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정하셨음이더라
사무엘하17장1-14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정말 완벽하게 다윗을 제거하고 사람들을 왕께 돌아올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그냥 아히도벨의 말을 듣고 그대로 시행하면 될 터인데 후새를 부르라고 합니다.
참 희한하죠. 왜 압살롬에게 이런 맘이 생겼는지..
그래서 후새를 부릅니다.
후새가 누굽니까?
다윗이 심어 놓은 첩자아닙니까?
후새의 모략이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더 좋게 보였습니다.
압살롬 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모략을 따르지 않고 후새의 모략을 따르기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 일 배후에 누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계십니다.
14절을 봅시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더라”
사실 아히도벨의 모략이 후새의 모략보다 더 좋았습니다.
그런데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누구의 모략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까?
바로 후새의 모략이죠.
이렇게 된 이유가 바로 여호와께 있습니다.
압살롬과 그 일당들은 생각했습니다.
모든 일이 자신들 손에서 움직인다고 말입니다.
아히도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이 자신의 모략이 서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아히도벨은 자기고향으로 돌아가서 자살해 버립니다.
결국 후새의 모략이 성공하여 다윗과 그 일행들이 무사히 요단을 건넙니다.
여러분 자살한 아히도벨을 보면서 누구를 떠 올립니까?
자살한 노무현 전 대통령, 아니면 최진실.
물론 이들도 아히도벨과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부류죠.
자신의 뜻이 관철 안되니 자살해 버린 사람.
참 독특한 사람인것 같지만 결코 우리와 다르지 않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27장3-5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게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우리가 너무나 잘아는 내용입니다.
유다의 자살말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자살은 아히도벨과 좀 다른 부류의 자살자입니다.
아히도벨은 자신의 뜻이 꺽였으니 이제 죽어 버리자하여 자살했습니다.
그런데 가롯유다의 경우는 양심입니다.
스스로 뉘우쳐서 자살해 버렸습니다.
참 독특하죠.
베드로를 보면 닭이 우니 흑흑흑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모른다 하고 저주하고 맹세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 먹은 가롯유다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가롯유다가 오히려 칭찬 받아야 하죠.
자살까지 할 정도라면 그의 마음이 얼마나 확실한 회개를 했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지 않죠.
심히 통곡하니라. 흑흑흑..
이게 다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볼 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죠.
우리야 워낙 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당연히 가롯유다는 나쁜놈, 베드로는 좋은놈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똑 같습니다.
가롯유다나 베드로나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더 나쁜놈입니다.
사실 가롯유다안에 베드로있고, 베드로 안에 가롯유다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가롯유다는 왜 자살로 끝을 맺고 베드로는 성령 충만으로 주님의 증인으로 살게 됩니까?
이것이 우리가 궁금한 점 아닙니까?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고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그리 간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맘은 누구에 더 가까운고 하면 가롯유다에 더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가롯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아 먹었습니까?
아히도벨의 사고방식이 작용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예수님을 팔아 먹었습니다.
자신의 계획에 예수님이 들어오지 않으니 예수님을 팔아 먹었습니다.
우린 어떻습니까?
우리계획에 예수님을 들어오시기를 바랍니까 아니면 예수님 계획에 우리가 들어가기를 바랍니까?
그래서 우린 늘상 짜증내고, 화도 나고, 예수님을 우선시 생각하기 보단 내 이익, 내 자식, 내 가족이 우선이 됩니다.
이게 맘대로 안되면 확 죽고 싶지 않습니까?
내 자신이 내 말을 안 들어 보세요.
돌아버릴 것 같지 않습니까?
아내가 내말을 안 들어 주면, 남편이 내 말을 안들어 주면 어떻습니까?
인간이란 절대로 가롯유다를 못 벗어 납니다.
그래서 항상 예수님은 나에게 이용가치로 사용될 뿐입니다.
즉 무시하기.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롯유다같은 행동을 또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양심말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 되나.
내가 예수님처럼 살아야 되는데, 늘 예수님 잘믿고 살아야 하는데 .
왜 자꾸 돈을 믿고, 왜 자꾸 세상에 눈을 돌리지.
이러면 안되는데..
그러면 또 어떤 생각합니까?
이렇게 예수 믿을 바에는 안 믿는 게 낫지.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콱 죽어버리자.
그런 것 같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 해도 우리는 이 범주를 못 벗어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예수님을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가 동일하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이제 예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가 갈라집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베드로와 가롯유다를 보세요.
한쪽은 은혜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롯유다에겐 은혜란 것이 없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베드로에겐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가 있습니다.
가롯유다에겐 이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가롯유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즉 자신의 계획, 열심, 좌절, 착함만이 눈에 보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겐 무엇이 보입니까?
자신의 계획, 열심, 좌절, 착함등이 눈에 보이지만 그 위에 십자가의 피가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성도와 성도 아닌 자의 차이입니다.
성도라고 생각하면 뭔가 특별히 다르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읽어 볼수록 성도와 성도 아닌 자의 차이는 별로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을 보면 흰옷을 입었느냐 입지 않았느냐로 갈라지고, 이것은 곧 생명책에 기록 되었느냐, 기록되지 않았느냐로 갈라져 버립니다.
그러니 성도와 성도 아닌자의 구분은 사실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단지 누구에게 붙어 있느냐로 갈라집니다.
지금 다윗과 압살롬이 싸웁니다.
여기에서 다윗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 편이고 압살롬 편에 있으면 마귀편입니다.
간단하죠.
무엇을 행했느냐가 아니라 누구편에 달라 붙어 있느냐로 결정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그래 그럼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되겠네요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행하심을 자랑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행함을 좋아하는 인간은 그래 예수님을 행하심, 십자가를 자랑하자고 덤벼 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편이 아닌자들은 결국 어떤 꼴이 나는고 하면 아히도벨 꼴이 납니다.
가롯유다꼴이 납니다.
이게 작정된 것입니다.
겉모습이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는 모습으로 보여도 아히도벨, 가롯유다형을 절대 못벗어납니다.
자신의 뜻 관철하기, 안되면 자살, 양심으로 살기 , 안되면 자살. 모든 것을 자신이 시작해서 자신이 끝내버리는 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것들을 늘상 자신의 삶 속에서 드러내면서 십자가의 피를 믿는 삶을 살아갑니다.
후새도 모략이요 아히도벨도 모략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배후에 여호와의 작정이 덮쳐져 있습니다.
참 성도는 여호와의 작정에 의해 예수님의 피를 전하는 자로 사용되는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