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세이

3. 어거스틴

푸른 섬 2011. 9. 26. 21:08

3. 어거스틴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이 사람들이 개인적인 건강 문제라든지, 지위 문제라든지, 남들한테 어떤 인기 영합하느냐 그런 문제가 아니라 진리를 어떻게 대중들에게 설파하느냐, 그걸 어떻게 알리느냐 거기에 치중을 하죠. 굉장히 넓게 살았죠. 넓게 산다는 것은 작은 변화에 대해서 마음 조아린다든지, 그것 가지고 깜짝깜짝 놀랜다든지, 조바심을 낸다든지 그런 식으로 자기 마음을 황폐화시키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대가들, 공부를 그 당시에 많이 했던 사람들, 토마스 아퀴나스 이런 사람들이 지금은 인기 좋죠. 그 당시엔 인기 좋은 사람 아니었어요. 항상 권력 밖에서, 공부란 것은 권력과 관계없이 해야 돼요. 권력과 관계있다 보니까 권력자들이 가만 두질 않지요. 그러한 수모를 당하는 가운데서도 진리에 대해서 어떻게 정립을 해나갈 것인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신이란 피조물의 영원이 찾고 있는 행복의 원천이란 것이다.]

상당히 대중들을 감안했죠. 대중들에게 신이란 무엇인가 관심이 없거든요. 대중들은 신을 찾는 것은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찾기 때문에 행복도 신이 보장해 준다는 것을 그것을 하나의 상품으로 어거스틴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변화하는 가시적 세계의 아름다움은 불변하는 미에 대한 창조이고 반영임을 감각물들이 고백하고 있다.]

행복이란 것은 어떤 때 행복하냐 하면, 아름다울 때 행복하다. 라는 것은 헬라 철학에서 이미 나왔다 말이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왔던 거예요. 아름다운 걸 볼 때에 행복하다 이 말이죠.

행복이라 하는 것은 돈을 가질 때 행복이라 하지만 그 정도는 그것을 하나의 탐욕이라 하는 것을 그 당시에 상식으로 아니까. 진정한 행복이란 아름다운 마음씨,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육체, 얼짱, 몸짱, 그런 걸 갖고 있을 때 아름답다고 하잖아요. 배 불룩 튀어나온 아줌마들 걸음걸이를 보고서 야, 아름다워라. 오늘 왜 이렇게 행복하노. 이런 사람 없잖아요.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가려고 하는 것은 이 한국 땅에서 자신의 아름다움이 먹혀들지 않을 때 자기 존재가치가 사라지고, 자기 존재가치가 사라지면 자신의 장점을 안 알아 줬을 때는 스스로 불행을 비극을 느끼고 그 비극을 모면하고 행복을 찾기 위해서 자기가 환영해 줄 그러한 대상을 찾아 먼 타국으로 갑니다. 바로 그러한 과정을 그들은 어디다 핑계를 대느냐 하면, 신의 뜻이다.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름답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는 참혹하지 아름답지 않지요. 십자가가 아름답게 보인다? 그거 좀 문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돼요. 만약에 돌 뿌리에 팍 엎어져서 코피 나고 이빨 깨져 보세요. 피범벅 돼 보세요. 그게 아름답습니까? 흉측하지요. 십자가는 흉측하지 아름답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것이 흠모할 것이 없어요.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을 명확하게 구별하기보다는 전자는 후자의 관계에서 그리고 후자를 통해서 완성된다.

어거스틴은 자연신학와 계시신학을 하나로 통합을 시도한 겁니다. 통합을 시도해야 신이 신답지요. 신은 노는 분이 아니잖아요. 신은 일 하잖아요. 어디 안에서? 자연 안에서. 자연 안에서 신이 일한다는 말은, 어디 나무를 구원하거나, 물고기를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고, 자연 속에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점유하고 있는 인간의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신의 살아계심과 그의 일하심이 어떤 계시로서 우리에게 작용하느냐? 그걸 파악할 수 있어야 신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장 크고 높은 존재라는 것이 신은 가장 크고 높은 존재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이야? 그게 우리한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그걸 아는 것이 행복이다. 이 말입니다. 내가 신을 알기 전까지는 행복을 몰랐다. 그러나 나는 신을 알고부터 비로소 내 영혼은 안식했다.

삼위일체도 그렇고 중세철학도 그렇고 항상 출발점을 어디서 합니까? 인간이 이미 은근히 원하고 있던 신성, 인간 속에 신을 향한 신성이죠. 신을 향한 염원이 있어요. 그 염원을 누가? 누가 들어줘요? 신학자들이 잘 구슬리고 그들에게 원하는 모든 논리를 제공해 줄 때 그들은 자기 속에 신이 있고 내가 신을 안다는 행복감에 젖을 수 있겠죠.

신을 안다는 말은 이미 그 복을 따먹을 수 있다는 이 말이거든요.

신의 존재하는 신은 그분은 어떤 분이냐 까지 알려줌으로서 확실하게 대중들에게 민중들에게 당신은 신의 자녀입니다. 라는 것을 각인시키고 새길 수 있는 그러한 작업에 종사한 자들이 바로 신학자들이요, 그 당시의 중세철학자들이었다 이 말입니다.

신학자들이 알고 있는 신학자들은 신을 증명해 내버렸으니까. 소위 말하는 별 따고 달 따서 그들이 갖고 있으니까. 신학자들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거기 어디에 도착합니까? 신의 나라에 천국에 도착하는 거예요.

어거스틴은 대중들의, 인간의 행복은 어디 있다? 신을 존재하는 것에서 멈추면 행복이 없고, 어디 까지 나와야 된다? 신을 아는 데까지 나오는데 그 신을 아는 것에 대해서는 자기가 한 지식하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을 주기 위해서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거예요.

플로티누스라는 철학자는 현재 자연 있음, 이걸 가지고 있음으로 봤고,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계심을 가지고 있음으로서 출발한 겁니다. 하나님이 계셨는데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무에서 창조했다. 자, 이렇게 돼버리면 신은 어디에서 빠져버립니까? 피조세계에서 빠져버리죠. 피조물에서 빠져 버리면서 피조세계와 창조주와 확연하게 쫙 갈라지겠죠. 서로 대치하면서 갈라지겠죠. 그런데 앞에 있는 헬라철학자들은 뭡니까? 자연 그것 자체가 신이고 신과 자연은 하나가 되어 있어요. 쫙 갈라진 게 아니에요. 철학가들이 어거스틴한테 이렇게 질문할 겁니다. 신이 천지를 없는데서 창조했다면서요? 창조했지요. 그러면 피조물이 없는 데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있음은 다시 없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있음은 있음으로 끝나는 거지요.

지금 헬라철학은 전부가 있음이라는 한 세계 아래 아닙니까? 그런데 어거스틴은 하나님 세계 따로 있고 무슨 세계? 하나님에게서 만든 세계, 피조세계가 따로 있지요. 있음의 세계가 따로 있지요. 그러면 이 피조세계에서 이리로 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무에서 나왔기 때문에 못 가잖아요. 하나님이 없는 데서 세상을 만들었다는 이 자체는 논리로는 허락이 안 되지요.

다같이 있는 세계에서 한 쪽이 세상을 만들었다면 이해되는데 그러면 헬라철학처럼 이렇게 다같이 신과 자연이 한 세계였다, 한 세계였는데 신이 자연을 만들고 인간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곧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왕 같이 한 식구기 때문에 인간이 추진해 나가면 어디에 도달할 수 있다? 신까지 도달할 수 있겠지요. 같은 있는 세계니까? 여기서 길이 나왔다 하면, 이 길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갈 수 있잖아요.

그런데 없는 데서 생겨 버리면 없는 놈이 생겨 버리니까 신에게 못 가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가 자기 스스로 자기 존재를 돌릴 수 있는 재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김용옥 교수는 모든 것이 변화할 뿐이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양태, 양태론이에요. 양태, 형태만 변화된다는 거죠. 뭐로? 기. 요즘 말로 에너지로 달라질 뿐이지, 형태가 달라질 뿐이지 그건 아니다 이 말입니다.

질료가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바로 에피쿠로스학파 또는 스토아학파고, 형상이 우선이다, 형상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질료가 있다, 그냥 질료가 있어 버리면 그게 뭐가 뭔지 물에 물탄 것처럼 아무것도 없다 이 말이지요. 그렇게 주장한 것은 바로 고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그렇게 나온 겁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점은, 플라톤은 형상은 따로 모여져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각 개체마다 형상은 따로따로 존재한다. 그런 차이가 있어요.

어거스틴은 신이 형상 없는 제일 질료를 무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질료와 함께 형상과 함께 창조했다는 창조의 절대성을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이 후에 스콜라 철학에 이어져서 계속 나가는데. 해변의 모래밭에서 만난 늙은 현자의 생각의 물꼬를 터주는 것처럼, 영혼은 스스로에게서 이미 하나님 대한 직감을 소유하는 게 틀림없다.

어거스틴은 플라톤한테 그대로 받았어요. 어떻게 받았느냐 하면, [영혼이 신적인 것과 유사하다, 근사하다, 유사하다는 표상과 그래서 영혼이 선재한다는 표상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영혼이 선재한데요.

플라톤은 영혼이라 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아요. 이데아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 세계에 따로 모이는 것이 아니고 개별자 안에 질료와 형상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죽으면 그 안에 있는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되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인간 죽으면 같이 다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다 없어져버리는 거예요.

인간의 영혼도 인간이 죽으면 다 사라진다 하는 것은 요새 말하는 여호와증인 주장하고 좀 비슷하지요. 그렇게 돼버리면 그야말로 막가파 아닙니까?

사람이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지막에 뭐가 나와야 됩니까? 윤리가 나와 줘야 도덕적인 가치 있는 게 나와 줄 때 그 도덕적 가치를 배태하는 갖가지 논리도 가치가 있고 의미 있는 것이 돼요.

중세는 전부다 신을 믿었기 때문에 신을 믿는 이 사람들에게 신을 믿는 나라로서 어떤 윤리가 요구되는가? 윤리라는 것은 강요가 아니고 납득이 되어야 돼요. 강요하는 윤리는 독재지요. 그런데 들어보니까 내 속에도 하나님의 심성이 있으니까 그걸 발휘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되겠구나. 전부다 호응이 되도록 탄복하면서 수긍하면서 인정할 때 그 질서는 강요 안 해도 심성에서 심성으로 서로 엮어지는 게 되겠지요. 그럴 때 바로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경우에는 멋지단 말이지요.

영성수련기관하고 도대체 교회하고 차이점이 뭐예요. 지금은 영성수련기관에서 하는 걸 교회는 그대로 다 수입해서 간판은 교회고 안에는 수련장이고 그래요. 심신수련장. 마음수양장. 불교라니까. 절간이에요. 참선하는 선불교.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나오듯이 영원한 빛의 세계에서 어둠에 갇힌 우리들에게 빛을 비췸으로서 우리 영혼이 각성한다, 깨어난다. 이걸 어거스틴은 뭐로 비유했냐면, 성령에다 비유해 버렸어요. 요한복음의 성령에다 비유해 버렸다고. 그러니까 용어를 빌려온 거지요.

제가 아는 성령은 십자가의 영입니다. 단절이고 예정된 자만 구원받고 언약적인 영이에요. 그런데 어거스틴의 성령은 그게 아니라 언약적인 영이 아니라 이거는 새삼스럽게 달리 불러주듯이 단지 몰랐었는데 이제는 눈 뜨고 보니까 깨달았을 뿐이죠. 장소이동이 아니고.

그러니까 지금 어거스틴 신학의 제일 큰 문제점이 뭔 줄 알아요? 악마를 인정하지 않아요. 악마적인 것은 인정해요. 나쁜 것은 인정해요. 만약에 악마가 돼버리면 어거스틴은 마니교로 빠진다고 봤습니다.

마니교가 뭡니까? 세상은 두 개의 신이 있어서 두 개의 신의 대결로서 세상이 창조되었다. 세상 속에 악마도 있고, 선한 신도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마니교란 말이죠. 마니교 심취하다가 그게 아니다 하고 벗어났잖아요.

그러면 어거스틴이 말한 신이 뭡니까? 악은 무엇이 모자라는 것뿐이죠. 선이 모자란 거죠. 선이 많이 들어가면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밀고 댕긴다고. 한 영토에서 선이 많이 공격하면 악은 궁지에 몰리고, 선이 좀 긴장이 늦추어졌다면 악이 점령해서 선은 궁지에 몰리고. 날마다 큐티하고 선을 해서 선은 승리하고 악은 밀리도록 그렇게 열심히 분투노력하는 것이 우리들의 인간의 모습이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이미 피타고라스학파, 플라톤, 그 많은 스토아학파 전부다 이야기한 거예요.

플로티누스 같은 경우에는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가치의 정도, 가치의 함량 수준을 봐요. 존재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것이 존재하는데 많이 존재하는 자와 적게 존재하는 자, 쉽게 이야기하면, 신의 모습을 많이 닮은 것은 존재성이 그냥 착한 사람이 아니라 플로티누스는 존재를 강하게 하고 있고, 신의 형상이 작은 것은 약하게 존재한다고 본 거에요. 약하게 존재하는 것은 돌멩이, 그리고 또 원생동물, 그때는 원생동물 그러면 모르지만, 나무 이런 것, 많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 더 많이 존재하면 천사, 존재의 경도라 하지요. 강도.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그렇게 이야기하느냐 하면, 그것이 인간에게 무슨 호소력으로? 윤리적 호소력으로 딱이다 이 말입니다. 사람이 누구와 대화할 때 탁 무릎을 치면서 맞다, 옳다, 동의를 받아낼 때 그 이론은 확산될 가능성이 많겠지요.

발렌티누스는 물질에 빠져든 정신적인 영혼과 연결부터 정화되어야 된다. 그러니까 영지주의는 뭡니까? 물질은 더럽잖아요. 물질은 더러우니까 뭐만 쏙 빼내야 된다? 깨끗한 영혼을 빼내야 된다. 그런데 이것을 그 당시에는 바울주의라고 본 거에요. 바울의 고린도전서에 보면 육체에 따르는 삶과 영에 따르는 삶을 대치시켰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했죠. 육적인 삶과 영적인 삶. 이걸 영지주의는 뭐로, 영지주의는 구약은 버리고 뭐만 땄어요? 사도 바울의 서신서만 따 가지고 기독교라고 표명한 집단 아닙니까?

[오리겐은 인간을 두 영혼으로 구분한 게 아니고 단순히 육체적인 영혼으로 보았다.]

오리겐은 극단적인, 그 당시에는 영지주의가 번성했으니까, 영지주의처럼 극단적인 완전히 인간을 둘로 나눔을 버리고 영혼의 무슨 성? 단일성만 지켜내겠다는 거지요.

[플라톤과 달리 영혼이 몸에 얽매이게 되는 것은 선재적인 영혼의 죄로 의한 결과이지 프뉴마가 당해야만 하는 그 숙명은 아니라고 해석한 것이다.] 리겐은 뭐냐 하면, 속속 밑바닥으로 돌멩이처럼, 나무처럼, 인간이 짐승처럼 저렇게 전락하면, 영혼이 그렇게 전락한 것이라고 플라톤은 봤는데 오리겐은 그렇게 본 게 아니고 영혼이 전락한 것이 아니고 영혼이 때가 묻은 거. 아니, 영혼을 왜 그렇게 지키라고 하느냐? 영혼은 나중에 뭐이기 때문에? 영혼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영혼이 타락해 버리면 하나님이 타락한 것이 되니까 다만 영혼이 때가 묻은 거지. 그럼 때는 씻었으면 되지.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을 육적인 영혼과 영적인 영혼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오리겐이 주장했다. 어디에 반대해서? 영지주의에 반대해서.

인식 사건은 직관적이지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교육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고 직관적으로 되는데, 그 인식은 인간 이성의 본성을 통해서도 언제 어디서나 확실하게 영적인 시야를 열어주지 못하며, 뿐만 아니라 이것은 인간의 수고에 의한 결과도 아니다. 인식은 '갑자기' 주어지는 시야로서 인간에게 주어진다. 유스티누스는 이런 영적인 시야를 '거룩한 영'이라고 피력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150-215)는 기독교에서 참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조명 사건을 세례와 연관시켰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우발성을 세례로 번역함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우발성은 뭐로 전환된다? 이제는 우발성이 아니라 필연으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가능성으로 다 바꿔버리고 또 사람들은 교회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 부각되겠지요. 참.

어거스틴의 신학을 보면 결국 뭐예요? 하나님이여, 꼼짝마라. 우리가 다루겠다. 이거에요. 우리가 다룰 수 있는 하나님. 하나님을 안다는 뭡니까? 우리 손에서 다룰 수 있는 하나님이에요. 하나님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놓고 이제는 볼 일 보소. 형님, 이제 볼 일 봤고, 자, 이제 우리 손에서 처리하자 이렇게 되겠지요. 이건 마치 뭐와 같으냐면, 노회에서 다 예수 믿고 하나님 믿잖아요. 노회할 때 성만찬 하잖아요. 형님, 볼 일 보고, 이제는 정족수 ⅔로 할 것이냐, ⅓로 할 것이냐를 우리 선에서 하는 거예요. 이게 아리스토텔레스 신학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양쪽 다 뭐가 빠졌어요? 십자가가 빠져 있는 거예요. 양쪽 다 자기 의와 자기 정당성을 합리화하는 거지요. 그 다음부터는. 무엇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신학의 이름으로.어거스틴은 플라톤의 영향으로 선재설을 다루다가 창조설과 전이설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로 관심을 옮겨갔다. 그런데 각자의 영혼이 따로 창조된다는 창조설은 원죄 문제를 설명하기 어려우므로 결국 아담의 영혼과 함께 모든 영혼이 창조했는데 부모를 통해 유전된다는 전이설로 기울러졌다. 그럼에도 이런 전이설은 영혼의 비물질성과 불멸성이라는 그의 기본 지론에 모순된다는 점이 지적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논리적 정합성을 결여하는 이론의 전개는 철학적 체계화를 목적하기보다 신학적 변론을 위한 것이었다.]

안셀무스가 뭐로 유명합니까? 신의 존재를 증명한 사람으로 보지요. 그런데 사실은 안셀무스는 에리게나한테 그대로 배웠다고 보면 되지요. 에리게나가 뭐가 유명하냐 하면, 신이고 뭐고 전부다 자연으로 통합을 시켜났다고. 거기서 나오는 게 4가지 있죠.

첫째, 창조하면서 창조되지 않는 자연

둘째, 창조하면서 창조되는 자연

셋째, 창조하지 않으면서 창조되는 자연

넷째, 창조하지도 않고 창조되지도 않는 자연

이런 것을 모든 것을 통합시켜 놨는데 이러한 통합으로 말미암아 이 에리게나의 신학을 받는 사람들은 뭐가 되겠어요? 이제는 우리가 신의 자녀라는 것을 안심 푹 놓겠지요. 왜? 이 세상 모든 것을 이 4가지로 다 설명해 버렸으니까. 따라서 신을 인정한 사람은 오늘 죽어도 구원받는다는 안심이 넘치겠지요. 이게 신학적인 변증으로 신학적인 배려, 위로, 그런 걸 위한 신학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나온다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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