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강해

강해44

푸른 섬 2008. 11. 2. 18:08

억울한 인생

사무엘상22장6-19

여러분 , 여러분이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고 생각해 보면 어떤 마음이 될까요?

아마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의 본 뜻은 그렇지 않은데, 내가 한 것은 그냥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행했을 뿐인데, 나에게 왜 이러한 누명을 쉬우는 것일까?


아니면 왜 이렇게 거짓을 꾸면서 나를 괴롭게 만들까?


혹 이런 일을 당해 보았습니까?


사람들과 함께 살다보면 억을한 일을 당하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게 바뀌어집니까?


성경을 보게 되면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시작되어 요한 계시록까지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정말 부당하다. 정말 억울하다. 이것은 해도 너무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을 싫어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신의 탐욕을 추구하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야 내 탐욕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이것도 참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사는데 억울한 일을 당하면 어떻겠습니까?

참을 수 있을까요.


내가 이렇게 정당하게 삶을 살았는데 누가 나를 이런 처지로, 이런 상황으로 몰아 넣는거야라고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연속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아벨, 어린 친구들 아벨이 누군지 알아요?


아벨은 아담의 둘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이 가인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아벨이 하나님으로부터 제사를 열납받게 되었다는 이유로 가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합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창세기4장10절을 보면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이러면 뭐합니까?

이미 죽어버렸는데.


사람들은 항상 지금의 삶을 추구하지 죽은 삶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죽은자의 호소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아벨을 사람들이 볼때 너무 억울한 인생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입었는데, 좋은 족적도 남기지 않고 죽었다. 그것도 형에게.

얼마나 억울한 인생입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다윗을  잘 대접했다는 이유만으로 제사장 팔십 오인이 죽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읍 놉의 남녀, 아이들, 젓먹이, 소, 나귀, 양들도 다 죽임을 당합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은 평소 자신이 다윗에게 대하는 대로 대했을 뿐입니다.

14,15절을 보세요.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모신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컨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일의 대소간에 아는 것이 없나이다”


아히멜렉은 자신이 아는 그대로 이야기 했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을 대접한 것도 평소대로 대접했을 뿐입니다.


앞서 본문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다윗이 거짓말로 아히멜렉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히멜렉 제사장이 다윗의 그 말이 거짓말인지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정말 사울왕의 일로 놉에 온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떤일이 일어납니까?

다 죽습니다.


누구 때문에 ,

다윗 때문에.


그러면 이 일이 다윗이 거짓말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까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거짓말 했기 때문에 그 죄값으로 놉 사람들이 몰살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어떤 품성을 품고 있는가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 올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신명기7장2절을 봅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이것이 약속의 땅을 차지할 때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울왕이 어떤 짓을 하고 있습니까?
에돔 사람 도엑을 통해 이 짓을 하고 있습니다.


진정 싸움을 해야 할 대상, 진멸해야 하는 대상은 가난안 땅의 이방 족속들인데 그들을 진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진멸합니다.


무엇을 위해,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사울의 탐욕으로인해 억울하게 죽는 자들이 발생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게 되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47,-48절입니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그래서 한 사람을 죽여 온 민족이 망하지 않고 자신들을 유익하게 하는 결론을 내립니다.


사울왕이 취한 행동과 똑같죠.


다윗을 잡지 못했으니 다윗은 죽일 수 없고, 그래서 다윗을 영접한 자들을 죽입니다.

마치 자신의 원수를 하나님의 원수 취급하여 말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속은 이것이 아니지요.

자신들이 살기 위해, 자신들의 자리보존을 위해 예수님을 죽입니다.


사울왕도 동일합니다.

자신의 자리 보존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오히려 당연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볼때 어떻습니다.

어떻게 이럴수 있느냐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기에 이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너무너무 많이 일어나니 별로 놀라지도 않습니까?

그러나 죽임을 당하는 입장이 그냥 억울하게 죽었다가 아니라 다윗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이유가 특이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도 그렇죠.

지금 다윗 때문에 죽는 이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미리 보여주는 증인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당할 것인가를 미리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가 앞서서 말씀 드렸습니다.

인간이 신이 되기 위해 즉, 자신의 탐욕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이 일은 곧 예수님의 영을 받은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바울이 주님의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인생을 살았습니까?

고린도 후서11장23-27절을 봅시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느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엇노라”


인생이 꼬인인생입니다.

사방 팔방이 다 적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인생.

복음을 그렇게 담대히, 열심히, 희생, 헌신, 봉사로 전하는데 왜 이런 인생이 되어야합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주님으로 증거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듯이, 주님의 영을 받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처럼 똑같이 적들로 둘러 싸이게 되고, 어렵고 고달픈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이 곧 오늘날 성령받은 성도의 삶입니다.

물론 삶의 방식과 고난의 방식의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전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말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그저께 제가 돌 잔치게 갔었습니다.


그쪽 아기 엄마가 교회를 다니는 모양입니다.

한사람이 나와 하나님의 사랑 속에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란다고 축복을 해 주니 제 앞편에 앉은 사람이 갑자기 나무아미 타불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앞에 나갈 기회가 있게 되었는데 앞에 나가서는 염불을 외웠더니 이렇게 시주를 해 주시네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해서 완전히 비꼬는 것이지요.


성도는 이런 조롱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억울한 인생으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내가 이런 저런 일을 당해야 하느냐?


그렇습니다. 당해야 합니다.


놉  지역의 제사장들과 그 거민들의 진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들은 인간들이 보기에 불쌍하고 억울한 인생이지만, 이들보다 더 큰 복을 받은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도 이런 복에 참여되기를 간절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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