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37 11장32

푸른 섬 2013. 7. 7. 13:08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심

로마서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셨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고 노력해도 결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데 가두어 두셨기  때문입니다.

 

여기 앉아 있는 어린이들은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면 당연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도록 만드셨지 어떻게 불순종하도록 만들었습니까라고 반문하겠지요.

 

어른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만들었습니까?

 

 

그야 당연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 사람을 만들었다고 답변하겠지요.

 

사람들은 선악과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드셨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창세기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이유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 만드셨다라고 되지요.

그런데 이런 식의 해석은 글자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해석아닙니까?

이것이 무슨 비밀이 됩니까?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런 질문 참 많이 합니다.

이런 질문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하는 질문이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쇼킹한 말씀이 나오지요.

불순종가운데 가두어 두셨다.

이 말씀을 창세기에 그대로 적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을 불순종가운데 가두어 두기 위해 선악과를 만들었다가 됩니다. 참 이상한 하나님 아닙니까?

우리 생각에는 그럴 것 같으면 왜 인간을 만들었습니까? 만들지나 말지 이런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꿈꾸는 하나님의 백성됨이란 어떤 모습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대학시절에 가장 많이 고민하는 것이 예수님 믿고 사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사는 것인가?

 

그래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자라고 가르치고 노력하는 사람 한 둘이 아닙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좀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자라고 가르치고 자신이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합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희생정신으로 바꾸어서 그 희생정신을 본받아 우리들도 희생정신을 갖고 희생하며 살자가 아닙니까?    

 

이 생각에 반대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가난한 사람을 위해 자기 몸도 아끼지 않고 희생하여 그들을 돕는 사람들, 자신의 전재산을 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돕는 삶.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들어가서 병자를 돌보는 삶, 전도하는 삶, 이런 삶이야 말로 예수님을 믿는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을 두고 어느 누가 죄인이라고 하겠습니까?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생각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똑같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를 세습하는 것이 잘못이다 라고 했을 때 이런 말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나 교회 밖에 있는 사람 어느 누가 보아도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교회가 무슨 사유재산도 아닌데 어떻게 세습을 할 수 있는냐라고 비판하지요. 이런 말은 일반 신문에도 나는 기사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님은 이런 의견에 동의할까요?

 

동의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세습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미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곳이 세습이 되든 되지 않든 그것이 교회 아니거든요.

 

이미 교회 아닌데, 다 지옥 가는데 그것이 세습이 되든지 아니 되든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물론 의미를 갖는다면 죄를 보여주는 한가지 방편이지요. 마치 예수님 당시 돈 주고 대제사장직을 사고 세습해 주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지요.

 

이미 십자가를 전하지 않는 모임이 세습을 하든 하지 않던 그것은 어떤 회사를 누가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이런 세습에 대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짓이다라고 하나요. 모든 것을 윤리적 입장에서 해석하지 않습니까?

 

결국 윤리적인 사람이야 말로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인간은 불순종가운데 가두어졌답니다.

어떤 인간도 순종할 인간이 없습니다. 참 놀라운 사실은 세습을 하는 인간이나 세습을 비판하는 인간이나 자신들이 불순종가운데 가두어졌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불순종가운데 가두어졌다고 믿는 사람의 관심은 십자가 복음에 있지 세습을 하느냐 마느냐에 관심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이 말씀 앞에 죄로 드러남을 감사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이런 사람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 간주하겠습니까?

 

마태복음99-13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 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세리인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마태의 집에서 함께 잡수셨습니다. 그때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님과 함께 앉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함께 하시는 부류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세리와 죄인이라고 나오지요.

죄인의 대표가 세리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보면서 어떻게 이 말씀을 이해할까요?

그래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어. 나는 죄인이야 그런데 나는 구원 받았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본문을 제대로 이해 하려면  바리새인들의 역할을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볼 때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다른 일반 사람들이 보더라도 세리는 죄인일까요 아닐까요?

죄인입니다.

 

왜 그럴까요?

맨날 자기들 등쳐먹잖아요. 바리새인들의 눈은 정확합니다. 그리고 세리와 함께 앉아 있는 자들도 다 죄인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들과 함께 계십니다.

바리새인의 평가가 어떻습니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반어법이지요.

 

너희 선생이 진짜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지자라면 결코 저런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우리같이 죄인이 아닌 사람들과 함께 먹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 선생은 죄인과 똑 같다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이 말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 말씀을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래 나 병들었다, 나는 죄인이야 하면 예수님께서 의사가 되셔셔 고쳐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병은 자기 자신이 자각할 수 있는 종류의 병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비록 땅의 언어를 사용하셔서 이 말씀을 하셨지만, 이 병은 그런 종류의 병이 아니지요.

그런 병이었다면 바리새인들이 모를리가 있겠습니까?

 

13절에  말씀하시는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제사는 사실 말씀대로 드리면 됩니다. 무슨 말이고 하면 인간 쪽에서 얼마든지 할수 있는 일이지요. 그런데 긍휼이란 어디로부터 나옵니까?

 

출애굽기 331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이 말씀을 로마서 915절에서 인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호세아 66절 말씀을 어느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예수님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시지요.

그렇다면 너희들은 모두가 다 죄인이며 나의 긍휼을 입어야 할 자라는 말입니다. 즉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너희들은 모두 죄 아래 가두어져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오직 주님의 긍휼이 아니면 구원이 없음을 말씀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어떻습니까?

 

자신들은 긍휼을 입어야 할 이유가 없지요.

오히려 죄인들과 함께 하는 예수야 말로 자신들이 보기에는 죄인중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 입장에서 , 즉 기도 많이하고 전도 많이하고 봉사 많이하고, 교인숫자 많은 목사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보게 되면  예수님은 자신들이 놀수 없는 상대일 뿐입니다.

 

도저히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자신들은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너무나 말씀대로 살기 때문에.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고, 긍휼을 입은 자임을 감사하는 자입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불순종하는 인간들이야 말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종하는 자들이야 말로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 앞에서는 바리새인이나 세리나 창기나 모두가 다 불순종가운데 가두어진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132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라는 말씀이 아멘이 되는 자는 복 받은 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든 사람에 해당되는 사람, 즉 주님이 베푸신 긍휼을 입은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