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강해 4

푸른 섬 2012. 1. 1. 12:55

사사기 강해 4

사사


음성설교

사사기2장16-23(3장1-6)

이스라엘에 사사기 등장했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16절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노략자의 손에 붙들려 있는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노략자의 손에 붙들려 있는 상황에서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18절을 보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라고 합니다.

삶의 형편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사를 세우셔서 이들을 대적의 손에서 건져 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17절을 보면 사사도 청종치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사를 통해 대적의 손에서 건짐을 받았지만 사사가 죽자 말자 다른 신들을 좇아 섬깁니다. 그들에게 절합니다.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20-23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하시니라 그 열국을 머물러 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이 말씀에 의하면 열국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완전히 쫓아냄을 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이스라엘이 순종치 않아서 열국을 쫓아내지 않았지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열국을 쫓아 내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는 시험하시기 위해서랍니다.

그런데 이미 16-19절을 보면 그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시험의 결과는 뻔합니다.

시험하나 마나 아닙니까?

그런데 왜 시험하십니까?

왜 자꾸 시험을 하시느냐 말입니다.

우리들 생각에는 그렇지 않습니까? 결론이 뻔 하다 왜 시험합니까?

그냥 너는 불합격, 너는 죄인, 너는 불순종하는 자다라고 선언하고 끝내 버리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이스라엘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본 바에 의하면 이들은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할 사람들입니까 아닙니까?

순종할 사람 아닙니다.

그러면 끝내 버려야 하지 않습니까?

왜 자꾸 시험하시느냐 말입니다.

여기에 대한 힌트를 17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셨습니다. 구원자를 세웠습니다. 문제는 사사도 청종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통해 이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대적으로부터 압박과 괴로움을 받아 슬피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들을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뜻을 돌이켜 구원해 주셨습니다.

물론 사사가 없으면 구원도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시지 않으시면 이스라엘에겐 구원이 없습니다. 저주만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저주 속에 있으면서도 고통 속에, 괴로움 속에 있으면서도 열심히 다른 신들을 섬긴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이해 되십니까?

아니 고통 속에, 괴로움 속에 있다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해야 되겠다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관심 없습니다.

사사기3장6절을 봅시다.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열왕기상11장1-8절을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햇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니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 왕은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솔로몬의 나인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같이 좇지 아니하고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저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 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항하며 제사하였더라”

신명기7장3,4절을 봅시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라”

그런데 신명기7장2절에서는 뭐라고 하시는지 볼까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라고 하십니다.

진멸해 버리면 언약이, 불쌍히 여김이 나오지 않지요. 뿐만 아니라 이들과 혼인할 일도 없지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이 다 알고 계십니다.

혼인할 것이라는 것까지 말입니다.

왜 혼인합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니까 혼인한 것입니다.

그 대상이 이방인이 되었던 그렇지 않던 상관없습니다.

사랑하여 결혼하니 누굴 따라 갈까요?

이게 참 희한한 일이지요.

꼭 우상을 따라갑니다.

우리생각엔 이렇지요. 솔로몬왕 정도되면 이방여인들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자로 이끌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니 우상을 섬깁니다. 사랑하니 산당도 만듭니다.

여자를 잘 만나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남자는 어떻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딸들을 이방인에게 주면 남자를 잘 설득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히 자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끼리 결혼해도 우상으로 나아가는데, 하물며 이방인과 결혼하면 어떻겠습니까?

보나마나입니다. 이게 인간들입니다.

가나안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자신들의 딸들을 이방의 남자에게 시집을 보낼까요?

왜 이방인들, 우상을 섬기는 딸들을 취하여 자신들의 며느리로 삼을까요?

여러분 누굴 사위삼고 싶습니까?

누굴 며느리 삼고 싶습니까?

그야 뻔 하지 않습니까?

학벌 좋고 돈 많고, 권력 있고, 잘나가는 사람을 며느리로 사위로 삼고 싶지 않겠습니까?

할아버지의 재력, 이것이 있어야 일류대 갈 확률이 높을 것 아닙니까?

이들의 관심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그러니 여호와의 말씀은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이미 이들의 관심 밖입니다.

여러분 돈 벌고 살기 바쁜데 말씀 생각할 시간 있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말씀가운데 자라기를 바랍니까 아니면 공부 잘하기를 바랍니까?

공부만 잘하면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냥 나중에 믿든지 아니면 뭐 알아서 하겠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말씀가르치는 것은 별로 신경 쓰지 않지요.

오직 영어, 수학, 국어 등등. 이것 가르치는데 온 힘을 기울이지 않습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관심 없어요.

지금 내 자녀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심 있습니다.

고통, 괴로움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저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사회를 이루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나도 저들편이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 올 때에는 누가 주도권을 갖고 있었습니까?

이스라엘입니다.

오히려 가나안 땅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고 여호와께로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젠 주도권이 뺏겼습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머리를 숙여야 잘 살 수 있습니다. 고통이 없습니다.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일 좋은 방법이 무엇인가?

바로 결혼이지요.

물론 살기 위한 결혼일 수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별개라고 할 수는 없어요.

사랑하는 여인과 사는 삶이 얼마나 행복할 삶입니까? 여기에 돈이 따라오고, 힘이 따라온다면 더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내가 평소에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는 신들이 함께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지요.

사랑하면 방법이 없어요. 누구도 못 말리죠. 그곳이 사망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냥 따라 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자꾸 우상을 섬길까요.

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을까요?

이유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말릴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사를 보내셔도 이들을 말릴 수가 없습니다.

열왕기상12장25-33절을 보면 북이스라엘을 세운 여로보암왕이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는 벧엘, 하나는 단에 두고 이것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이스라엘의 신이라고 합니다.

또한 산당을 짓고 레위사람 아닌 사람을 세워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8월 15일을 1월15일 유월절을 대체해 버립니다.

그리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벧엘에서 제사장을 세웁니다. 여로보암왕이 왜 이렇게 합니까?

자신이 세운 왕국을 잃기 싫어서입니다.

그래서 내세운 방법이 두 금송아지 만들고 하나는 벧엘, 하나는 단에 둔 것입니다. 산당도 만들고 제사장도 만들고 새로운 절기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순히 따랐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떡하겠습니까?

반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무엇을 전하고 있습니까? 십자가 복음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의 행복입니다. 인간구원을 전하고 있지요.

인간이 얼마나 가치 있는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치 없음을 전하는 십자가 복음은 이미 인간의 가치 있는 복음으로 대체해 버렸습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이 가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은 듣기 싫습니다.

나의 존재가치를 더 높여 주고, 이 땅에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 자리로 인도해 주는 예수, 금송아지로 대체 해 버린지 오랩니다.

이미 열왕기에서도 나오지만 사사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까?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사랑하는데 도움이 되는 예수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이용해서 나에 대한 사랑을 극대화 할 수 있을까 해서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관심이 그렇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사사는 관심 밖입니다.

사사를 누가 세우셨습니까?

이들이 달라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우셔서 이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자기 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이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늘 시험 속에 두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시험 해 보았자 백이면 백번 다 불순종일 것인데 왜 자꾸 시험 속에 두시느냐 말입니다.

마태복음26장36절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겟세마네에서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과 함께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37,38절을 봅시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라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제자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잠들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잠들었습니다.

41절에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라고 합니다.

피곤하면 잠이 오는 것이 당연하지요. 이게 인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로 가시는데 제자들은 잠을 잡니다.

구원이란 우리 인간의 바람과 상관없이 주어집니다.

인간의 수고와 상관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피 흘리심의 능력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죄 가운데 십자가의 피능력은 더욱더 빛을 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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