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70 자랑

푸른 섬 2014. 5. 4. 16:27

자랑

로마서1517-19

누가복음189절 이하를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악한 짓을 하지 않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에 감사하고 있어요. 여러분 이것이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서서 따로 기도한 것이 문제일까요?

 

자기를 높이는 것이 문제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금심하지 않고 십일조 드리지 않고, 멀리 서서 머리를 푹 숙이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기도하면 자기를 낮추는 모습이 될까요?

 

아니면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 될까요?

 

자기를 높인다, 자기를 낮춘다의 출발점을 어디로 잡습니까?

이 말씀을 보면서 인간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자신이 의롭다 여김을 받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어떻게 하면 나도 세리처럼 내세울 것이 있을까입니다.

 

신명기811-20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 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

 

이 말씀을 누가복음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언약을 이루기 위해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고 재물 또한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잊어버립니다.

 

여호와를 잊어버리는 모습은 교만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무엇이 교만한 모습인고 하면 먹고 배부르고,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금이 풍부하여 내 소유가 풍부한 이유는 다 나의 공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런 모습은 곧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모습입니다.

 

애굽땅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이유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는 언약을 이루시는 주님을 증거하는 증거물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언약이 중심이 아니라 바리새인은 자신의 몸이 중심입니다.

 

주님은 중심을 보시지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도 그 중심을 말씀하시지 외형적인 것을 말씀하시지 않지요. 그러나 사람들에겐 외모를 갖고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방금 신명기8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백성에게 축복을 해 주시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축복을 자기들의 자랑거리고 만들어 버립니다. 축복의 증거물이 우상숭배의 증거물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바리새인과 세리의 외형적인 모습은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세리 흉내 낸다고 해서 의롭다 여김을 받을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그 정도쯤은 바리새인들이 성경전문가이기 때문에 다 알고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다루셨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내 놓을 것은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내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언약을 내 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 놓았습니다.

 

세리의 모습은 유월절 어린양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는 모습입니다.

분명 신명기 8장에서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살더라도 유월절 어린양 정신을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얼마든지 바리새인처럼 살면서 유월절 어린양을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내 놓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교만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14장에서는 바벨론 왕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이와 같아지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 지리라 하는도다(13,14)”

 

지금 바리새인의 모습이 이런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살아가는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들이 모이면 무슨 이야기를 주로 합니까?

복음 이야기 합니까 아니면 다른 이야기 합니까?

 

제가 그저께 어떤 분을 만났는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말했어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심을 경험했답니다. 예수님을 두 번이나 만났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사랑하신다면 예수님 이야기를 하셔야 합니다.

자기 이야기 하면 어떡합니까?

자기 이야기 하면 자기 자랑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은 예수님을 전하고 있어요.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 모습입니다라고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모이면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자기 자랑하기 바쁘지요.

 

십자가만을 전하라고 주신 축복들을 사람들은 무슨 용도로 사용합니까?

자기 자랑용도로 사용합니다.

 

재물을 주시고, 집도 주시고, 자식도 주시고 남편도 주시고 직장도 주시고 사업체도 주신 것은 새언약, 즉 십자가지신 주님만을 전하라고 이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라고 이 모든 것들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자랑합니까?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내어 놓기 바빠요.

자기 이야기하기 바쁩니다.

 

물론 십자가의 사랑이라고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축복을 십자가와 연결 지어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사랑을 자기의 축복과 연결시켜 버립니다. 그러니 자기 이야기 외에 할 이야기가 없어요.

 

자식 이야기, 사업 이야기, 드라마 이야기, 영화 이야기, 세월호 이야기 등등.

이 모든 것들이 거꾸로 새언약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데 자기를 더욱더 교만하게 하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으로 사용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바울이 자랑하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랑하는 것이 자기의 일이라 합니까 아니면 다르게 말합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해라고 말하지요.

 

그러면 우린 이렇게 짐작할 겁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이라 했으니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뭔가 특별한 것이 없어요.

 

사도바울 자신이 행한 일을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 일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사용하셔서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셨다고 합니다. 자신은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18,19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한 일이 많아요. 너무너무 많아요. 우린 이런 말씀을 보면서 또 하나 꿈을 꿉니다.

나도 바울처럼 사용되어 봤으면.

 

여러분 그런 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바울처럼 사용되어야, 즉 카피켓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카피켓이란 모방쟁이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시면 즉시 세리 카피켓이 되고 싶어 합니다.

 

왜 이런 마음이 들까요?

그것은 자랑거리를 만들고 싶어서 그래요.

 

다르게 말하면 지금은 자랑거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자랑거리가 없는데 어떤 자랑거리가 없는고 하면 예수님과 관련된 자랑거리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자랑거리를 내 놓습니까?

다른 자랑 거리를 내어 놓지요. 나 사업 성공했어. 난 비자금만 수천억이야.

 

러시아 푸틴 대통령 월급이 일억원정도 되는데 재산이 74조랍니다.

몇 년을 모야야 할까요? 수천년 모아서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분명 자랑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도 분명 자랑거리가 있어야 하지요.

하나님의 일에 대해 자랑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본인에게 없으니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은 자신의 일이 되고, 자신의 수고가 되고 자신의 공로가 되니 자기 자랑할 것 밖에 없어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바울처럼 자랑거리를 갖고 싶다는 것은 지금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들이,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들이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라, 주님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할 자랑 거리가 없어요. 자신의 자랑거리 밖에 없습니다.

 

우린 어떻습니까?

우린 무슨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시편9010절에서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니이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으면 아멘하면 되는데 이 말씀을 인간들은 어떻게 받아칩니까?

칠십, 팔십, 자랑거리다. 구십, 백세, 자랑거리다. 어찌 그 긴 인생에서 수고와 슬픔뿐이뇨. 즐거움도 있고 기쁨도 얼마나 많은가? 신속히 우리가 날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이들이 자랑하는 것이 자신들이 이 땅에서 쏟아내는 것을 자랑하겠지요.

 

천국 입장에서 보는 인생을 보지 못하고 자꾸 땅에서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면서 보는 겁니다.

바리새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후서1123-30절을 봅시다.

그들의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분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이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분 자기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분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에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내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부득불 자랑하는데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이런 것들이 자랑 거리입니까?

방금 열거한 것들이 자랑 거리 속에 들어갑니까?

 

물론 마태복음23장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이것 또한 자랑거리에 포함시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누구를 자랑합니까? 자기는 약해지고 주님이 강해짐을 자랑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주님께서 자신을 다루시어 하신 일이라는 겁니다. 그 고백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한다는 고백입니다.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 얼마나 자신이 약한 자인지 드러났지 않습니까?

 

그래서 방금 읽은 그 다음 구절에서는 다메섹에서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도망간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약한 인간을 주님이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자랑해도 이런 약한, 죄인임을 자랑하는 겁니다. 이것은 반전을 노리는, 노림수가 있는 자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다 자랑거립니다. 새언약, 십자가만을 증거하도록 주님께서 주신 축복들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자기가 가진 것을 자랑하지 마시고, 부득불 약함을 자랑하시고, 죄인임을 자랑하시는 주님의 일에 사용되어지는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