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는 자
사무엘상23장15-18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듣습니다.
남이 잘 되는 꼴 못본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사람들이 견딜수 없는 것이 바로 남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할 때에는 누구집 남편은 어떻고, 누구집은 어떻고, 누구집 아이는 어떻고가 튀어 나오면 난리가 납니다.
아이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너 누구누구보다 더 예뻐라고 말하면 그냥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너 누구보다 못생겼어라고 하면 토라집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 아이랑 친구 아이랑 함께 운동을 할 때였습니다.
그때 제가 우리 예빈이를 칭찬하지 않고 다른 친구를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 운동 안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아이만 별나서 그럴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아이가 점점 자라 남들과 경쟁하는 위치에 서게 되면 지고는 못 사는 인간이 됩니다.
뭐가 그럴까요라고 여러분들은 말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환경과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딱 맞는 상황과 만나게 되면 이것은 누구도 피해갈수 없는 질투 시기로 가득차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요나단이 등장합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뭐라고합니까?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이런 말 하는 것을 보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듭니까?
사람이라는 것은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쉽게 내어주는 자가 아닙니다.
본성상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인간은 이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첫째 아담 속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20장을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잡히려 가시는 중에 일어난 사건이 나옵니다.
20-28절입니다.
“그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 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삼년정도 함께 따라 다니면서 먹고 자고 했으면 이제는 알만한도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알죠. 그런데 무엇을 못 버립니까?
세상적 사고방식입니다.
한자리 하겠다는 사고방식.
이것은 무엇과 비교하는 것입니까?
남들과 비교하여 자신이 더 높은 자리에 앉고 싶은 욕망입니다.
타인이 없다면 이런 욕망이 없을 테지요.
그런데 타인, 즉 같이 주님의 제자로 있지만 그들이 형제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경쟁 대상자, 지배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 치맛바람을 이용해 주의 나라에서 한 자리 차지해보겠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지 않습니까?
두 형제에 대해 열받은 것입니다.
열받는다는 것은, 분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자신들도 여전히 그런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 말씀을 또 세상적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래 주의 나라에서 크고자 하려면 여기에서 많이 섬겨야지. 주의 나라에서 으뜸이 되려면 종으로써 섬겨야지 이렇게 말하고 가르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은 이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받은 자들은 섬기는 자로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크고자 하여, 으뜸이 되고자 하여 섬기고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노림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 다니면서 한자리 생각하던 그런 노림수가 없습니다.
이런 노림수가 있다면 성도 아닙니다.
그런데 만일 이와 같은 노림수가 있다면 즉 천국가서도 한자리 차지하겠다는 노림수가 있다면 이 땅에서도 반드시 그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제자들 처럼말입니다.
고린도 전서 1장에 보면 이 와 똑 같은 사건이 반복됩니다.
서로 자신은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에게,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자랑합니다.
왜 이런 말을 할까요?
서열 나누기입니다.
내가 더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제도가 생겨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인간 본성은 항상 서열화 시켜 자신을 남보다 높은 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직성이 풀립니다.
십자가의 도라는 것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멸망하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남을 밟고 높은 자리 차지하는 것.
성도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고 전하는 자입니다.
그러니 내가 더 높다 내가 더 훌륭하다. 내가 더 좋은 자리 차지할 것이다라고하는 인간들은 멸망당하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속에서나 고린도 교회속에서 이런 모습이 나타났다는 것은 지금도 언제나 이런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를 헛되게 만들려고 합니다.
복음을 잘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감사함으로 열심히 들으면 됩니다.
그런데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이런것을 견디지 못하고 열받는 인생이 있다면 참으로 불쌍한 인생입니다.
물론 열받을 수야 있겠죠. 그런데 그 열받음이 지속되면 어떤 모습이 될까요?
파선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부인 없이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없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봉사 잘하는 사람 있으면 기뻐하세요.
전도 잘하는 사람있으면 박수쳐 주세요.
그것 갖고 끌어 내리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것은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요나단의 모습을 보세요.
이런 모습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왕의 자리에 오려려고 했습니까?
복음만 전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요즘 어떻습니까?
복음을 빙자하여 남보다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인간들이 깔려 있죠.
이미 앉아 있죠.
담임목사와 부목사만 보아도 그렇죠.
우리 성도들은 이런 것을 잘 모르시겠지만.
무슨 조폭세계같습니다.
자기들 말 안들으면 한 칼에 날려 버립니다.
설교 조금만 잘해도 태클 들어오고 난립니다.
그래서 그 밑의 똘마니들도 똑같은 짓거리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남과 비교할 이유가 없는 인생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고 전하는 인생입니다.
남은 어떻게 살더라, 남은 어떻더라 할 필요 없는 인생입니다.
정말 남과 비교하고 싶으시다면 예수님과 비교하시고 바울과 비교하시기 바랍니다.
그곳에는 십자가의 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길이요 영생의 길입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나은 자리, 높은 자리 앉으려는 탐욕을 회개하는 그런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