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75 평강의 하나님

푸른 섬 2014. 6. 15. 20:54

평강의 하나님

로마서15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로마서를 읽어 오면서 어떤 하나님을 알았습니까?

평강의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진노의 하나님입니까?

 

처음에는 진노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그 행동 하나하나를 다 끄집어내어 보니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고,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는 이스라엘조차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상식으로 하나님의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율법을 지키려고 덤비는 모든 인간들의 죄의 깊이를 까발리는 작업을 하시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죄는 그 깊이를 알지 못하도록 죄가 뿜어져 나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우리는 또 어떤 방어막을 치는고 하면 그것은 율법과 관련된 것이라 생각해 버립니다.

자기 자신은 더 이상 율법이 지적하는 죄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자체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은 율법입니다.

 

성경전체는 모든 사람을 저주아래 가두어 놓는 일을 하면서 십자가 지신분이 긍휼을 베풀어 주는 그 긍휼을 전하기 위해 그 긍휼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방금 말씀드린 모든 사람이라는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심을 받은 자 밖에 없습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한 자는 자신이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이유를 모릅니다.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자신은 저주받아 마땅한 자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마태복음1927절을 보면 베드로 이렇게 말합니다. .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데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대접하면서 말씀을 듣고, 기적도 행했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할 자임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주님이라고 부르는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자임을 몰라요.

 

단지 자신이 행한 그 행위만 머릿속에 가득히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부르셨을 때 내가 결심하고 따라 나섰다. 예수님을 따를 때 모든 것을 버렸다. 모든 것을 버릴 뿐만 아니라 예수님 옆에서 열심히 말씀을 배웠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되어서 나도 그 능력을 행했다.

그러니 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대가를 충분히 받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마태복음715-23절을 봅시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을 제자들이 들었습니다. 잘 배웠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지금 마태복음19장에서 말하는 베드로에게 적용해 봅시다.

베드로는 지금 좋은 열매를 맺고 있나요?

 

아담과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가인이 하나님의 판단에 죄를 다스리지 못하는 모습과 동일합니다.

 

자기 자신의 행위를 통해 천국을 갈수 있고, 자기 자신의 행위를 통해 천국에서 좋은 자리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 확신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자의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이유를 모릅니다. 오로지 자기 구원 챙기기 바쁩니다.

천국에서 어떤 지위를 얻을까에 모든 관심을 기울입니다. 부자청년 덕분에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말을 했고, 예수님으로부터 뭔가 긍정적인 대답을 들어서 신이 났겠지요.

 

대구동부교회인가 그 곧 담임목사님이 김서택목사님인가 그럴 겁니다.

그분이 설교한 요한계시록 부분을 보니 천국에는 상급의 차등이 있다고 설교 했어요.

저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 이 교회를 나갑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왜 이렇게 설교할까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그래요 교인들을 동원할 수 있어요. 헌금하게 할 수 있고, 봉사하게 할 수 있고, 기도하게 할 수 있고, 전도하게 할 수 있어요.

 

예수님 믿고 구원 받습니다. 천국에는 상급의 차등이 없습니다라고 해 버리면 사람들이 헌금을 할까요?

어느 누가 봉사하겠습니까? 어느 누가 전도하겠습니까?

 

떤 회사가 있는데 지각해서 일하든 아니면 한 번도 일하러 가지 않던 한 달이면 모두에게 똑 같은 월급을 주면 누가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교회가 그렇지요. 천국에 들어가면 상급의 차등이 없다고 하면 그냥 예수님 믿고 그냥 살면 되잖아요. 왜 아까운 헌금합니까? 왜 아까운 시간 내어 예배드리러 옵니까? 일 년에 한 두 번 나오면 되지요. 아니면 죽기 전에 나오든지.

 

그래서 양의 탈을 쓴 이리들의 특징은 베드로처럼 생각합니다.

나의 행위가 천국과 천국의 상급에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말입니다.

 

왜 양의 탈인지 이해가 되시지요. 누구나가 다 동의하고 인정할 만한 설교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이면 어느 누구도 반대 할 수 없는 말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행위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구원이 있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의 행위와 관련 없는 일들이 이 땅에 있습니까? 없지요.

부자청년이 재물을 사랑했기 때문에, 재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것이나, 천국을 자신의 행위로 들어갈 수 있다고 여기면서 모든 재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이나 똑 같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질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생각했지요.

오늘날 교회가 그렇습니다.

자신들이 하는 일은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십일조, 헌금, 기도, 봉사, 전도, 선교 이 모든 것들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요. 뿐만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서 자신이 더욱더 좋은 지위, 높은 지위가 확보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 맹세하잖아요.

이런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고 자살해 버리잖아요.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 자신이 꿈꿔왔던 모든 것이 무너져버립니다.

자신이 생각한 천국, 자신이 생각한 천국에서의 지위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니 팔아먹고 저주하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나야 하며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그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한 증인임을 성령 받은 후에야 알게 됩니다.

 

말씀되신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하니 그 죄가 제대로 드러납니다.

물론 택함을 받지 못한 가룟유다는 죄가 드러나는 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양의 탈을 쓴 이리가 베드로 자신이었음을 드러내면서 주님의 증인으로 다루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이 찢겨 사라지지 않고 베드로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1429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이 평안을 어떤 식으로 이해 했을까요?

자식 잘되고, 건강하고, 사업 잘되고, 천국가고 천국 들어가서 높은 자리 차지하는 것으로 이해 했겠지요.

 

보혜사가 오시지 않았으니 당연하지요.

 

그런데 보혜사가 오니, 성령이 오시니 평안이라는 것이 어떤 평안이었습니까?

자기 자신이 죄인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려 주셨지요.

이것이 평안임을 알게 되었어요.

 

오늘 본문에서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 로마서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도무지 평강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할 겁니다.

 

로마서가 깔끔하지가 못하잖아요.

행위로 구원된다면 행위로 구원된다고 하시든지, 아니면 예수님의 피로 구원된다고 하면 예수님의 피로 구원된다고 하시든지, 행위, 예수님의 피를 똑같이 중요하게 말씀하시잖아요.

 

그러니 오늘날도 여전히 구원은 믿음으로냐 행위로냐를 갖고 피터지는 논쟁을 하잖아요.

성경을 읽으면 뭔가 평온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죠.

 

불경을 읽는다든지 아니면 좋은 글들을 읽으면 마음이 다잡아지잖아요. 물론 안 읽어 봐서 모르나요.

 

너그럽고 상냥한 태도, 그리고 사랑을 지닌 마음, 이것은 사람의 외모를 아름답게 하는 말할 수 없는 큰 힘인 것이다파스칼

어떻습니까? 듣기 좋잖아요.

마음이 평온해 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아요. 마음에 평안을 얻기는커녕 내 몸을 전쟁터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결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만들면서 십자가 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 자로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닙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입니까?

 

평강의 하나님, 즉 십자가 지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성도는 자기 평안과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싸움을 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꿈꾸든 세상이 참 평강을 주시는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런 것을 내 뱉기 때문에 환난이 옵니다. 그 환난이 인내를 만들어 내고 인내가 연단을 연단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만들어 냅니다.

 

이 과정 속에 놓인 자가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로로 잡혀와서 좋은 지위를 얻었습니다.

얼마든지 자신들이 원하는 평안을 누리면서 살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평강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증거하게 만드셨지요.

 

기꺼이 풀무불에도 들어가고, 사자 굴속에서 들어갔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를 이런 싸움 속으로 밀어 넣고 평강의 하나님을 증거하게 하십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내가 만들어 내는 평강의 싸움은 몸이 죽어야 끝이 납니다.

화목재물되신 주님이 우리에게 참 평강을 주셨음을 내가 만들어내는 평강을 부인하면서 증거하라고 성도로 부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