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40

푸른 섬 2015. 6. 7. 21:45

그 때와 지나감

고린도전서729-31

오늘 본문에 라는 것이 나옵니다. 우리들이 관심 갖는 때는 아이 태어나는 날, 백일, 결혼기념일, 대입 시험 치는 날, 결제 하는 날, 월급 주는 날, 월급 받는 날, 돈 들어오는 날 등 이런 때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래서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같은 인생을 살지 않고 늘 내일 일을 염려하며 살아갑니다.

왜 이렇게 밖에 살 수 없을까요?

 

얼마 전에 양쯔 강에서 사백 명 이상이 죽은 배 침몰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보면서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할까요?

주님의 말씀을 떠올릴까요?

 

왜 배를 무리하게 운행했는가? 정부는 왜 그런 업체를 그런 식으로 관리했느냐? 왜 하필 그 배를 탔을까? 사고의 모든 원인이 이 땅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원인으로 이런 사고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목숨이라는 것이 자기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예상했습니까? 그 배가 침몰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이 세월호이야기를 몰랐겠습니까?

누구나 큰 배를 탈 때는 세월호를 떠올릴 겁니다. 그런데 내가 탄 배가 세월호처럼 될 것이라는 것을 누가 압니까?

 

그럼 성도들이 사는 세상은 이와 다릅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가 늘 설교하면서 겹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겹쳐 있다고 말씀드리니 설교 듣는 사람들은 세상 판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오늘 본문 같은 말씀들은 나와 상관이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나와 상관없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영원히 상관이 없다면 성도 아닙니다.

 

성도들이 사는 세상은 분명 이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진짜 사는 세상은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 우편입니다. 예수 안이 성도가 사는 진짜 세상입니다.

 

사는 땅이 전혀 다릅니다. 성도 아닌 자들이 사는 땅은 육신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이 지구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이 지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땅이 있습니다. 아니 이 지구가 없어져야 사는 땅입니다. 전혀 이 지구가 제공하는 법칙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과 세친구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분명 이스라엘 유다 사람들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 왔습니다. 높은 위치에도 올랐습니다. 그런데 나라 독립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나라잖아요.

 

여러분 같으면 독립운동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바벨론 왕이 내린 자리를 제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얼마나 제대로 정직하게 일했기에 그렇게 오랫동안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 잘 믿는 다고 총리직 줍니까? 예수 잘 믿는다고 월급 줍니까? 십자가 복음 안다고 부사장 시켜줍니까?

안 시켜 줍니다. 일 잘해야 시켜줍니다. 회사에, 그 사람에게 많은 돈을 벌어 줄 때 그런 직책을 줍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볼 때 다니엘은 얼마나 얄미운 사람이겠습니까?

이런 대우 받은 분이 예수님입니다. 로마 통치하에 있는 유대나라에 너무 무관심합니다. 오히려 그 유대 나라를 예수님의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다니엘이 그러합니다. 다니엘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니엘을 시기한 자들이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만듭니다.

다리오 왕으로 하여금 금령을 내리도록 합니다.

삼십일 동안 왕 외에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하지 말라는 금서입니다.

 

이것도 참 웃기지 않습니까?

속으로 기도하면 되잖아요. 속으로 기도하는 것도 잡아 낼 겁니까?

그런데 다니엘을 미워한 자들은 다니엘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역사의 지평에 속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니엘이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니엘을 틀림없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니 금령이 내려도 기도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들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다니엘은 이 금령을 듣고도 오히려 하루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무릎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속으로 기도하면 되지 왜 꼭 그런 형식을 취하여 기도하느냐 할 것입니다. 그거 삼십일 동안 그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자신을 미워한 자들의 바램대로 기도 했습니다. 역사적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러자 다리오 왕은 자신의 금령으로 인해 죽이기 아까운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었습니다.

 

다니엘이 무엇을 알았는가 하면 자신이 사는 땅이 바벨론 땅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자신을 살리는 왕이 바벨론 왕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사는 땅이 바벨론 땅이 아님을, 자신을 살리는 왕이 다리오 왕이 아님을, 자신을 모함한 자가 자신을 미워한 자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역사적 흔적을 남겨 기꺼이 사자굴이 던져지게 됩니다.

 

다니엘은 주님께서 자신의 나라가 이 나라가 아님을 증거하기 위해 총리 자리에 앉게 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 금령이 내려 졌음에도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 해야만 그것이 증거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기도할 때 이 세상과 단절이 일어납니다. 이 세상과 단절이 일어나야 그때 비로소 진정 다니엘이 어느 땅에 살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다니엘은 약속의 땅에 사는 자이지 바벨론 땅에 사는 자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믿음이 좋으니 그가 간곳이 곧 약속의 땅에 되지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다니엘 덕에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제국이 잘나가지 않았느냐고 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역사적 사고 있습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의 생각은 자나 깨나 이땅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서를 읽더라도 관심은 이 땅에 어떻게 될까에 관심이 있지 자신이 속한 자리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 자신이 회사에 들어가면 회사가 복을 받고, 집도 복을 받고 이런 사기를 목사들이 얼마나 많이 칩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성도를 세상에 던져 넣으신 이유는 네가 사는 땅이 예수 안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던져 놓았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세상에서 무엇을 직면해야 하는가 하면 동방의 별에 직면해야 합니다. 세월호에 직면해야 합니다.

 

절망에 직면해야 합니다.

 

절망에 직면 할 때 평소에는 이 땅 소속처럼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였지만 이 땅 소속이 아니라 예수 안에 살아감이 증거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묵시적 삶이라고 합니다.

이 땅 소속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다니엘을 보면 미련하지요. 왜 그렇게 역사적인 흔적을 남기면서까지 기도하느냐 말입니다.

그러면 우린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동방의 별을 탄 사람들이 왜 그리 미련합니까? 그 배를 타지 않았으면 그런 꼴 당하지 않았을 텐데.

 

사람들은 자신의 배후에 누가 활동하고 계신지를 알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자기 힘으로 된다고 생각해요.

 

모든 것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결국 이 주님을 전하려면 절망, 즉 이 땅과의 단절이 일어날 때 주님을 전할 수 있습니다. 절망이 일어나지 않으면 십자가가 눈에 보일 수가 없습니다.

 

다니엘을 그렇게 하신분이 주님입니다.

우린 잔머리를 굴리지요. 그 상황만 벗어나면 된다고 말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에게 그런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누가 보아도 미련한 짓이 되도록 만들어서 이 땅에 전혀 소망을 두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주님의 백성이 반드시 십자가 지신 주님을 증거 하도록 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한번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 진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앞서 말씀드린 제 논리에 의하면 아내 있게 하신분도 누굽니까? 주님이시죠? 울게 하신 분도 주님이시고, 기쁘게 하신 분도 주님이시고, 매매하게 하신 분도 주님입니다.

세상 물건을 쓰게 하는 분도 주님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철저하게 성도들을 이 세상에 속한 자처럼 살게 합니다. 다니엘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월급 많이 받았겠지요. 권세도 누렸잖아요. 가족들이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주님께서 아내를 주신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그 아내 없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아내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아내가 있지만 아내 없는 자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주님 때문에 살지 아내 때문에, 남편 때문에 사는 것 아닙니다.

그래서 아내를, 남편을 주셔서 절망을 만나게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절망을 만날 때 내가 사는 땅이 예수 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내 있는 자는 절대로 아내 없는 자처럼 살지 않습니다.

 

만일 사별했든지 이혼 했든지 했어도 언제든지 아내를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상대가 내 마음에 들기만 하면 아내 만들려고 하지요. 왜 그렇습니까?

눈에 보이는 땅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성도를 어떻게 만들어 버립니까?

 

아내 없는 자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드러내시면서 소망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께만 두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명 주님이 자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식은 없는 자처럼 살게 하십니다. 그럴 때 말 잘 듣는 자식, 공부 잘하는 자식 꿈꾸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더욱더 밝히 보이게 하십니다.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라. 이럴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슬퍼서 울지요. 슬픈데 슬프지 않는 자처럼 하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지난 주 말씀드린 중 이 아들이 암에 걸린 엄마가 검사 결과를 보고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 울지 않는 자, 즉 웃으라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사자나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인정머리 없는 사람. 사람의 예의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주님은 성도에게 슬픔을 주시는 이유는 너희들은 슬픈 자가 아니라 진정 십자가 때문에 항상 기뻐하는 자임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성도는 반드시 슬픔을 당합니다. 울 일이 생깁니다. 그럴 때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기뻐하도록 하십니다. 주님의 사랑 때문에. 동방의 별을 만났습니까? 기뻐하세요.

세월호를 만났습니까? 기뻐하세요.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라고 합니다. 살다보면 기쁜 일이 적진 않습니다.

자식 태어날 때, 첫 월급 받을 때 등 기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이 땅에서 기뻐할 일을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때 기쁘지 않는 자처럼 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요.

 

순서가 그렇습니다. 기쁨이 있고 그 다음 기쁘지 않는 자처럼 되는 겁니다.

성도에게 기쁨은 십자가 복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이 땅에서 내가 공부하는 것, 돈 버는 것, 합격하는 것도 기쁨입니다. 월급 많이 받는 것도 기쁨이지요. 그런데 이 기쁨이 진짜 기쁨이 아님을 전하라고 불 심판 받아 없어질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겁니다.

 

들어 보니 기분 나쁘지 않습니까?

결국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생로병사라는 것도 결국 십자가 피를 전하기 위해 주님께서 조작해 내신 일들이잖아요.

여러분에게 결혼이나 슬픔이나 기쁨이나 이 모든 일을 만나면 항상 절망과 마주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사는 땅이 예수 안임을 전할 수 있습니다.

 

매매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 벌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이 자신의 땅이라고 여기는 자들은 매매를 하는 이유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매매하는데, 이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없는 것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즉 매매해서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까?

그 돈 없다. 불에 타 없어질 돈이다. 내가 진짜 사는 땅은 돈이 기쁨을 주는 땅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들어가는 땅이다. 십자가의 피만 자랑하는 곳이 주님이 만든 땅임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매매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고 합니다.

우리 중에 세상 물건 쓰지 않고 사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물건을 쓰면서 이 물건을 다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절망, 단절을 만납니다. 물건 쓰면서 이 물건 다 쓰지 못함을 주님께서 알게 하십니다.

물건을 다 쓰겠다는 말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살겠다는 심보잖아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도에게 물건을 쓰게 하시면서도 이 물건 다 쓰지 못한다는 절망을 만나게 하십니다.

 

결론입니다.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라. 최근 번역을 이렇게 해 놓았는데 이렇게 말하면 외형이 있으면 내형이 있다는 주장이 되고 그렇게 되면 이 세상의 것 중 필요한 것이 있다는 식이 되어 버리지요.

 

이 말씀을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성도는 썩어질 것을 가지고 썩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그 교차점에 위치합니다. 그래서 썩을 것은 반드시 썩도록 하십니다.

 

성도의 자리는 이 교차되는 자리입니다. 그 교차되는 자리를 보여주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 교차점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죽음의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무슨 짓을 하든지 주님께서 자신의 피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일이라 믿으시고 사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