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세이

1. 토마스 아퀴나스와 어거스틴

푸른 섬 2011. 9. 15. 21:27

1. 토마스 아퀴나스와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 문제를 비교해 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모든 신성은 그 존재 속에 흔적으로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진리에 대해서 우리가 모른다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 없다 하는 이야기와 동일한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 있다 하는 이 말은 맞닥뜨리는 모든 현상과 모든 사물에 대해서 다 알고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점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하고 생각이 같은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는 게 진리다.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도 거기에 동의했습니다. 알아야 된다. 그게 과연 진리겠습니까? 뭔가 여기에 보이지 않는 성과 속의 협잡, 음모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지요. 세상에서 많은 성스러움, 속된 것, 그게 그거고 그게 그거지, 아무것도 아니지.

토마스 아퀴나스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그 점을 파악을 해야 되는 데 파악할 재주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라는 것은 바로 아는 것이 많으면 그것이 보다 더 진리가 된다는 주장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아리스토텔레스와 협잡을 해도 그것은 이쪽 인간세계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진리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진리라는 것은 어디에서 출발하느냐? 존재에서 나옵니다. 존재성, 존재함에서 출발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자고, 성경을 알고 하나님 삼위일체를 이야기하고, 어거스틴 사상을 따라서 죄와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복음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을 이야기했는데 어떻게 그것이 진리가 아닐 수 있느냐 말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함은 교회의 존재함입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사람을 상대해서 사람의 존재함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취급한다는 것은 바로 존재함에서 절대적인 진리를 추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 보태기 위해서 성경들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경은 뭐가 되겠습니까? 성경은 지식이 되지요. 또 신학이 되겠지요. 여러분들이 신학 토론하고 생각할 때는 신학이 무엇을 위한 신학인가를 먼저 파악을 하시고 책을 보셔야 됩니다. 무엇을 위한 신학이냐? 교회의 존재함을 위해서, 즉 사람들의 존재함을 인정하기 위해서 동원된 신학이란 말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이 인간을 존재하게 할 때 존재 속에 신적 가능성을 집어넣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존재는 그 가능성을 발휘하는데 그중에 과학이 있습니다. 과학에 대해 천주교가 옹호, 긍정합니다. 과학이란 결국 어느 큰 범주, 즉 존재의 가능성 범주에 그냥 합쳐져 포함될 자그마한 요소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아는 이상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남한테 기죽을 이유가 없다 이 말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을 모르는 철학자보다 더 위대하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을 모르는 채 자연을 연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만 알면 신과 자연을 다 합치면, 아래 위 전부 다를 아는 것이 되기 때문에, 더 이상 거기에 대해서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루터의 인간론의 핵심은 죄인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간론은 뭡니까? 개별자란 거지요. 독립적인 존재란 거지요.

왜 인간을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할까요? 그것은 인간은 신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의 작은 신입니다. 작은 신이기에 만약 개별적인 인간의 영혼과 생명을 개별적으로 존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한다는 것이 되는 겁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로부터 마지막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이 세상을 하나님 형상대로, 즉 윤리적인 도덕적인 것으로 정착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 땅에서 펼쳐지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 윤리성을 하려면 타인을 볼 때 뭘 로 봐야 됩니까? 이 더러운 놈, 이렇게 보지 말고 개별적 하나하나를 뭐로 보잔 이 말입니까? 하나님이 직접 자기 형상대로 넣어 줬단 말이에요. 형상을 세 사람 모인 형상이 아니고, 다섯 사람 모여서 한 형상이 아니고 한 사람당 하나의 형상들이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문제점을 우리가 찾아낼 수 있어야 됩니다. 이 개별자론을. 그래서 천주교는 지금도 낙태 반대하는 거예요. 여러 가지. 그리고 불신자라도 어려운 사람한테는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있다. 그 사람들 돌보는 것은 곧 그 사람을 먹이고 입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는 것은 곧 누구한테 하는 것이다? 예수님한테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무지해서 구원을 못 받고 있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으로 들어가 보면 교회 목회하는데 도움 안 되는 게 없어요. 전부다 도움이 돼요. 야, 멋지다. 개별적인 영혼이기 때문에 경쟁을 해서 누가 신의 성품을 많이 닮느냐 내기하는 거예요. 세상에서 돈 못 버는 것을 교회 와서 인간답게 살아서 한번 복이나 받아라. 신부한테 인정받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그런 보람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라는 쪽으로 목회를 유도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슬람교로부터 새로운 고급문화, 중국으로부터 과학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과학과 수학과 물리학과 천문학이 막 쏟아져 들어오니까 그동안 뭘 막았어요? 그런 것은 이방민족들의 악마의 학문이라고 해서 막았습니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어떻게 합니까?

모든 존재의 신이 있는데 왜 그걸 우리가 막느냐? 그걸 연구해야 하나님에 대한 영광과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더 늘어날 것이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공부하는데 공부하기 시작하니까 관심사가 어떻게 흐릅니까? 이제는 무지에서 벗어나서 더욱더 앎의 세계에 그 아는 재미에 빠졌습니다. 그러니 십자가 외칠 이유가 있습니까? 더 알아야 되고. 더욱더 많이 아는, 그래서 신학자들은 그걸 정당화할 수 있는 신학을 만들어냅니다.

둔스 스코투스는 '존재보다 본질이 우선입니다.' 존재보다 본질이 위에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게 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존재라 하는 것은 쉽게 이야기해서 존재함이라. 존재함은 뒤에 뭐와 연관되어 있습니까? 신과 연관되겠지요. 왜 어째서 존재하느냐?

둔스 스코투스는 바로 여기서 벗어납니다. 존재가 우선이 아니고 본질이 우선이다. 존재라 하는 것은 없다 이 말입니다. 본질의 있음이 존재에 불과하고 실제로 존재를 깨어보면 그 안에 본질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본질하고 존재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존재는 신과 연관되어 있지만 본질은 신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유사성, 같은 형제로 관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형제다 하잖아요. 부모가 같기 때문에 같은 질을 받았지요. 속성, 성질을 받았잖아요. 본질 위주로 나가버리면 신에 대한 관심사가 아니고, 이웃에 대한 관심사로 변합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사로 변해버리면 나중에 오캄에 가면 더 이웃에 대한 관심, 이웃에 관심을 갖는다는 말은 이웃과 합체하려고 애쓰겠지요. 그죠? 그렇겠지요.

이웃에 관심 있다는 말은 뭡니까? 이웃과 친해지려고 하지요. 친해지려면 자기가 갖고 있던 절대성을 포기해야 됩니다. 이렇게 되면 둔스 스코투스로 나가면 점점 기독교가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은 어떠한 모습과 종교를 믿던 간에 궁극적으로 신이 주신 하나의 다양한 면 가운데 한 면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주교 신은 폐쇄적인 것에서 넓혀지겠지요.

안셀무스는 그것보다 토마스보다 더 심한 사람이거든요. 사람의 이성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해 버렸는데 할 말 다해버렸지요. 존재론적 증명, 도덕적 증명, 우주론적 증명. 이미 신을 증명했습니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하면 이단이 됩니다. 왜? 안셀무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정통이, 이미 모든 신학은 마무리 지어버렸는데 네가 왜 까부느냐 이 말이죠.

그때부터 토마스 아퀴나스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을 했기 때문에 이단이다 이런 소리하면서 공격을 하고 핍박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나와서 보니 현대 취향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좀 더 가깝습니다. 그 당시 욕 얻어먹었지, 우리가 보기에는 같은 급이지요, 그 당시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주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었어요. 그러면 둔스 스코투스는? 마찬가지에요. 하여튼 기존의 신학대로 가르쳐야 되지 만약에 그게 아니고, 이렇게 나오면 그 내용 보지도 않고 무조건 이단이에요.

만약에 토마스 아퀴나스 같이 개별자를 주장해 버리면 뭐가 됩니까? 사실 이 개별자 주장이 나중에 캘빈, 루터까지 받아들이는데 개별자를 주장해 버리면 하나님의 형상을 누가 독점할 수 없습니까? 교회가 독점 못해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사이의 문제란 말이죠. 그러니까 기존 교회가 어떻게 되겠어요? 야, 저 신학을 놔두면 이 교회가 뭐가 되겠어요? 이젠 반발해도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그 권위가 안 먹어주겠지요.

그래서 어떤 신학을 할 때 우리 권세를 얼마나 지탱할 것이냐를 우리 권세에 얼마나 도움 될 것이냐, 손해가 될 것이냐를 그걸 제일 먼저 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본디오 빌라도가 생각했던 진리에요. 내 나라는 내 통치하에 있다 이 말이에요

토마스 아퀴나스의 윤리성은 개별성. 각자 각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기 때문에 함부로 상대를 대역하지 마라. 아니, 이거 내 여자 아이가? 아니지, 하나님 형상을 입은 나의 여동생이지. 했거든요. 나의 엄마지. 왜? 개별적이니까. 붙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 일리가 있잖아요. 우리가 붙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형제간도 떨어져 나왔잖아요. 원래 샴쌍둥이처럼 붙어서 태어나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 샴쌍둥이 해도 영혼은 두 개 아닙니까? 따로따로 아닙니까?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왜 따로따로 만들었겠느냐? 둘이 서로 신을 보고 사랑하라고 개별자로 만들었다 말이에요. 그 말은 신이 사랑이 아니라 신의 사랑은 어디 있다? 마주보는 상대방 속에 있다 이 말이죠.

어거스틴은 [우리 몸은 우리 정신이 원하는 곳에 함께 있도록 해야 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 본받기를 원하십니까? 곧 정신이죠. 나는 예수님 본받기 원합니다. 또 기도할 때, 찬양할 때 뭐라 합니까? 주여, 저는 주를 본받기 원합니다. 이렇게 되지요. 그러면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지요. 어거스틴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당신의 정신이 그러하지요. 예. 그렇다면 당신의 정신에 맞추도록 노력하라 이 말입니다.

뭔가 토마스 아퀴나스와 비슷하지요. 그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어거스틴에게 배워서 그런 거예요. 어거스틴의 위대한 점이 거기에 있죠.

토마스 아퀴나스는 개별성하면서 논리적으로 다 따졌지만 어거스틴은 그 정도는 까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정신이 있는 곳에 몸도 함께 있는 거죠. 그러면 정신은 누굴 위해서 있습니까? 몸을 위해서? 아닙니다. 오직 정신만을 위해서. 몸은 오직 정신을 위해서 봉사해야 되고.

기본적으로 그 당시에 귀족들은 배불리 먹고, 농민들은 못 살잖아요. 그럼 죄 누가 많이 짓습니까? 역시 배부른 사람보다 못 먹는 사람이 죄를 더 짓게 되어 있지요. 한스러워서. 그러면 어떻게 죄를 잡아야 돼요? 이 짐승 같은 놈아, 너 몸 밖에 모르나? 해서 정신을 닮아라, 정신. 그런데 귀족들은, 사실 귀족들도 배고파 보세요. 동물 되지. 귀족들은 일단 몸은 되잖아요. 몸이 배부르니까 어디가 발달한다? 정신이 발달하죠. 정신이 발달하니까 자연적으로 못 배운 놈들은 누구 따라야 돼요? 그 정신이 발달되면 정신을 따라야지요. 그때에 뭐가 생긴다? 질서가 생겨요. 계급이 생기고 안정된 질서가 유지되면서 그 안정된 질서, 신은 뭐라고요? 안정감, 안정된 신적 세계가 확립되는 거예요.

루터에 와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누가 좋아했는 줄 알아요? 소영주들이 좋아했어요. 그것도 대영주가 아니고 소영주들이 좋아했어요. 요새 말로 중소기업들이 좋아한다고. 왜? 자유분방하니까. 결국은 루터를 좋아하는데 루터를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요? 내가 개떡 같이 살든 짐승 같이 살든 교회여, 국가여, 간섭하지 말라. 우리는 뭐가 있다? 사유재산이 있다.

사유재산이 있다는 말은, 나는 그 누구로부터 아쉬울 게 없다. 새로운 금융지주, 새로운 자본가의 등장은 새로운 신학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제는 누가 나를 간섭할 생각하지 말라. 내 위에 어른은 없다. 네가 뭐 잘났다고. 우리도 가질 만큼 가졌다. 옛날에는 토지가 없어서 빌빌 기었지만 이제는 토지 이상으로 수입을 얻는 그런 자본가가 되었다 이 말입니다.

따라서 이 자본가에 맞는 사유재산을 인정해 주는 그런 신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이야기하고, 자유 이야기하는 루터를 대환영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루터가 보기에도 아쉬운 게 좀 많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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