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36 11장25-32

푸른 섬 2013. 6. 30. 12:50

지혜로운자 우둔한자

로마서1125-32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들이 우둔하게 되어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 오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스라엘백성들이라면 이 말씀을 아멘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아멘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5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왜 들어가셨을까요?

그야 당연히 만날 사람이 있어서 들어가셨겠지요.

 

여기에서 가나안 여자가 등장합니다.

여 여자가 나와서 소리 지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얼마나 다급할까요?

 

여러분의 딸이 이러한 지경에 있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가나안 여자야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들었겠지요.

물론 다윗의 자손이라는 소식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기회만 된다면 꼭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겠지요.

그런중 마침 예수님께서 그곳에 오셨습니다.

 

기회를 놓치면 안되지요.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라고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14년 전 쯤인가 어떤 분이 성경공부중에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갖난 아기가 죽으면 천국갑니까 지옥갑니까?

 

천국과 지옥이 제 답변에 의해 좌지우지 된다면 제가 속시원히 답변을 해 드리겠지요.

무슨 말인고 하면 질문하는 사람은 이미 원하는 답을 갖고 있어요. 그 아이의 부모가 예수님을 믿으니 당연히 천국가야 하지 않는가라는 답변을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런 상황과 똑 같은 일이 일어났지요. 누가복음13장을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4,5절입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 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람들의 관심이 실로암 망대가 무너질 때 죽은 사람들은 죄가 많아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가족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당연히 죄 때문에 죽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이니 천국을 갈꺼야. 이런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어떻게 규정합니까? 죄인으로 규정하시면서 죽은 그들에 관심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다 망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렇지요. 자식이 죽었을 때 주님께서는 회개하라고 그런 죽음을 겪게 하셨습니다.

 

다시 가나안 여인으로 돌아가 봅시다.

가나안 여인으로서는 방법이 없지요. 자식을 향한 엄마의 마음을 너무나 잘 나타나 있지요.

 

이 여인의 외침은 그냥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외치는 외침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을 벗어 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원하는 소망대로 자신이 아는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분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소리하겠지요. 예수님이 자식이 없어서, 엄마가 되어 보지 않아서 가나안 여인의 마음을 몰랐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24절에 나오지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제자들이 와서 청했습니다. 여자가 자신들 뒤에서 소리를 지르니 얼마나 귀찮겠습니까?

제자들이 능력이 있었다면 어떻게 처리를 했을겁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겐 그런 능력이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청한 것입니다. 

 

그를 보내소서.

말이 참 짧지요. 짧지만 많은 것을 담고 있지요.  여인의 소리를 들어주시려면 들어주시든지 아니면 안들어주시든지 빨리 결정을 내려 달라는 요청입니다.

 

제자들 수준 높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제자들이 예수님 빨리 고쳐서 보내버리시지요 라는 마음이 강했다라고 볼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던 예수님께서는 단호합니다.

 

어떤 결정입니까? 못 들어 준다는 결정이지요.  귀찮게 하니 확 고쳐서 보내버리시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구원하지 않는 분입니다.

 

그러자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빨리 이 여자를 어떻게 처리하셨으면 하는데 더 귀찮게 되었습니다.

 

만일 제자들의 자식이 그러했다면 어떨까요?

제자들은 여전히 관찰자입니다. 자신들과 예수님과 상관 없는 자들임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 받은 후에 제자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님께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  이말 외에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우리도 아파 보면 소원이 무엇입니까? 낫게만 해 주신다면 제가 뭐든지 하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죽도록 아파 봐야 이런 소리 나옵니까?

자식이 아프면 이런 기도 안 나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가나안 여자마음을 상하게 해 버립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나와 있지 않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니 고쳐 주실 것 같으면 이런 말씀 하시지 말고 상처 받지 않게, 기분좋게 고쳐주시지 왜 이런 소리를 하시느냐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교회가 그렇지요. 싫은 소리 하지 않잖아요. 십자가피를 전하지 않잖아요. 십자가의 피를 전한다는 것은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좋게 하는 복음입니다.

 

그런데 유명하다는 목사들 설교 들어 보세요. 들어 보면 이들이 피를 이용할 뿐이지 피를 전하는 자들이 아님을 금방 알수 있지요. 긍극적으로 이 여인이 원하는 것을 해 주는 설교를 하잖아요.

 

그래서 저들은 자신들이 예수님 처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겉으로 보면 그럴 듯 하지요.

 

계속 봅시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는 해도 너무합니다.

 

이제 가나안 여인을 개같다라고 해 버립니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개는 그냥 사나운 개가 아니라 애완견 같은 개입니다. 마가복음 7장에 나와 있지요. 그래서 원어 좋아하는 분은 그래도 이 여인을 예수님께서 그렇게 무시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개는 개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개의 단어를 다르게 사용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상황, 즉 개 같은 자들임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 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을 향해 하신 말씀은 자녀와 개의 대조입니다.

 

그러자 여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개가 되어도 좋으니 제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게 해 달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보기엔 엄마라면 누구라도 이런 이야기를 할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요. 여기 엄마들이 계시는데 여러분 마음이 이 여인의 마음과 같지않을까요?

 

가나안 여인은 절대 자신의 소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개가 되더라도 자신의 딸만은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춘추시대 초나라에 변화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우연히 보석을 발견해서 초나라 왕 리왕에게 받쳤습니다. 그런데 초나라 왕이 돌을 보고 그 사람 오른 쪽 자리를 잘라 쫓아 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왕이 죽고 무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다시 변화라는 사람이 다시 그 보석을 갖고 왕께 갖고 왔습니다. 그러자 무왕이 이제는 남은 오늘 발을 잘라 쫓아 냈습니다.

무왕이 죽고 난뒤 문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다시 그 보석을 갖고 왔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냥 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돌을 쪼개어 보니 보석이었습니다.

그 보석을 화씨벽이라 칭했습니다. 두 다리가 짤려도 왕께 충성을 보이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 세상에 어디 한줄입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모습이 믿음이 큰 자의 모습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시고는 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여자의 믿음입니까?

 

제가 조금전에 말씀드렸지요. 엄마라면 세상의 어떤 엄마도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엄마들의 마음이라면 모두가 다 큰 믿음입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지금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시고 계십니까?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이잖아요.

유대인들이 이 사건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자신은 절대 개가 될수 없잖아요. 이방인들이 개인데 어떻게 자신들이 개가 될수 있습니까?

오히려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자신들을 더욱더 자랑스러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한가지 있지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라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보냄을 받은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나안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의 믿음이 크려면 이들도 역시 가나안 여인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유대인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개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긍휼은 가나안 여인에게 베푸시는 긍휼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들이 보는 로마서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형제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얼 모릅니까? 신비를 몰라요. 어떤 신비입니까?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

 

이것을 신비라고 합니다. 물론 뒤에 25절 이하 말씀도 역시 신비에 포함되는 말씀입니다. 

 

지금 왜 이 말씀을 하십니까?

지혜있다고 생각한 자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당시 누가 지혜로운 자들이었습니까?

 

지금 예수님께서도 노골적으로 이방인을 향해 개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지혜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아도 이들은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하늘로부터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나니 그들의 지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태복음 1238절을 보면 그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이 요청의 뜻을 아시겠지요.

자신들은 지혜가 있으니 표적만 보여 준다면 우리가 당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셨습니까 보여주지 않으셨습니까?

십자가의 표적을 보여 주셨지요. 그런데 믿었습니까 믿지 않았습니까?

믿지 않지요.

 

왜 지금 형제들을 향해 지혜 있다는 표현을 꺼집어 냈는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이방인들은 곧 유대인 속으로 편입이 되어 버립니다.

유대인과 똑 같은 생각을 합니다.

 

이미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니 나는 지혜로운 자다. 나는 십자가의 피를 믿는다 그러니 나는 지혜로운 자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자들에게  신비를 말씀하십니까?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이스라엘은 어떤 자들입니까? 이들에겐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9:4-5).

 

이정도 되면 지혜있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들이 우둔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설교 앞부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말씀을 누가 받아 들입니까? 우리는 이런 생각하잖아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아서 버림을 받았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음이 이방인의 충만한 수를 채우기 위해서랍니다.

 

이 말씀을 왜 지금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지혜 있다고 하는 자들에게  하시느냐 말입니다.

 

31절을 봅시다.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청천 벽력 같은 말씀아닙니까?

 

마른 하늘에 날벼락.

 

이 말씀을 풀어 본다면  이스라엘은 순종하지 않는 상황이고 지금은 너희들이 순종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거에는 너희들이 불순종했고 그들이 순종한 상황에서 너희들이 구원받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너희들이 순종한 상황에서 구원이 없고 오히려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주시려면 좀 듣기 편하게, 주셔야 할텐데 왜 이런 식으로 말씀을 주십니까?

그렇다면 너희들 중에도 불순종할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들은 또 이렇게 질문하지요.. 나 인가요. 난 아니지요. 꼭 유대인들처럼 사고를 해요. 그러니 이런 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한 자들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결코 인간을 위한 구원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마치 구원이 막 바뀌는 것처럼 보이지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인간들은 구원을 꼭 붙들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놓으려고 해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래야 편안하게 세상 살이를 할 것이고 죽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결코 이런 구원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만을 전하도록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을 위해 로마에 있는 너희들을 구원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위치는 항상 증인의 위치입니다. 유대인처럼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들은 언제든지 버림을 당하고 오히려 불순종가운데 가두어진 자들이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 그러니 성도는 늘 불순종가운데 가두어진 우둔한 자임을 깨닫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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