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74 기도

푸른 섬 2014. 6. 1. 21:46

기 도

로마서1530-32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기도해 달라는 것이 부탁정도가 아니라 요구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는 권하노니 라고 하지요.

 

여기에 나오는 권한다는 단어는 남에게 기도하도록 부추기다는 뜻이 되는데, 사실 이 단어는 부추기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도하기를 요구하는 단어입니다. 간청하다는 의미입니다.

 

기도를 해도 되고 말아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17절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시지요.

쉼 없이 기도하라는 명령입니다. 율법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복음을 모를 때는 기도할 내용이 수도 없이 많았지요? 그런데 복음을 알고 난 후에는 어떻습니까?

기도할 내용이 없어요. 그렇지 않나요.

 

왜 그렇게 됩니까? 우린 복음을 알았다는 입장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만 하려고 하지요. 그러니 사사건건 기도할 이유가 없어져 버립니다.

쉽게 말하면 웬만한 일은 내가 다 알아서 결정하고, 특별한 일들에 대해서는 기도하겠다는 거지요.

 

그러다보니 특별한 일들이 없어요. 특별한 일들이라고 해 봐야 결국 나의 다급한 일 외에는 별로 없거든요.

 

마태복음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항상 남을 의식하지요. 주님 앞에 자신을 솔직하게 내 놓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이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합니다.

나의 열심과 정성이 신을 감동시켜 자신의 기도를 들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은 이미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린 당장 그러면 기도할 것 없네라고 하지요. 어차피 다 알고 계시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셨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그러면 이 기도의 내용은 더더욱 성도들이 구할 내용임을 알고 계시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기도할 것이 없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남을 의식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

물론 골방에 들어가면 남을 의식하지 않고 기도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기도할 때 무엇을 구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기도합니까?

그 나라가 임해달라고 기도합니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합니까?

용서 받은 자로서 용서하는 사로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까?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까?

 

물론 하실 수 있지요. 그렇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비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나라가 임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그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내용물이 들어 있을 것 아닙니까?

일용할 양식 구하는 사람은 거지 밖에 없습니다.

 

요즘 거지는 일용할 양식구하는 자들도 아니지요.

여러분 일용할 양식 달라고 기도합니까?

 

노후 50년 동안 먹고 살 돈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용서 받은 자로서 남을 용서하는 자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까?

이게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까요?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우리의 관심은 시험에 들지 않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너무나 많잖아요.

 

제가 너무 비관적입니까?

제가 비관적이 아니라 만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기도할 인간 있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이유가 없어요.

 

로마서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 하셨지요.

율법을 주더라도 그 율법을 통해 오히려 자신이 죄인임이 들통 난다고 하셨지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는 흉내 내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와 우리의 기도가 만나는 장을 만드신 겁니다.

 

우린 외식하는 자들처럼, 아니며 이방인처럼 기도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하려고 하지요.

그런데 막상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를 하려고 하면 기도 할 게 없어요.

 

주님께 기도하고 싶은 내용들을 보면 모든 것이 나를 위한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조차도 나를 위한 기도에 불과해요.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지만 마음속에는 평생 죽을 때까지 먹고 쓰고 남을 돈을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이 사실을 아는 우리들은 아예 기도를 안 해 버립니다.

기도 할 것이 없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기도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을 보면 사도바울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랍니다. 물론 자신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유대에서 순종하지 않는 자들로부터 건져 달라는 것이고, 둘째는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바울의 목적인 로마로 가서 로마교인들과 함께 편히 쉬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집어 넣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기도하는 내용을 보게 되면 자신의 목적이 있잖아요. 로마로 가는 것.

로마로 가서 로마 교인들이 스페인으로 보내주기를 원하는 사도바울 입장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살아남아야 하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목적도 달성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기쁨으로 받아야 하겠지요. 만일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이 연보가 왜 이리 적어. 아니면 우린 거지가 아니야라고 해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케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낸 기쁨의 연보니 당연히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자들도 기쁨으로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바울이 복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가는데 주님이 유대인들이 방해 받지 않게 하실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곤란합니다.

 

우린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사도바울이 복음 때문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유대인들로부터 핍박당하면 당하고, 안 당하면 안 당할 것이라. 그러니 기도할 게 없어요.

뿐만 아니라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이 기쁨으로 한 연보니 예루살렘 교회가 기쁨으로 받으면 좋고, 안 받아도 어쩔 수 없고.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로마 성도들과 함께 편히 쉬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모든 것을 주님이 아시니 기도할 필요가 뭐 있어요.

이렇게 됩니다.

 

사도행전2111절 이하를 보면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결박당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 했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각오를 했다면 더더욱 로마교인들에게 유대에서 순종하지 않는 자들로부터 건져달라고 기도할 이유가 없잖아요.

 

우린 사도바울을 자꾸 예수님처럼 보려고 해요. 사도바울도 죄인입니다.

 

로마서722-82절을 봅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잇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사무엘상 1장을 보면 한나의 기도가 나오지요.

한나의 기도가 나온 배경이 어떻습니까?

 

에브라함 사람 엘가나에게 두 아내가 있었지요. 브닌나와 한나입니다.

엘가나가 한나를 사랑했어요. 브닌나도 사랑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아요. 한나는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 브닌나는 아마 야곱의 아내 언니 레아 취급을 받은 모양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나와 브닌나는 서로 적수가 되겠지요. 그런데 여호와께서 한나는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고 브닌나는 임신하게 하셨어요.

 

그다음 이야기는 성경을 안 읽어도 뻔 하지요. 브닌나가 한나를 어떻게 했을까요? 엄청나게 열 받게 만들었습니다.

너 아들 못 낳지? 남편 사랑 받으면 뭐해? 아들도 못 낳으면서. 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아들 낳았다. 이렇게 화나게 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온 기도가 한나의 기도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삼상1:10-11)

 

라이벌 브닌나가 열 받게 한 것을 이렇게 기도해도 될까요?

물론 브닌나가 유월절 어린양 정신이 없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한나가 당한 것이 우리도 얼마든지 당하는 일들이잖아요.

 

너 예수 믿는다면서 왜 자식은 공부를 그렇게 못해.

남편은 왜 그래? 아내는 왜 그래. 집안 꼴은 그게 뭐야.

사업은 왜 그래. 이런 이야기 얼마든지 듣잖아요.

복음을 안다면서 왜 그렇게 살아?

 

이런 소리 듣잖아요.

 

너무나 일상가운데 벌어진 일에 대해 기도했습니다. 원수갚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게 사랑의 기도입니까?

한이 맺힌 기도지요.

 

주님께서는 이런 상황을 만드시고 이런 기도를 하게 하셔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기도라는 것은 사건 속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지요. 그 인간을 사용하실 뿐입니다.

한나가 브닌나 보다 착하다의 개념이 아닙니다.

 

라헬, 레아가 남편 야곱 사랑 독차지하기 위해 발악하는 것을 그대로 사용하듯이 한나와 브닌나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한나의 기도가 나오기 위한 배경으로 브닌나를 사용하셨지요.

브닌나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한나가 주인공이지요.

 

기도라는 것은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겁니다.

지금 당한 상황 속에서 그 상황에 대해 기도하는 겁니다.

물론 우리 자신은 주님의 뜻을 따라 성령을 따라 기도했다고 하겠지요.

물론 맞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 성령을 따라 기도했다는 것은 그 기도를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사용하신다는 차원에서 주님의 뜻이고 성령을 따라 기도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기도는 자기를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말씀 앞에 자신이 들통 나는 겁니다.

그러니 쉬지 말고 기도하세요.

 

그러면 십자가가 더욱더 눈앞에 밝히 보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