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관해 파선함
디모데전서1:12-20
이 땅에 사는 죄인들은 성도이든지 아니든지 항상 율법의 유혹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이 성도들을 오직 긍휼 속에 머물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 본문이 우리를 참으로 당황하게 만듭니다.
19,20절입니다.
믿음에 관해 파선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자들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구원 속으로 한번 이끄신 사람은 결코 그 구원이 취소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능력이 인간의 행위와 공로로 효력이 있었다, 없었다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당연히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오늘날 교회는 인간의 행위와 공로를 어떻게 그리 강조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겉 다르고 속다릅니까?
구원은 주님의 은혜로, 그것을 지키는 것은 나의 힘으로,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소위 알미니안 주의 자들입니다.
사실 개혁교회는 철저하게 알미니안주의 자들을 배격해 왔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정반대편에 있던 자들이 알미니안 주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희한하게도 개혁교회라고 표방은 하면서도 그 속으로 들어가보면 거의 다가 알미니안주의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완전히 무시해 버립니다.
모든 삶 가운데서 십자가의 능력이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있었지요.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지 않고,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만을 주장하니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그야 말로 개판치는 자들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모임을 마음대로 빠져 먹고, 헌금도 제대로 하지 않고, 기도도 제대로 하지 않고, 구제도 제대로 하지 않고 완전히 자기 편한대로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성경말씀과 비교해 볼 때 해도 너무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규율을 세웁니다. 소위 교회법을 만드는 것이지요.
성도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지를 만들어 냅니다.
본성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방금 문제점으로 제시된 것들이 다 누구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목회자들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은 늘 성경말씀을 보아야 하고 기도도 해야 하고, 구제에 앞장서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기 때문에 성도들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지요. 그런데 성도들은 어떻습니까?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합니다.
돈을 벌어야 헌금도 하고, 구제도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남을 등쳐먹어야 하기도 하고, 가끔은 모임에 빠질 수도 있고, 구제도 형편에 따라 할 수 없고, 기도생활도 그러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전적인 주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라고 말을 하니 목사입장에서는 속에서 천불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내어 놓는 것이 교회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입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초신자들부터 철저하게 교육을 시킵니다.
그래서 앞으로 자신의 말을 잘 들을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초신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일날 모임에 빠지지 말고 나오시고, 헌금은 어떻게 하시고, 십일조는 어떻게 하시고, 주일은 어떻게 보내시고, 교회에 대해서는 몸을 바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저께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 욕을 엄청 합니다.
제일 썩을 대로 썩은 곳이 교회라고 말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계셨는데, 성미를 안 낸다고 교회에서 굉장히 핍박을 가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는 형편이 어려워서 못하는 것이었는데 교회가 그렇게 나오니 교회를 나가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성미라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마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아침에 밥을 한때 마다 식구수대로 쌀을 숟갈로 퍼 따로 일주일동안 모아 두었다가 주일날 교회에 갈 때 가져 갑니다.
이것으로 때로는 교회 목사나 전도사들의 양식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주일날 성도들이 함께 먹는 식사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이런 모습을 신앙초년생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대판 싸우고 나와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그 적개심이 아직도 그 속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그가 다닌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아니겠지요.
그러나 어찌되었던 주님의 이름은 그런 악한 자들로 인해 훼방을 엄청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를 통해 믿음을 측정하는 것이 교회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또 한 사람의 말은 내가 지금 이렇게 술도 잘 먹고 담배도 피고 개판으로 사는데, 대부분의 교회에서 3년 만에
내가 장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잘 사니 헌금만 많이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3년 만에 얼마든지 서울의 큰 교회에서 장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통 있는 교회들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교회가 십자가의 은혜를 걷어치우니 그 막다른 골목이 어떤 꼴로 나가는 지를 분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믿음에 관해 파선한 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저들이 믿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찌되었든지 믿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저들의 행위를 갖고 탓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 속에 십자가의 긍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 와서 이 본문을 어떻게 풀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이 본문을 접근할 때 주님의 입장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창세전부터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바는 모든 것이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통일되는 것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 중심으로 세상이 질서 잡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초부터 개인적인 사욕을 위한 구원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와 같은 자는 주님 안에서 통일되게 하기 위해 사단에게 내어 준바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런 자들이 교회에 남아있지 못하게 사단에게 내어 줌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오직 살아계신 주님의 의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란 오직 믿음과 착한 양심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만을 내세우는 자들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내세우는 자들이 아닙니다.
윤리적으로 착하게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런 자들이 곧 믿음에 관해 파선한 자들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이런 자들을 사단에게 내어 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교회는 오직 십자가의 긍휼만을 자랑하는 교회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무엇을 훼방합니까?
주님의 교회 안에서 십자가의 도를 훼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훼방하지 못하게 아애 저들은 마귀의 자식으로 살아가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성도를 부르신 것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를 자랑하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아애 여러분들의 행위에 관심을 두지 마시고 오직 십자가 지신 주님의 피 흘리심의 공로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