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당하는 인생
사무엘 상23장6-14
보상이라는 것은 노동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요소입니다.
땀흘려 일했는데 이에 대한 보상이 없거나, 아니면 적으면 누가 일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흔히 하는 봉사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도와 주는 것도 그렇습니다.
돈이 많아서 한다는 것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봉사나 찬조에 따른 봉사는 반드시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없다면 아무도 봉사나 찬조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인간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보상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보상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그에 따른 보상을 줍니다.
소위 낙하산 인사라는 것인데. 낙하산 인사를 받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감당하는 것이지요.
이런 것이 없다면 누가 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세우는데 자신의 정열을 쏟아 붓겠습니까?
그 정렬과 돈으로 다른 일을 하겠지요. 다른 일보다 더 많은 보상이 있기에 그곳에 사활을 걸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의 세상은 이와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땀에 대한 보상을 준다. 네가 이렇게 수고 했으니 그에 대한 합당한 댓가를 주겠다. 이런 논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의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다윗이 그일라 거민을 구한후 다시 사울의 공격을 받을 위기에 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과 다윗의 사람들을 사울에게 붙이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결코 붙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응답하셔야 하는데, 오히려 그래 그들이 너를 사울에게 붙일 것이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뭔가 좀 아구가 맞지 않죠.
이가 맞지 않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힘들고 어려운 중에, 목숨이 언제 빼앗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일라 거민을 구해 주었다면, 그것도 그냥 심심해서도 아닙니다. 자신의 힘이 세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는 일이기에 헌신했는데 결과는 오히려 배반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구해 주었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신들을 지켜 주어야 할 것인데, 오히려 사울왕에게 붙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과 그 일행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런 나쁜놈들. 그래서 그일라 그민들을 모조리 진멸했습니까?
아닙니다.
다시 떠나 다른 곳에 숨습니다.
참 처량한 신세지요.
성경의 세상이라는 것이 이런 세상입니다.
보상을 바라고 하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20장 앞부분을 보면 포도원 비유가 나옵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런 아침에 나가 일꾼을 구합니다. 약속된 금액은 한 데나리온.
그런데 제 삼시에도 즉 아침 아홉시에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이 또 있기에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일당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육시에도 그렇고 9시에도 그렇고 제 십일시에도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포도원에 들여 보내 일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저물매 일당 계산을 합니다.
이것을 볼때 처음 온 사람은 여름이라면 아침 여섯시부터 일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제일 일찍 들어온 사람이 제일 오래 일을 했지요.
그러면 우리의 계산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많이 받아야죠.
그런데 일당을 주는데 거꾸로 줍니다.
제일 늦게 온 사람부터 한 데나리온씩 줍니다.
그러자 제일 먼저 온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더 받겠지 생각합니다.
그런데 왠 걸요. 똑 같이 줍니다.
그러자 이들이 말합니다.
“나중 온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정말 화나는 일이 아닙니까?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한 시간을 일하는 것 하고 하루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뎌가며 일하는 것의 차이를 말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임금을 줍니다.
그러니 항의할 만하죠.
주인이 뭐라고 합니까?
“친구야 내가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들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이것이 천국입니다.
성경의 세상이죠.
주인의 약속대로 뜻대로 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인간은 할 일 없이 노는 사람. 즉 지옥갈 인생이었는데, 구원하여 하나님의 일에 참예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는 말이 왜 저에겐 조금의 보상 밖에 주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인간은 천국백성이 아니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를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5-10절입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사 하니 주께서 가라시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라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니라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 맏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문제에서 이 본문이 나왔습니다.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도 라고 하시면서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 찐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로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우리 모두는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져져야 마땅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 납니다.
용서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납니다.
형제,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 죄를 범할 때 하루 일곱 번이라도 즉 수없이 죄를 범해도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하면 용서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오직 믿음이 있는 자에게만 나오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하는 인생은 결코 믿음이라는 것을 모르는 인생입니다.
내가 이렇게 죄를 많이 짓는 형제를 용서했으니 저 훌륭하죠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한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무익한 종이요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포도원 품꾼들의 태도가 어떻습니까?
늦게 온 사람은 가만히 받고 갑니다.
그런데 꼭 일 많이 한 사람이 짜증을 내죠.
회사에서나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는 어디서든 그렇죠?
일을 적게 한 사람은 입다물고 있죠. 그런데 일 많이 한 사람들은 당당하죠.
하나님 나라는 이런 세계와 전혀 다릅니다.
다윗을 보세요. 자신이 그일라 거민을 구해주었으니 나는 대우 받을 필요가 있다고 합니까?
아니죠.
하나님께 묻고 곧장 다른 곳으로 도망갑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정신나간 자들은 그럼 좋다. 우리 일하지 말고 살자.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있는데 이런 자들은 무익한 종과 상관 없는 자들이죠.
왜냐하면 종이 아니라 자신이 주인 행세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이란 대접받고 대우받는 삶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지만 그에 대한 댓가를 받는 삶이 아닙니다.
주고 오히려 욕먹고, 미움 받고, 싫어 버림을 받는 모습이 성도의 모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당할 때 성도는 오히려 옳습니다.
저는 무익한 종이오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짐에 감사합니다라고 해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