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강해

창세기27:15-29

푸른 섬 2007. 7. 16. 12:22
 

속이는 자

창세기27:15-29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성경에 과연 이런것도 기록되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아버지 이삭을 속이기 위해 리비가와 야곱은 철저히 준비합니다.

15절에서 리브가가 맏아들 에서의 가장 좋은 의복을  취하여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힙니다.

또한 염소 새끼의 가족으로 그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꾸밉니다.


희한하게도 염소새끼 가죽이면 에서의 손과 목처럼 느껴지게 된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떡과 별미를 야곱에게 줍니다.


그리고 야곱이 이삭 아버지께 나아가 내 아버지여 라고 부릅니다.

이삭이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면서 내 아들의 네가 누구냐를 묻습니다.


목소리는 에서와 비슷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이삭이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던지. 어찌 되었든 아버지 이삭은 에서와 야곱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몸상태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자신은 맏아들 에서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명하신대로 내가 했습니다. 그러니 일어나 앉아서 내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의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라고 합니다.


이삭이 묻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속히 잡았느냐.

야곱이 대답합니다.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순적히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이삭이 속아 넘어가야 하는데, 한번더 확인합니다.

가까이 오게 해서 만져보고 확인을 합니다.

이삭이 만저보고 하는 말이 음성은 야곱의 음성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손이 형 에서의 손과 같이 털이 있으므로 능히 분별치 못하고 축복하였더라”


얼마나 완벽하게 변장을 했는지 만져보고도 알수 없을 정도로 야곱이 에서처럼 변장했습니다.


그래서 한번더 묻습니다. 네가 참 내아들 에서냐?

야곱은 망설임 없이 대답합니다. 그러하니이다.


그러자 이삭이 야곱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난후 그에게 축복합니다.

그러나 축복하기 전 다시 야곱을 가짜이 오게 하여 그에게서 냄새를 맡은 후 최종 확인 후 축복을 합니다.


27절 하반절부터 29절입니다.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의 복 주신 발의 향취로다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에서가 평소에 얼마나 사냥을 하러 이곳 저곳을 다녔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발이 밟는 곳이 다 하나님께서 주실 약속의 땅이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라는 것은 곳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팔레스틴에서는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해 많은 양의 이슬이 내려 가뭄에도 식물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식물의 생존에 절대 필요한 이러한 이슬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됩니다(신 33:28;잠 3:20),

그리고 하나님과 왕의 총애(잠 19:12)를 이슬이 내리는 것에 비유하기도 합니다(시 133편).


이 말은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복은 이런 식으로 실질적으로 풍년 농사가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신약으로 넘어오면 그 복이 하늘의 복으로 대체됩니다.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구원의 복이 됩니다.


이 뿐만 아니라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니리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형제들의 주가 될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즉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그대로 야곱 즉 에서로 변장한 야곱에게 이런 축복을 합니다.


이게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지 보겠습니다.


리브가와 에서는 완벽한 범죄를 저지럽니다.

그 범죄를 위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도 사용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아야 하는데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도 쉽게 이용합니다.


그리고 결국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는 리브가와 야곱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우리의 목표가 있다면 모든 성경 말씀을 우리 자신이 유리한대로, 목적 하는대로 끌어당겨 해석해 버립니다.


인간은 인간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리브가와 야곱은 어떻습니까?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에서를 속이는 것일까요?

물론 그 배경도 깔여 있는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 이렇게 속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살펴 보게 되면 결코 이런 목적이 아닙니다.

야곱은 본성적으로 약탈자의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남에게는 지고는 못사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리브가는 특히 이런 야곱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둘이 마음을 합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은 이들의 탐욕을 이루기 위한 근거로 이용되었습니다.


실상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말씀은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물론 야곱중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됨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보면 야곱도 부정됩니다.


이 말씀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된다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상식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했으니 당연히 야곱이 큰 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야곱과 에서를 보는 전제입니다.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성경을 보게 되지만 결코 야곱이 에서보다 강하지 못한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더 멀리 보라고 하시지만 더 멀리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이 말씀을 그냥 인간적으로 해석해 버리면 성경말씀의 성취는 없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일곱 번이나 절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야곱이 에서를 주라고까지 표현하며, 자신을 에서의 종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그러나 큰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말씀의 본 의미가 역전되어 버립니다.

장자권을 누가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장자권을 받은 자는 반드시 섬기는 자가 되며, 이 섬기는 자야 말로 참으로 큰 자가 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삭이나, 에서, 야곱이나 리브가 모두가 말씀을 자신들의 욕심대로 이용해서  그 말씀을 성취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목적, 탐욕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이 말씀을 통해 인간들의 본질을 들추어 내신 것입니다.


인간들의 근본 사고방식은 큰 자가  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복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이야 말로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이지요.

한마디로 말하면 왕노릇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 리브가,에서, 야곱이 자신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한 것입니다.


나중에 요셉을 보게 되면 알겠지만 주라는 것은 섬기는 자가 주가 됩니다.

자신을 죽인 자를 위해 대신 죽임 당함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해 주는 분이 주가 됩니다.


우리들 생각에도 주라고 하니 왕 노릇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물론 이 왕 노릇이라는 것은 분명 우리가 주님과 영원히 거할 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땅에서의 주라는 것은 철저하게 자신을 죽이는 자, 괴롭힌 자들을 위해 희생당하고, 오히려 그 희생이 그들을 살리는 것이 주님이 하실 일이지요.


이것을 예수님께 적용하면 분명해 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분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요. 그런데 섬기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20장25절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들의 집권자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지금 이삭, 에서, 야곱, 리브가는 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동자체가, 즉 속이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축복받겠다는 자체가 이 생각 외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축복받는 것을 마치 권세를 가지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6,27절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주에 누구든이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한자리 달라는 제자들, 이것에 대해 분을 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삭, 리브가,에서, 야곱 모두가 착각을 해도 이만 저만 착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신이 탐욕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이삭, 리브가,에서, 야곱 모두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인인가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여호와하나님께서는 이런 죄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성도란 성경말씀을 자신의 탐욕을 이루는 것으로 이용하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써먹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이런 모습이 언제 드러날지 모르는 인간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죄인들을 사용하시어 우리 자신 속에서 십자가지신 주님의 능력을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감사가 되며, 주님의 주되심을 증거하는 말씀입니까?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자신의 방식으로 그 말씀을 자꾸 끌어 당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인간들 속에서 십자가의 복음을 꽃피워 내십니다.

이것을 믿으시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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