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렬한 전쟁
사무엘하 2장8-17
사람들이 오늘 같은 성경본문을 읽게 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꼴 좋다 하지 않겠습니까?
둘 다 출애굽한 백성들인데 다윗가문과 사울가문이 나누어져 싸움이 진행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것도 그냥 말다툼이 아니라 맹렬한 싸움이 벌어지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이 이런 본문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하나님도 너무 하시지. 그냥 다 다윗가문으로 편입해 넣으시면 안됩니까?
모두가 출애굽한 백성들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백성들인데 왜 이렇게 서로 싸움을 하게 만듭니까?
싸움을 왜 합니까?
전쟁을 왜 합니까?
여러분 그 이유를 아십니까?
인간의 전쟁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욕망.
자기 속에 있는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전쟁을 벌입니다.
사울 가문이 다윗가문에 항복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전쟁을 합니까?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잃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우리의 가진 것을 잃어야 하느냐.
우리에게도 힘이 있는데 그냥 모든 것을 내어 줄 수만은 없는 일이지요.
자신도 얼마든지 신처럼 행세할 수 있는데 내가 무엇하러 나의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놓아야 합니까?
이것이 사울 가문이 사울 왕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 항복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참 어렵습니다.
뭐 다 된 것 같고 끝난 것 같은데 다시 반복반복 반복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후 계속해서 벌어진 일들이 아닙니까?
가인과 아벨을 보게 되면 가인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은혜를 받은 아벨에게 동참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결정에 박수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결정에 반기를 들고 하나님의 택한 사람 아벨을 죽여버리죠.
이 후에도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아브라함을 보게 되면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넘어 가게되면 야곱의 형제 에서가 나옵니다.
같은 아버지를 두고 있고 같은 하나님을 두고 있는데 둘은 싸움을 합니다.
철천지 원수가 됩니다.
물론 화해를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의 관계를 원수관계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둘은 태어 나기 전부터 싸움을 합니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누가 싸움꾼인고 하면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은혜를 받은 야곱이 싸움꾼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는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전까지의 삶은 그야 말로 싸움꾼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조차도 자신의 욕망으로 작용하여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뺏어 옵니다.
자신이 섬기는 자가 됨으로 싸움은 일어나지 않지만 결국 이들은 두 민족으로 즉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관계로 전락합니다.
왜냐하면 한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는 일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세상이 전쟁하는 세상으로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물론 은혜를 모르는 쪽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전쟁을 합니다.
동시에 은혜를 받은 쪽은 그것이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전쟁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어려운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다윗가문과 사울 가문이 서로싸움을 하지않습니까?
우리 같으면 어떻습니까?
그냥 다윗이 참아야지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제 생각인가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전쟁은 해야 합니다.
죄인들의 고상한 생각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도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오늘 본문을 보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봐라. 이스라엘이나 다른 고대 국가나 뭐가 다른가. 다 똑같지 않는가?
서로 전쟁하고, 죽이고 죽고. 뭐가 달라. 다른 것이 있어야 믿을 만하지.
그래서 성경이 어려운 것입니다.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볼 뿐이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대로 보여주시면서 예수님을 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의 욕망과 사울가문의 욕망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맹렬한 전쟁을 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가를 보여 주십니다.
갈라디아서 1장6-10절을 봅시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 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던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 본문을 보게 되면 전쟁이죠. 대단한 싸움입니다. 저주속에 포함되느냐 되지 않느냐의 싸움입니다.
몸이 죽는 문제가 아니라 지옥가느냐 천국가느냐의 싸움입니다.
그러니 이 전쟁보다 더 맹령한 싸움이 어디 있습니까?
물론 인간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게 무슨 싸움이냐 할지 모르지만 성도에겐 이보다 더 맹렬한 싸움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싸움이 왜 일어나는가를 봅시다.
그것은 하나님을 좋게 하는 복음과 사람을 좋게 하는 복음의 싸움입니다.
사람을 좋게 하는 복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면 지키는 것입니다.
즉 행함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매력적입니다.
사람은 늘상 행함을 통해 보람을 느낍니다.
자신의 한 일을 통해 삶의 의미를 느끼지요.
그런데 바울의 전한 복음은 사람을 좋게하는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좋게 하는 복음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깡그리 무시해 버립니다.
모든 것을 십자가의 피 능력, 피 공로로 돌립니다.
여기에 대해 반기를 드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왜 우리를 무시합니까?
그러면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가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 내는 이 열심히 잘 못되었다는 말입니까?
왜 바울 당신은 예수님을 전하면서 십자가 이야기만을 전합니까?
우리 인간이 행하는 것도 좀 인정해주는 복음은 안됩니까?
그래서 나타난 것이 바로 사람을 좋게 하는 복음 즉 율법준수, 인간의 행위 챙기기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예배에 참여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 의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만이 하나님의 기쁨이요 의가 됩니다.
여러분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으로 구원을 얻었고 그래서 여러분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인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의 피공로로만 삽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좋게 하는 복음은 뭐라고 반박하겠습니까?
십자가복음도 좋지만 우리도 뭔가 사는 맛, 행하는 맛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지난번에 제가 사람은 사랑을 행함으로 산다고 했습니다.
이런 맛이 있어야 사는 맛, 신앙생활하는 맛이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일을 열심히 하여 돈을 벌죠.
그런데 옆에 함께 있는 사람이 그것도 주님의 은혜라고 해보세요. 얼마나 열받습니까?
자신은 뼈빠지게 일해서 돈을 벌었는데 주님의 은혜라니.
내 수고와 내 땀이 헛것이라는 말입니까? 라고 당장 열받으면서 따지지 않겠습니까?
교회에 열심을 내는 사람에게 그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합니다. 맞죠. 그러면서 본인의 본인의 행함을 흐뭇하게 여깁니다. 이때 이렇게 말합니다.
그 열심도 죄가 됩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가 왕노릇하는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라고 하면 버럭 화를 내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은 정말 맹렬한 전쟁 속에 있습니다.
주님이 그 판을 벌려 놓으셨습니다.
십자가의 피공로만을 의지하고 증거하는 인생과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는 인생으로 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좋게하라는 측과 사람을 좋게 하는 편으로 나누어져 맹렬한 싸움을 하게 됩니다.
한쪽은 죽어도 십자가의 피공로입니다. 이와 싸우는 대상은 그래도 인간의 기쁨이 조금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