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하

강해 4

푸른 섬 2009. 3. 29. 17:57

죽는 싸움

사무엘하2장18-23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열 두 개의 화난 목소리가 일시에 터져 나왔는데, 그 목소리는 하나같이 비슷했다. 이제 돼지들의 얼굴에 나타난 변화가 무엇인지 분명해 졌다. 창밖에서 지켜 보고 있던 동물들은  돼지로부터 인간에게, 인간으로부터 돼지에게, 다시 돼지로부터 인간에게로 시선이 번갈아 가며 움직였다. 하지만 이미 어떤게 어떤것인지, 돼지가 사람인지, 사람이 돼지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인간 주인 존스씨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혁명을 이루었지만 결국 동물 농장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돼지들이 인간주인 존스의 자리를 대신할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 보면 마치 머리가 좋은 돼지들과 인간만이 악한 자들로 보고 있고 마치 힘이 없는 , 권력이 없는 자들은 선한 것 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혁명을 주도하는 자나 그 혁명을 따라가는 자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제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임금이나, 왕, 혹은 귀족들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나 책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볼수 있습니다.


귀족집에 사는 종들은 정말 종에 불과하고 귀족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며 사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민주주의라는 것이 되어서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며 살수 있습니다.


무엇이 있으면 말입니까?

돈만 있으면 정말 쥐나 개나 다 마음대로 하며 삽니다.


동물농장에 나오는 오리나 쥐나, 염소, 양들이 돼지들과 같은 위치에 있게 되면 그때는 양이 인간인지 인간이 양인지, 아니면 염소가 인간인지 인간이 염소인지, 아니면 쥐가 인간인지 인간이 쥐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을 모르는 자들이 꿈을 꾸고 혁명을 해 보았자 그 결말은 볼 것도 없습니다.

반복될 뿐입니다.


체제가 바뀌면 좋은 세상이 도래할 것 같지만 그런 세상은 없습니다.


마귀가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한 이 세상은 신과 신의 싸움의 현장입니다.

기회가 없을 뿐이지 기회만 되면 자신이 신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것이 인간 속에 꿈틀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15절을 보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은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말씀입니다.


욕심이 없는 인간, 이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욕심이 인간 중심에 자리잡고 언제나 죄를 생산해 내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리고 죄를 생산해 내는 존재는 자신이 죽은 자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 죄가 장성해야 사망이 발생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본문을 보면 엉터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은 사망이 왕노릇하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라고 이해하여서 우리가 더 노력해서 죄를 장성케 하지 말아야지라고 하면 사망을 피할 수 있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요?


이것도 말이 안 됩니다.

여기에서 사망은 주님과 영원히 갈라서는 것이요, 지옥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이 우리의 행함에 따라 결정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설사 그렇다 하더라고 누가 자신속의 욕망을 피할 수 있습니까?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상황만 주어지만 그 욕망이 만개합니다.


요즘 아침에 걸어서 출근하는데 출근할 때 공원을 지납니다.

공원 안에 벌써 꽃들이 만개한 것도 있습니다.


그저께는 저 뒤쪽으로 차를 타고 가는데 살구꽃인지 매화꽃인지 만개해 있었습니다.

봄만 되면 아니면 여름이 되면 꽃들이 만개합니다.


우리의 죄악도 마찬가지입니다.

때가 되면, 즉 환경만 밑받침 해 주면 욕망이 살아 움직여서  죄를 낳고 사망으로 곧장 달려 갈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는 박살나는 존재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가 아니면 결단코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공로가 아니면 어떤 인간도 지옥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착각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면 자신은 얼마든지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십자가의 피는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시험에 들지 않습니까?

누가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까?


완벽한 인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야고보서 4장13-17절을 봅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도 압니다.

그런데 그것을 행 할 수 있습니까?


그랬다면 이미 우린 이 자리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 있으면 안됩니다.


복음 전하러 떠나야 하죠.

물론 떠나는 것이 주의 뜻이냐고 물으신다면 반대로 지금 돈벌고 가정 챙기는 것이 주의 뜻입니까라고 되물어 보면 어떻습니까?


자 자기 자신을 위해 머물고 있지 않습니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주님이 이런 일도 우리 가운데서 주님이 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상 죄인으로 드러나면서 주님의 행하심이 우리 가운데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도 하는 사람이 있다면 , 혹 본인에게 그러한 일이 일 어났다면 그것은 주님이 행하셨다고 믿으셔야 합니다.


이것이 믿는 자, 곧 성도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아사헬이 아브넬을 죽이려고 덤벼 듭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이기 싫어 했습니다.

그 이유는 요압때문이랍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싸움을 하지 말든지.

어찌되었든지 아사헬은 이 싸움에서 적장의 목을 베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싸움의 대상을 잘못 골랐습니다.

아사헬은 아브넬에게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살 기회를 주었지만 아사헬은 거절하고 결국 아브넬에게 죽습니다.


상대를 죽이려고 하기 전에 자신의 처지를 알아야 합니다.

상대가 도망간다고 자신이 이길 수 있다는 자만감이 결국 죽음의 자리로 갔습니다.


동물농장에서 동물들은 착각했습니다.

우리는 인간 존스와 다르다라고 말입니다.

돼지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다른 모든 동물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 속에 또 다른 자신, 즉 인간 존스가 들어있었습니다.

이들은 이것을 계산하지 못했고 결국 인간 존스의 소유물이 되었듯이  돼지의 배를 채우는 소유물이 될 뿐입니다.

싸움의 대상을 잘못 택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몰랐던 것이지요. 돼지라고 자신 속에 또 다른 존스가 들어 있는 지 생각도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압니다.

주님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도 해야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실은 어떻습니까?

주의 뜻이면 살기도하고 죽기도 하는 인생이 아니라 나의 욕심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수고와 노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야고보서에 나오는 그 부자의 자랑.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 아닙니까?


허탄한 자랑이 아닐까요?

이 말씀이 우리를 결코 피해가지 않습니까?


우리가 속으로 말을 하든, 겉으로 말을 하든지 주의 뜻과 상관없이 나의 삶을 위해서 얼마든지 부자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이상한 싸움을 하려고 합니다.

대도 않는 싸움. 말도 안되는 싸움을 하려고 합니다.


선한 행위로 싸움을 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해 봤자 마귀의 종노릇에 불과한 싸움입니다.


그러다 마귀의 종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아사헬과 같은 어리썩은 싸움을 하는 자가 아닙니다.


주님의 승리한 싸움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상 무엇을 앞장세우고 자랑하는고 하면 주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그 십자가를 앞장세우는 자입니다.

그래서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도 하는 인생이 주님의 참된 성도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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