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신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긴 이상은 개별적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되는데 하나님 주신 사명, 맨 날 하나님 찾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 일단 믿지만 이제는 그것 찾지 말고 내가 나의 지혜, 내 속에 있는 본질, 그런데 내 본질은 다른 사람하고 달라요. 내 재능, 내 아이큐는 다른 사람하고 달라요. 나의 아이큐는 내가 발휘해서 나만의 뭔가, 신에게 봉사하는 독특한 지혜를 썩히지 말고 계발해야 된다. 이게 바로 서양 근대 과학의 사상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여러분, 한 번 물어 봅시다. 왜 동양에서는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습니까? 왜 서양에서는 근대 과학이 발달되고 왜 동양에서는 안 튀어나온 이유가 뭡니까? 뭐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신에 대한 사명감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간단한 문제에요. 학교에서는 그걸 쉬쉬하는데. 신에 대한 사명감이 없어서 그래요.

동양의 중세 때는 농경시대 아닙니까? 농경 시대는 신이 있지요. 신을 믿지요. 그 신은 무슨 신입니까? 하나님과 집단 인간이지요. 개별적인 게 아니고. 하나님과 우리 왕, 임금님을 세워서 이렇게 임금님이 제사를 잘 드려서 이렇게 농사짓는데 비가 오게 되었다. 만세, 만만세. 우리 황제여, 만만세. 끝이에요. 끝이란 말이죠. 개별적으로 독특하게 신이 뭐, 황제를 위해서, 웃기지 마라. 신은 개별적으로 나와 직접 영혼을 다룬다. 이런 신과 내가 직접적으로 나의 사명이 있다는 개념은 없고, 신은 어디서부터 온다? 임금님에게 오고, 임금님 제사 잘 드리면 우리 농사짓는데 비가 잘 오고 농사 잘 지으면 우리는 그러면 자연의 신에 대해서 그들의 신은 자연의 신이니까 풍요의 신에 대해서 찬양하자. 그러면 끝나잖아요. 그게 전부 아닙니까?

그러니까 과학이라는 것은 개별적으로 독자적으로, 여러분 과학이 처음에 할 때 과학 했다고 월급 준 줄 압니까? 각자 직업 가지고 짬 내어서 시간 내어서 그래서 힘들게 육체의 손상해 가면서 거기에 매진한 사람들이 초기의 과학자들입니다. 과학협회라는 것이 나중에 등장해요. 처음에는 과학자하는 사람은 그것은 미친놈이라 했어요.

에디슨 알지요. 그게 완전히 둔스 스코투스에 의하면, 에디슨이 왜 다른 사람은 계란 보면 톡 깨어서 먹는데 애가 암탉이 되어서 달걀을 품고 왜 그런 짓을 하느냐? 둔스 스코투스에 의하면 존재는 같은 존재이지만 뭐가 다르기 때문에?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특별한 사명을 받아서 그렇게 한다고 이렇게 보지요. 다른 사람은 그냥 아르바이트하고 신문배달하면 되는데 지는 뭐, 기차간에서 신문 찍는다고 찍다가 불내고 그랬잖아요. 그 사람, 나중에 사기꾼으로 변했지만. 남의 제자가 발명한 것을 직접 했다고 하다가 욕먹고, 나중에 한계가 떨어지니까 발명이 안 되잖아요. 안되니까 텍스라는 그런 제자들이 한 걸 자기 이름으로 하다가 걸려서 우사 당하고. 아주 말로가 희안했어요. 좋지 않았어요. 에디슨은 발명가로 보지, 과학자로 안 보죠. 그래서 교육 안 받으면 아이가 ... 아인슈타인을 막 높이고 그렇게 하지요.

그것은 인간의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본질 자체가 정당화될 때 그 다음부터는 개별적인 이유는 신부한테 물을 필요도 없고, 교회한테 물을 필요도 없고 내가 신의 자녀로서 내가 나하고 싶은 것, 내가 즐기는 것을 해 나가면 되는 거예요.

그러한 개별적인 자립적인 주체의식이 어디는 없다? 동양에는 없다 이 말이에요. 동양은 기가 이와 기에 의해서 모든 것이 지배받는 거예요. 자연에 순화되고 자연에 그냥 자연에 복종하면 그게 올바른 인간인 줄 알았지, 개별적으로 신의 사명을 감당해야 인간답다 하는 것을 그런 사상은 토마스 아퀴나스, 둔스 스코투스, 그 다음에 칼빈, 루터 이런 사상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키케로Cicero(106-32)는 인간이 품격을 동물로부터 인간을 구별하는 이성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인간의 품위는 동물하고 다른 점에 있다는 이 말입니다. 그냥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하면 되는데 인간의 품격을 동물로부터 인간을 구별하는 이성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았다.

[기독교 교리는 인간의 품격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개개인들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그 토대를 두었다. 창세기 9장 6절에 따르면 개개인들의 생명은 신성불가침이다.] 신성불가침, 이 말도 옳은 말이 아닙니다. 신성불가침이란 말은 별로 좋은 말은 아니지요.

[우선적으로 기독교는 유대교의 신앙적 동기를 이어가면서 하나님과의 일치로 인해서 주어지는 생명과 자유라는 시각에서 인간의 품격을 개인에게 속한 신성불가침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여러분 다 아시겠지요.

[더 나아가서 분명히 기독교 사상에서 그 의미가 심화된 인격(person) 개념이 이런 정황들과 연관된다. 이런 심화를 통해서 인격적 존재는 개인의 품격에 대한 총괄 개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개인의 품격을 높이기 위한 인격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분여될 표준적인 인격 개념이 선행된다.] 이 개념이 뭡니까? 이게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개별적인 인간들 가운데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그것은 뭐냐?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이 로고스의 인격에 참여하는데 ...

[레온티오스는 이런 관계를 명시적으로 주체화했는데]

여기 무슨 단어가 있어요? '주체'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지요.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있다, 없다를 뭐로 안다고 했습니까? 주체. 주체에서 파악되면 하나님이 있는 거고, 주체자가 파악되지 못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야기했습니다. 옛날에 있다, 없다는 뭐로 봅니까? 옛날에 있다, 없다는 모든 게 그냥 있음이죠. 없음이 없는 모든 게 있음이에요. 왜냐하면 있기 때문에 있는 우리에게 눈에 띠잖아요. 모든 게 있음인데 주체사상이 들어오면 주체가 알 수 있는 것만 있고, 주체가 봐서 없는 건 없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신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냥 모른다고 해야지요. 그냥 있을 가능성, 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신이 눈에 안 띠니까 그냥 가능성만 있을 뿐이죠. 이게 기초가 뭐냐? 주체사상이에요. 그 주체사상을 조직적으로 설명한 사람이 칸트에요.

칸트는 감각에서 나온 것을 인간의 오성이 재구성함으로서 비로소 진리화 되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거요. 느끼는 것이 믿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그걸 칸트식으로 목회하게 되면 뭘 강조해야 됩니까? 간증을 강조해야 되고 기적을 강조해야 되지요. 하나님 있습니다. 한번 경험해 보세요. 간단한 말이에요. 한번 경험해 보세요.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 살아 계심을 아실 것입니다. 또 간증집회. 어릴 때 이렇게 살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인도했고, 몇 살 때 이렇게 인도했어. 이걸 봐서 하나님 살아 계심을 압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했고, 체험한 그걸 모아 모아서 나의 오성으로 나의 직감으로 재구성하니까 그것이 나만의 신, 주체자에 맞는 신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체적인 신개념이 근대의 관념론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데카르트고 칸트고 .

그러면 그전에는? 목사님. 그전에는 개인에게 신이냐, 아니냐? 물을 필요 없이 무조건 있음입니다. 존재니까. 그전에는 어땠습니까?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나를 존재케 한 존재자가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신의 존재는 뭣 때문에 있다? 내가 존재하니까 신은 존재하는 거예요.

그런데 근대사는 뭡니까? 신이라 하는 것은 나의 존재에서 아는 것이 아니고 나의 인식으로 아는 거예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인식하는 한에서 내가 존재를 알지, 내가 꿈속에서 만약에 내가 죽어 버리면 나는 없어 버리는 거죠.

그래서 데카르트를 말하기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존재가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이다? 내가 생각하는 게 우선이고 그 다음에 존재가 나온다 이 말이죠. 이게 실제 목회나 실제 설교에서 빈번하게 나옵니다. 여러분 나처럼 믿으시면 구원받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쉽게 쉽게 나옵니다. 그러나 나처럼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의 핵심이 뭐며, 성경의 복음의 중심이 뭐냐? 이렇게 성경을 소개해야지, 나는 지난날 기도원에 가서 이런 체험을 했다.

자꾸 잠이 오니까 여담 하나 이야기할게요. 대구의 부광교회 있는데 그 부광교회 교인들이 우리교회 몇 명 와버렸어요. 부광교회 박노진인가 있어요. 미친놈 하나 있어요. 배재인이라는 서리집사가 있는데 복음을 알고 내촌감삼의 책들을 읽고 강하게 밀어 붙였어요. 뭐, 이게 무당이냐? 강하게 밀어 붙였어요. 그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가지고 우리교회에도 올리고, 자기 교회 사이트에도 올리고 그랬다고. 그러니까 박 목사라는 그 사람은 정치적 통박이 돌아가야 되잖아요. 배라는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이, 지가 서리집사 하나가 뭐, 한다고 꿈쩍이나 할까 이렇게 했는데 아, 자기도 예상 못할 정도로 부교역자나 장로들이 영향이 되게 세게 나갔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그냥 이야기만 한 게 아니고 찾아다니면서 장로 똑바로 하라고 이렇게 해서 되느냐고, 하나하나 이야기 했다고. 그리고 그 장로들이 가만히 들어보니까 전부다 맞는 이야기에요. 맞는 이야기니까 그만 거기에 동조 해버렸어요. 그래서 장로가 목사를 불렀지요. 내가 이 교회 60년 봉직했는데 니 나갈래, 내 나갈래? 그게 삼천 명 모이는 교회인가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때 보통 목사들이 자기의 모든 재능을 발휘합니다. 그 첫 번째 하는 흔히 하는 수법이 뭡니까? 기도원에 갔다 오겠습니다 합니다. 기도원에 갔다 오겠습니다를 왜 하느냐 하면, 목사가 어려움이 왔을 때 결국 인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한다는 신앙적인 길을 교인들에 부각시킴으로서 아직도 주의 종으로서의 품위를 상실하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기도원에 갔다 온다고 하지요. 기도원에 갔다 와서 2차 처리가 뭐냐? 부교역자에 대한 단도리. 너희들, 이 틈에 내 편 안 되면 작살난다. 잘 해. 만약에 니가 잘 안하면 조진다. 갔다 와서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기도 응답 받았습니다. 하는 이야기죠. 응답이 뭐냐 하면, 서리집사를 치리하는데, 원래 서리집사는 교회에서 치리하게 되어 있는데 교회에서 치리하게 돼버리면 전부 누구 편입니까? 장로가 저희 편인데, 치리하면 문제가 있기 때문에 서리집사 치리하는 걸 노회에다 걸어 버린 거예요. 세상에 서리집사 치리하기 위해서 노회에다 거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배 집사님이 하는 말이, 참, 목사님, 웃기데요. 아들. 서리집사 치리하기 위해서 노회에다 고소하는 사람 첨 봤다. 얼마나 옳은 소리가 무서웠으면. 막 자기 선전하기 위해서 기독교 TV에 돈 주고 설교 나오고 해서 그동안 자기 카바하기 위해서 온갖 것 했는데, 서리집사 하나 못 이겨서 하고, 그 다음에 배 집사가 칠곡에 있는 어느 개척교회, 교인 세 명 모인다고 하든가, 엠디비 나와서 석사학위 받아서 엘리트인데 지하실에서 하는데 그 목사하고 성경 공부한다는 거죠. 그렇게 되니까 네 번째 작전이 뭐냐 하면, 그 목사가 같은 칠곡 교회에 있는 세 명 모이는 그 교회의 목사의 뒷조사를 시작한 거예요. 노회 쪽으로, 목사를 조진다기보다는 협박용으로 사용해서 그 목사도 이제는 아이고, 형님 잘못했습니다. 이제는 그 집사하고 안 놀게요. 라는 소리를 받아내서 전부다 자기편으로 포섭하게 하는 작전에 들어가는 거죠. 그래서 지하실에서 개척 교회하는 목사들 동기, 부목사들이 있으니까, 조심해라. 노회에서 네 뒷조사 들어간다.

결국 교회란 것이 이렇게 되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칠곡이란 동네가 무슨 동네냐 하면, 신개발지거든요. 아파트거든요. 사람들이 거기에 왜 가느냐 하면, 일단 건물이 크고,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머니까 시내에서 배웠던 그 상식적인 종교를 그대로 가르치는, 그러니까 그냥 가까운 곳에 정성 드리려 가는 것처럼 갔다가 거기에서 사람들이 ... 그러니까 이 부광교회가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고, 목사님, 다 잘못되었네요. 과거에 다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와서 그들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방금 공부를 했지만 그 목사, 교회의 사명이 복음적이 아니고 뭐냐 하면, 존재. 내가 그러니까 그동안 뭐라고 속였느냐 하면,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 살아 계신 게 아니고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교회, 우리가 크잖아요. 컸으니까 크다는 것은 뭔 뜻이다? 신께서 복을 많이 주고 있는 증거다 이 말이지요. 거기에 교인들도 동의를 한 거지요. 그리고 거기에 목사 보고 당신이 나가든지, 내가 나가든지 하는 장로도 마찬가지에요. 그 장로도 복음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고, 자칫하면 이 교회가 깨질 판이니까, 내가 수십 년간 봉직한 교회니까 이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니, 좀 나가줘. 니, 몇 년 전에 왔노? 나 오래 있었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교회들의 출신들이 신학교 가서 목사 됐으니까 복음이라 하는 것이 서로 다 모르는 상태지요.

? 교인들은 교회 일에 관심이 없어요. 왜 관심이 없냐 하면, 개별적으로 교회 와서 들은 풍월이 뭡니까? 나의 존재는 신이 주신 신이 내리신 선물이다. 따라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가스배달이든지, 내가 하고 있는 어떤 공무원, 직장 시험 쳐서 합격한 것은 신의 기적이다. 내가 나름대로 갖고 있는 신에 대한 확신, 경험, 체험한 것에 대해서 나의 오성으로 재구성된 그런 신개념을 그것을 터치 않는 이상은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래서 나같이 훌륭한 사람을 집사 시켜주고 장로 시켜주고 그러면 나는 그 교회에 헌금해 주겠다는 거지요. 하지만 나는 건드리지 마라. 나는 신의 흔적을 가졌노라. 그런 조로 지금 교회 안에 있어요. 십자가 앞에 모두 굴복하는 이런 게 없어요. 십자가는 빼버리고 나머지 면에서 내가 조립한 나의 신, 나의 하나님, 그걸로 무장된 것이 교회 형편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누가 불쌍하냐 하면, 가만히 있는 지하실에 교인 세 명 데리고 가만히 있는 그 사람이 치리 당할 판이라. 그 사람은 누굴 존경하느냐면, 그 사람은, 권성수 교수, 그 사람은 학교 때 교수할 때는 뭔가 복음 전하는 것 같은데 설교하는 것 보니까 엉망이다. 그 사람은 설교 되지도 않았어. 목회하면서 사람 버렸어. 이 정도 아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뭘 좋아하냐면, 박영선 목사 좋아하고, 주님의 교회의 이재철, 그 사람 좋아하고. 그 정도 수준에 해당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그 사람의 논문이 오바댜 논문인데 내가 봤는데, 뭐냐 하면, 국어시간이에요. 문자적으로 구조학적으로 김지찬에게 배워서 하는 거예요. 그 정도에요. 그러면 이근호 목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사람도 필요하고. 우리나라 한국교회에. 그런 사람도 필요하고. 그런데 졸지에 가만있는데 ...

자, 그래서 그러면 목사님, 칸트가 그렇게 하나님을 가르쳐주는 그 하나님은 엉터리 아닙니까? 칸트는 자기가 엉터리라고 보지 않지요. 칸트의 마지막 것은 뭐가 나오기 때문에? 윤리가 나와요. 인간은 뭐냐? 인간은 체험한다.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최고의 체험은 뭐냐 하면, 산상설교에 나오는 신의 세계,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윤리가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최고의 윤리입니다. 따라서 사람이란 뭐냐? 무조건 선한 일을 해야 된다. 왜? 인간 속에 하나님 나라, 신의 윤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이게 칸트의 철학의 전부입니다.

인간의 신은 자기가 체험한 것을 모은다. 모으는 가운데서 최고의 체험은 뭐냐? 동물과 달리 짐승과 달리 왠지 착하고 싶고, 왠지 바르게 살고 싶은 그것이 있는데 그것은 누가 줬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니까, 그 윤리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 최고의 신학이다. 라고 했을 때 그 당시의 성직자들이 좋아했겠습니까, 안 했겠습니까? 둘 중에 하나. 안 했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교회 갈 필요 없이 양심적으로 바르게 살고 가정교육 잘 받고 교육 많이 받은 사람은 어디 갈 필요 없습니까? 교회 다닐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유럽에 교회 안 다니잖아요. 니, 뭐 아노? 나도 많이 안다.

개별적으로 그러니까 신부하고 목사한테 매일 필요 없다는 거죠. 우리 속에 스스로 돌아보면 내 속에 뭐가 있습니까? 양심이 있고, 그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형상이기 때문에 이걸 발휘하면 이것이 신의 뜻인데 내가 뭐 하려고 돈까지 줘가면서 교회에 왜 가느냐 말이에요.

그러니까 점점 더 한국교회가 동양적인 의식에서 근대사상이 들어오면서 뭐도 들어왔다? 칸트의 개별적인 주체사상도 들어왔고 개별적인 영혼은 어디서 나왔다? 아까 해 왔죠.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거기서 하나님과 연관된 개별자가 떨어지고 개별적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둔스 스코투스, 그것이 발달되면 어디로 나옵니까? 드디어 내가 돌입하는 내가 생각하는 나, 내 속의 하나님을 생각하지요. 그게 데카르트고, 칸트고 그것이 몽땅 우리나라에 근대 구조로서 수입해 왔기 때문에 옛날에는 농경시대니까 아버지, 어머니의 효자가 지금은 핵가족해서 지 살기 바쁜데 뭐. 하나님도 마찬가지고, 교회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고, 교회 그런데 관심 없고, 복음도 관심 없고, 내 잘났다 그것만 관심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절대 자아고, 그렇게 번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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