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와 예언
사무엘 상19장18-24
그저께 텔레비전에서 사주팔자와 풍수지리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이들이 사주 즉 생년 월일을 보고 그 사람의 재물운, 아내 운, 건강 운등등을 다 알아 맞춘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텔레비전에서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고 누구의 생년월일만 갖다 줘도 그 사람의 팔자를 훤히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몇 사람의 사주를 봤는데 반은 맞추고 반은 틀렸습니다.
또 한 사람은 풍수지리 전문가인데, 조부모의 묘자리가 손자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의뢰를 한 사람의 팔자가 사나운데 묘 자리 풍수는 아주 좋은 자리라고 확신을 갖고 말하더라고요.
확률 개임을 갖고 장난치는 것들인데 사람들은 이런 사람의 말에 믿음이라는 것을 갖고 덤벼 덥니다.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람들이 자꾸 이렇게 말합니다. 미리 예방하는 차원에서 들으면 나쁠 것이 뭐가 있느냐?
말 되죠. 나쁜 말이 있으면 그 것에 대해 예방을 하면 되고, 이미 일어 났다면 다시 방어할 준비를 하면 된다는 취지지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을 죽이라고 하십니다.
지금이야 죽일수 없죠.
구약성경에 보면 죽이라고 합니다.
왜 죽이라고 합니까?
성경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이것을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세상 모든 것들은 오직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들인데, 이들은 노골적으로 자신들이 하나님 행세를 하는 것이지요.
마치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손안에 있는 것처럼. 그래서 자신들의 말만 들으면 재물, 건강, 장수 등등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자신들의 손안에 있다는 것이지요.
신명기18장9-12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마라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선접자나 박수나 초혼 자를 너희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 내시느니라.”
이렇게 말하면 어렵죠?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 짓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대표적 경우라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인간을 위한 행위들입니다.
사주팔자나 풍수지리도 내 한 몸 잘 살아 보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탐욕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는 자들이 저들입니다.
오늘날은 목사가 이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문제, 교회로 오시면 해결됩니다.
이게 류광수 목사 집단에 내세우는 키 포인트 아닙니까?
다락방이죠. 아담이 가져온 문제 해결을 하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그럴 듯 합니까?
역시 복술자나 무당이나 박수나 초혼자와 동일한 수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 인간 아닙니까?
나, 나 , 나, 나.
이런 이야기와 오늘 본문 말씀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상관이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사람을 보냅니다.
나중에 본인이 직접 잡으러 갑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사울까지 선지자 속으로 편입시켜 버립니다.
사울이 벌거벗은 몸으로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
사울의 사신들도 예언을 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예언한 것이 무엇일까 우리들은 이런 것이 궁금하죠.
그런데 그 내용이 없다 말입니다.
그러니 모르죠.
다만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사울과 그 사신들은 결국 다윗을 잡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오히려 벌거벗고 예언하는 처지가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런 수치를 보이면서도 해야 될 일은 오직 다윗, 즉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을 잡아 죽이는 일을 사울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수치를 다 보이더라도 종일 벗은 채로 다윗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 사울의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이런 것을 받아들이지 않죠.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이런 사울왕의 수치를 다 드러내시면서 다윗왕의 의미를 제대로 부각시켜 주는 역할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왕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들이 사울왕이요 신하들이요 예언자들입니다.
즉 예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상관 없습니다.
내 의지가 어떻게 되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주님은 주님의 일을 진행 시킨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주님이 누구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주님은 사주 팔자, 풍수지리, 복을 준다고 , 인생 문제 해결한다고 하는 목사들을 다 내 버려 두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느냐를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은 이런 자들로부터 도피해야 하는 자들을 발생시킵니다.
다윗이 죽음의 위협을 피해 도피합니다.
사울왕이 자기 자리 보존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도 여기에 있죠.
인간들은 예수님을 옆에 두고도 왜 나를 위한 예수님이 아니냐고 울고불고 난리를 떨지 않습니까?
마르다와 막달리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랬지요.
부활도 믿고 영생도 믿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왜 예수님은 도움이 안됩니까라고 원망하지 않습니까?
이들조차 예수님은 자신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이지요.
그 덕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서 어떻게 인생을 삽니까?
고난 받는 인생, 죽음으로 자리로 내 몰리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되었는지 나와 있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관심은 예수님.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이니 말입니다.
성도의 팔자가 이러해야 합니다.
집안에 우한이 일어나도, 누가 죽어도 , 병들어도, 사업이 망해도 모든 것들이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내 팔자 왜 이리 사납노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오늘 말씀을 보면서 좀 푸근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간다.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간다. 끝. 이게 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벌거벗은 채로 종일 예언하던 사울의 인생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수치가 들어나더라도 예수님만 증거 되어 진다면 감사합니다라는 마음이 우리들의 소원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는 너무 고상하게 살려고 합니다. 이 것 또한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상하면 주님의 십자가는 소용없는 것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