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 42 약혼 파기

푸른 섬 2015. 6. 21. 16:21

약혼 파기

고린도전서736-38

이 땅에서는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눈이 나를 주시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거나 행동할 때 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주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혼한 사람이 집안에 한 사람이 있으면 그 다음 이혼하는 것은 너무 쉽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집안의 저주가 아니라 현재 사회를 살펴보면 당연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거의 매일 이혼이란 아무것도 아니라고 세뇌를 시킵니다. 꼭 텔레비전이 주님 같습니다. 세뇌당한 사람들이 불과 수십 년 전에는 이혼하면 끝일 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이혼할 수 있다고 하니 쉽게 이혼 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눈이 달라졌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풍습이 달라진 것이지요.

 

사람이란 세상풍습에 얽매여 사는 자들입니다. 세상 풍습에 얽매여 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가는 것은 세상 풍습의 하나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자가 집안일 하고 여자가 돈 버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우리 같은 목사들이 이 일에 앞장섰지요. 복음 전해 돈 나오지 않으면 아내들이 돈을 벌어야 하잖아요. 제가 아는 분들 중에 살림 하는 목사들이 여려 명 있습니다. 살림 하는 것이 미안하니 노가다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마는.

 

그런데 이것도 세뇌되면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동성연애라든지 그런 것도 세뇌시키면 그게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됩니다.

 

사실 생명은 성경 말씀에 있는데 사람들은 사람들의 견해가 생명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리라 생각합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 마귀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풍조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듭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들은 세상 풍속을 쫓지 말아야 합니까?

 

우리 중에 세상 풍속을 쫓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머리 모양에도 민감히 반응하는 우리들 아닙니까?

신발모양 하나에 멀쩡한 신발 안 신고 새 신발 삽니다. 이런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하는 것에 대해 말씀을 갖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바보가 하는 짓이나 다름없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갖고 성경 말씀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서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비정상적인 사람입니다.

 

창세기 19장을 보면 주님께서 소돔 땅을 방문합니다. 그때 롯이 아무런 조건 없이 손님을 영접하여 극진히 대접 합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소돔 땅 사람들은 낯선 사람의 방문을 자신들의 쾌락을 위한 방문으로 여깁니다. 이게 그 당시 분위기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모임이 있으면 분위기 깨지 말라는 말을 듣지요. 복음 이야기는 빼라는 것이지요. 돼지에게 진주는 던질 이유가 없어서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땅 풍속은 처음부터 격렬히 복음을 거부합니다.

 

소돔 사람들은 낯선 나그네의 방문을 평소 하든대로 그 땅 방식대로 할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롯도 이 풍습에서 자유롭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두 딸을 내어 놓게 다고 하지요.

우리가 보기에 성경 말씀이 우리의 얼굴을 붉히게 만듭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린 우리들이 사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말씀은 내 격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자녀 교육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뭔고 하면 바로 사람들의 눈, 즉 세상 풍속에 매여 있다는 말입니다.

 

두 사위는 소돔 땅 멸망이 농담으로 여깁니다. 그 당시 텔레비전이 그렇게 매일매일 하루 종일 방송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소돔 땅 멸망을 믿겠습니까? 어느 누가 주님의 방문을 알겠습니까?

 

심지어 롯조차도 가볍게 떠날 마음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재촉하는데 롯은 느릿느릿. 주님께서 롯을 강제로 소돔 땅에서 끌어냅니다. 롯은 떠날려니 아쉬운 것이 너무 많습니다.

 

롯의 아내를 보면 분명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뒤돌아보았습니다. 뒤돌아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고향을 떠나 올 때 뒤돌아보았잖아요. 부모, 친척들, 그리고 내가 어릴 때부터 살든 곳. 롯은 지금 자신의 전 재산을 두고 나왔습니다. 그곳에 나의 땀이 베여있는 집이 있고 가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 두 딸을 책임져줄 사위도 있습니다.

 

차라리 돌아보지 말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으면 돌아보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돌아보지 말라고 하니 더 돌아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돌아 봤습니다. 그래서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무슨 이런 일이 있습니까?

불 심판에서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항의할 만합니다. 빠져 나왔으면 빠져나왔다로 끝내야 되는데 왜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 버립니까?

좀 뒤돌아 봤다고. 뒤돌아보는 것은 이 땅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마태복음8장에 보면 한 서기관이 예수님을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따르라고 하시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나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따르라는 말입니까 말라는 말입니까?

 

사실 성도의 삶이 이런 삶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 다니는 이유는 머리 둘 곳을 보장 받기 위해 교회를 다니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머리 둘 곳이 있었는데 머리 둘곳 없어지게 만드는 예수는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머리 둘 곳이라는 것은 세상 풍속입니다. 세상에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집을 사려고 합니까? 집 없는 설움 때문이기도 합니다마는 집이 없으면 타인이 나를 보는 시선이 다릅니다.

 

나 어느 아파트에 산다고 하면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비싼 차를 타고 다닌다고 하면 부러워합니다.

 

또 한 제자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분명 제자라고 했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따르겠습니다.

 

얼마나 기특합니까? 이렇게 말하면 칭찬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죽었다면 자신이 부양해야 할 다른 가족들도 있을 텐데. 장사만 지내고 나머지 가족은 다 버리고 따르겠다는데 얼마나 대단한 결단입니까?

마땅히 칭찬 받아야 합니다. 장사만 지내고 오겠다는데 이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의 기준을 말씀해 버립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만 산자지 나머지는 다 죽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네가 아버지 장사하고 나를 따르겠다는 것은 죽은 자들이 하는 행동, 즉 죽은 자들의 풍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만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그 당연함이 죽을 짓이다라고 하십니다.

그 당연함이 지옥갈 짓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에게 소속되어 있는 지를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이 땅의 풍속이 당연하고, 그래서 마땅히 그렇게 행동하고 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풍속은 공중권세 잡은 자가 만들어 낸 풍속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소금 기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를 강제로 이 세상에서 끌어냅니다.

 

에베소서 22,3절을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역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다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 이었더니.”

 

이게 믿지 않는 자들의 현 주소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만든 그 풍조는 공중권세 잡은 자 마귀가 만들어낸 풍조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 믿는 자들은 다릅니까?

 

이게 문제입니다. 믿는 자들은 이미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과거로 말씀하듯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은 과거지사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과거지사가 아니라 지금이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갑니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삽니까? 이렇게 살지 않는 사람 없습니다.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누가 되었던 공중권세 잡은 자에게 질질끌려다니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가 있다는 것은 이미 정해졌다는 말입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에 철사 줄로 꽁꽁 묶인 채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입에 밥이 들어가지 않으면 난리를 칩니다. 자기 터전에 문제가 생기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터전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믿는 자는 이런 삶이 과거처럼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노력합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으려고 발부둥칩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그래서 성경 읽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됩니다. 그래서 헌금을 듬뿍합니다.

이것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까?

 

이런 짓은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부처가 왕자의 자리를 버렸잖아요. 그게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까?

더 악한 귀신이 그를 덮쳤지요. 육체의 욕심을 제대로 발휘하는 자리로 갔습니다.

 

육체가 있다면 그 육체자체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육체의 욕심대로 사는 죄인입니다가 나와야 하는데 더욱더 육체의 욕심대로 살아가려고 발부둥칩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죄인이 아니라는 말은 나는 공중권세잡은 자를 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나는 구원받을 만한 자라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행위로 천국갈수 있고 구원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 인간으로서는 도무지 행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머리 둘곳 없다. 죽은 자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너를 따르라.

 

오늘 본문을 봅시다.

본문자체가 먼저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딸을 둔 아버지에게 하는 말씀인지 아니면 약혼한 처녀가 있는 남자에게 하는 말씀인지 분간이 잘 안됩니다. 주로 딸을 둔 아버지에게 하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갖고 있는 개역개정성경은 약혼한 처녀가 있는 남자에게 한 말씀으로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건 별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이 말씀을 육체의 욕심대로 해석하느냐 아니면 그와 반대로 해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먼저 아버지로 해석을 해 보면 결혼시켜도 되고 결혼 시키지 않아도 된다로 말씀하시지요. 이게 왜 중요한고 하면 세상풍속 때문입니다. 그 당시 세상 풍속은 딸이 약혼했으면 그에 따라 당연히 결혼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결혼시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는 겁니다.

 

세상풍속을 말씀으로 강제로 끌고 들어옵니다. 끌고 들어와서 그렇게 풍속대로 사는 것이 영생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를 믿고 사는 것이 영생의 길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남자가 처녀와 약혼했으면 당연히 결혼해야한다는 것이 세상 풍속입니다. 또한 약혼해서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면 더더욱 결혼해야 하지요. 그런데 당연한 것을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합니다. 부득이한 일이 없다면 약혼 파기하고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은 결혼하는 것보다 더 잘하는 것이라고 해 버립니다.

 

왜 이렇게 풍습을 깨어 버립니까? 왜 이렇게 성도가 사는 것을 자연스럽지 못하게 하십니까?

그 이유는 성도가 이 땅에 사는 이유는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선 공중권세 잡은 자의 종노릇 하는 자를 강제로 십자가의 증인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부정하는 쪽으로 믿는 자들을 인도하십니다.

 

왜 노아 홍수로 멸망 받았습니까? 그들이 당연하다고 여긴 것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 가는 것이었습니다.

노아 방주야 나중에 만들어도 되고 타도 되는 일입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시선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 시선에서 강제로 끌어냅니다. 어떤 식으로 끌어냅니까?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자임을 들추어내는 방식으로 끌어냅니다. 이것은 한번 끌어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번 끌어냅니다. 그럴 때 우린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그래서 죽을 때 까지 소금기둥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피만 자랑하도록 성도를 강제로 이끌어 내십니다.

 

강제로 이끌림을 받지 못한 자는 무엇을 모르는고 하면 세상풍속을 따라 사는 것이 공중권세 잡은 자의 조종을 받고 산다는 것을 모르는 자입니다.

 

그러나 강제로 끌어냄을 당한 자는 그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