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꾼 다윗
사무엘하14장1-33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인간들은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자기 자신의 자리 보전을 위해 사건을 이용하고 해석합니다.
요압은 다윗왕의 마음을 읽고 있습니다.
다윗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13장37절을 보면 다윗이 날마다 압살롬을 위해 슬퍼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곁에 있던 요압이 다윗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그 다음을 생각할 수 있겠죠?
아하. 다윗왕은 압살롬이 비롯 자신의 동생을 죽였지만 그를 다윗왕의 후계자로 생각하는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압살롬의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물론 그 인기는 압살롬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습니다.
25절을 보면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머리 털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마치 샴푸선전하는 여인이 머리카락보다 더 아름다웠던 모양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름다움이 힘이 되는 모양입니다.
요즘도 그렇죠?
예쁘면 다 아닙니까?
약간의 흠이 있어도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압살롬은 이런 인기를 등에 업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요압이 모를리 없죠.
여기에다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해 있다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요압이 계략을 짭니다.
술기 있는 여인을 통해 다윗의 마음을 돌이키려 합니다.
결국 드고아 여인의 통해 다윗이 움직였습니다.
요압에게 명이 떨어졌습니다.
요압이 압살롬을 데려 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만나주지 않습니다.
만나주지 않는다는 것은 마음은 압살롬에게 가 있지만 압살롬을 용서해 주지 않았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압살롬의 계략으로 어쩔수 없이 다윗이 압살롬을 만나 줍니다.
이게 오늘 본문 전체내용입니다.
압살롬이 자신의 누이동생 다말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암논을 죽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압살롬이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요압은 발빠른 행동을 취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좀 이상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굽니까?
다윗입니다.
다윗의 마음은 분명 압살롬을 향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빨리 압살롬을 받아 들이지 않았을까요?
왜 압살롬을 용서해주지 않았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압살롬의 행위가 정당했다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왜냐하면 15장을 보게 되면 압살롬을 따르는 사람들이 상당이 많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압살롬이 뭐 그리 잘못했습니까?
만일 우리 형제나 자매가 다말같은 일을 당했다고 해 봅시다.
여러분 가만있겠습니까?
당장 죽여 버리고 싶지 않을까요?
제가 너무 심합니까?
텔레비전을 보면 유괴범이 가끔 나옵니다. 어린 아이를 유괴해 죽인 자들이죠.
여러분 그런 유괴범을 보면 무슨 생각듭니까?
그야 나의 일이 아니고 하나의 드라마나 영화 같으니 남의 일 같죠.
그러나 만일 그런 일이 나의 일이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유괴범을 그냥 살려 두고 싶겠습니까?
아이들도 있는데 좀 심한 표현을 써서 죄송합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가만 있질 못할 겁니다.
아마 죽을때까지 그 유괴범을 떠올리며 살지 모릅니다.
그러니 압살롬이 그 누이동생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렇게 까지 했겠습니까?
자신이 다윗왕으로부터 멀어질지 모르는데..
그러나 압살롬의 모습을 보면 그가 저지런 짓은 정당했습니다.
결코 문제 될 것이 없는 살인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모습 속에서 반성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마음을 읽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압살롬을 받아 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의 마음속엔 무엇이 자리 잡고 있을까요?
나단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사무엘하 12장10-13절입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gpt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다윗은 압살롬에겐 전혀 상한 심령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알고 있습니다.
다말 사건이나 압살롬 사건이 일어난 이유를, 그리고 지금 일이 이렇게 처리되고 있는 이유도 말입니다.
다윗이 요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압살롬을 받아 불러 들였고, 압살롬을 만났지만 압살롬에 대해 진정으로 받아 준 것은 아닙니다.
압살롬이 진정으로 다윗에게 받아 들여 지려면 그에겐 상한 심령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대승적 차원에서 그냥 압살롬을 받아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것은 마냥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윗이 압살롬 편이 되어 버립니다.
상한 심령이 오히려 뻔뻔한 심령, 악한 심령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니 그럴수 없습니다.
또한 이렇게 되어야만 하나님의 예언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다윗은 이제 관찰자입니다. 마치 구경꾼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말씀대로 되어지나 안되어지나 보자는 식입니다.
요압의 계략도 그냥 받아 줍니다.
드고아 여인의 말도 그냥 받아 줍니다.
압살롬도 데려 옵니다.
압살롬과도 만납니다.
그러나 압살롬을 받아 들이지는 않습니다.
그러고는 말씀대로 되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단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짐을 보게 됩니다.
15장부터 나옵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면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하면 자꾸 문제를 풀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풀어야야 속이 시원하거든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저의 성격이 그렇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풀어야만합니다.
풀지 못하면 잠을 잘 못잡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으면 빨리 해결해 버립니다.
이게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생각입니다.
요압의 생각이 요압만의 생각이 아닙니다.
특히 자신의 이익과 관련될 때에는 그 문제를 자신의 방식으로 확 풀어 버려야 직성이 풀립니다.
물론 시간을 끌면서 푸는 자들도 많습니다.
계략을 사용해 문제를 풀던 어떻게 풀든지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냥 문제를 내버려 둡니다.
압살롬을 불러 다그치던지 어떻게 하던지 해야 하는데 그냥 그냥 그대로 버려 둡니다.
물론 마음은 압살롬에게 향해 있습니다.
그러다 요압이 문제 해결자로 나서자 그냥 요압의 말을 다 들어 줍니다.
그러나 또 문제를 방치합니다.
압살롬을 만나 주질 않습니다.
그러다 요압의 말을 듣고 압살롬을 만나 줍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냥 그대로 버려 둡니다.
어떤 주석을 보면 다윗이 처음부터 압살롬의 죄를 용서하고 받아 주었으면 다음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라고 말합니다. 이런 주석은 지극히 인간적이죠.
하나님의 뜻하고는 상관없이 성경을 인간적으로 해석해 가는 것입니다.
문제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면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업신여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다윗에게 베푸신 긍휼이 얼마나 대단한 긍휼인지 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 터지면 자꾸 그 사건, 그 문제를 해결하려도 덤벼듭니다.
그래야 깔끔하고 기분이 정리가 되니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사건, 일들을 주시는 것은 우리의 죄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문제를 자꾸 해결하고 정리하려고 하지 마시고 그냥 그대로 두고 보시면 됩니다.
성질이 급해서 빨리 정리하고 넘어 가자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이렇게 대단하구나를 알게하시기 위해 우리 앞에 여러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왜 나에게 하필 이런 일이, 왜 하필 우리에게 이런 사건을 일으키실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 지시고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주님이 오늘도 살아 계셔서 예수님 자신이 주님이심을 전하시기 위해 여러 사건을 일으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