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대적
사무엘상18장17-30
세상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환경에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만일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환경이라는 것은 돈의 환경이 될 수도 있고, 권력의 환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환경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 다윗과 사울을 보게 되면 누가 누구에게 적응해야 할까요?
사울이 다윗에게 적응해야 할까요 아니면 다윗이 사울에게 적응해야 할까요?
그야 당연히 사울이 다윗에게 적응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다윗이 사울에게 적응해 살아야 하겠지요.
왜냐하면 다윗은 일개 장군이고 사울은 왕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왕의 말을 다윗이 들어야 하겠지요.
그래서 다윗이 듣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세요.
누가 안절부절합니까?
사울왕이 안절부절합니다.
다윗을 죽이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윗을 죽일 방도를 찾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딸을 이용해 죽이려고 하는 것도 실패하고, 패물을 이용해 죽이려는 것도 다 실패합니다.
다윗은 그 환경에 적응해 살아갑니다.
그 환경을 벗어나서 뭔가 독특한 방법으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울왕의 말을 들어 보세요.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고 합니다.
다윗에게 말입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여호와의 싸움도 쉽게 끌여 들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것이지요.
무엇을 위해 말입니까?
자신의 자리 보존을 위해 말입니다.
딸이고 여호와고 누구든지 자신의 자리를 위해 이용가치가 있을 뿐입니다.
이런 와중에 다윗은 그 환경 속에서 그냥 살아간다는 사실이 우리를 놀랍게 할 따름입니다.
왕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환경속에 남아 있다는 사실.
물론 조금 있으면 사울왕이 완전히 미쳐 다윗을 직접 죽으려 들때에는 도망가 버립니다마는 오늘 본문에서는 곧장 그 상황을 피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악랄한 사울왕의 환경속에서 다윗은 그냥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증거하면서 말입니까?
자신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름부음 왕임을 증거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생이 살아가는 모습은 생존을 위한 환경적응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의 자리로 더욱더 내 몰리는 환경적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적자생존이라고 말입니다.
환경에 적응치 못한자는 도태된다. 제거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발빠르게 환경에 적응할때만이 도태되지 않고 살아 남는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남 위에 군림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는 너무나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환경에 적응해라. 그런데 성도는 적응하며 살아갈수록 더욱더 죽음의 자리로 내 몰릴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는 늘상 십자가지신 예수님생각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여 살지만 성도는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차를 타는 것도 먹는것도 입는 것도 다 성도의 관심은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대로 말씀드리자면 다윗이 사울왕에게 이런 대우를 받게 하심은 인간왕의 본모습이 무엇을 향해 공격하고 있는가를 고발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다윗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다윗은 그냥 자신의 삶을 살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가 뭐 노력하고 애써고 해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이 그렇게 살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참 어려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것 하나라도 이성으로 이해되어지고 경험되어질때 받아 들일수 있는 존재인데.
이건 나의 손을 떠난 이야기, 나의 경험과 이성을 떠난 이야기를 하니 미칠 지경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을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는 믿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하, 나를 이런 상황속에 두셨구나.
장사하는 상황속에. 아니면 사업하는 상황속에, 아니면 아이를 키우는 상황속에. 아니면 차를 운전하는 상황속에 , 아니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상황속에, 공부하는 상황속에 두셨구나.
무엇을 위해서.
인간 죄를 고발하고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누가 하십니까?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십니다.
다윗과 사울은 하나의 연극 배우지요.
성도도 마찬가지이고 성도 아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의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따지겠죠.
성도는 아무생각없니 살아갑니까?
이런 질문이 별 소용없다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든 성도 아니든 항상 누군가의 지배를 받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죠.
성도는 성령 안에서 살아가고.
성도 아닌자는 공중권세 잡은자의 지배를 받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우리가 느끼느냐 느끼지 않느냐 이건 별 소용이 없습니다.
단지 믿음으로 살아가느냐 살아가지 않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도는 항상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를 이런 상황에 두셔서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증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우린 또 질문합니다.
어떻게 증거합니까라고 말입니다.
다윗이 그냥 사울왕이 시키는대로 살아가는 자체가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주님의 은혜속에 살아간다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무엇인가 한다고 의식했을까요?
아닙니다.
단지 주어진 상황안에서 그냥 살아갔을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것들 하나하나 놓치지 아니하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왜 이런 상황에 두셨는가 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 이런 치열한 싸움 가운데 두셨는가 생각하지 마십시오.
적자 생존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주님은 그 속에서 주님이 누구신지를 증거케 하십니다.
물론 도태 되어도 괜찮습니다.
역시 주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예수님을 증거케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성도의 다른점입니다.
세상사람들은 살아남는 것이야 말로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살아남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죄인을 통해 예수님을 증거하심에 대해 감사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성도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공격할까요?
적자생존해야돼.
목사세계속에서도.
장사속에서도.
사업속에서도 살아남아야돼.
부자 되어야돼라고말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성도를 핍박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와중에 복음도 전하게 되고, 미움도 받게도 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적자생존이라는 말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말입니다.
어디가도 적자생존입니다. 아니면 다 도태되고 쓸모 없는 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성도는 적자생존시대에 도태되어도 감사요, 생존해도 감사한 인생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목적 자체는 성도가 생존하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함께 베드로전서3장13-16절을 보겠습니다.
“또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말며 소동치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