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바의 반역
사무엘하20장1-2
왜 하필 다윗이라는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가?
왜 다윗이라는 사람만이 우리들의 왕이 되어야 하는가?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냐민 사람이라고 하면 사울 왕이 떠오르죠?
그러니 유다사람이 아니라 베냐민 사람도 얼마든지 왕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가장 기분나빠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다윗왕이냐는 것이지요.
이게 그냥 다윗왕이면 문제가 별로 없습니다.
사실 다윗왕은 장차오실 예수님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문제가 됩니다.
사도행전 4장11-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합니다. 누가 말입니까?
예수님이 그렇습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했을 때에는 정말 쓸데없는 아무 곳에서 쓸모 없는 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분이 예수님입니다.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갈 때 예수님은 어떤 도움도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단체를 보게 되면 예수님은 참으로 쓸모있는 분이 됩니다.
사람들이 볼 때 본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웃에게 사랑을 친히 베푸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 세상에 너무 쓸모 많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쓸모있는 분일까요?
정말 교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유익한 분일까요?
만일 그러하다면 사도 베드로의 말이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예수님이라는 표현 천지 쓸데 없는 인간이라는 뜻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예수님은 우리 인간에게 너무너무 쓸모가 많으신 분이시다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죠?
그야 그 당시 대제사장들이나 성전 맡은 자들이나 아니면 헤롯왕이나 본디오 빌라도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까?
적어도 베드로에겐 예수님은 귀한 분이 아니었습니까?
그렇지 않죠.
베드로에게도 예수님은 마치 굉장히 필요한 분 같았지만 죽음의 위기가 찾아왔을 때에는 주저없이 모른다고 하고 저주하고 맹세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에겐 예수님이 필요하긴 필요했죠.
죽음의 위기가 없을 때 말입니다.
자신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자신의 꿈을 이루어 주시는 분으로서 예수님은 정말 쓸모있는 가치 있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들이나 성전 맡은 자들이나 헤롯, 본디오 빌라도, 민중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유익을 가져다 준다면 굳이 예수님을 죽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죽입니까?
천지 예수님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이 땅을 사는데 눈꼽만큼도 도움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굳이 예수님을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오히려 예수님은 이들에게 걸림돌입니다.
쓸모없다 필요없다 정도가 아니라 이들의 약을 바짝올리는 분입니다.
이들의 자존심을 살짝 살짝 건드립니다.
그들이 최고로 여기는 것들을 여지없이 무시해 버립니다.
그들의 경건한 삶을 부정해 버립니다.
그들의 율법준수를 부정해 버립니다.
오히려 이것들이 죄라고 규정합니다.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위태위태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인기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예수님 자신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믿음도 예수님이 직접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할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인간에게 나오는 것은 모든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피와 살을 먹고 마셔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도움 안되는 예수님입니다.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기적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실 때에는 쓸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신 것이 결국은 예수님 자신 만이 구세주임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죽은 자 살림도, 병고침도, 능력 행함도 자신들이 땅에 살면서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자신들에게 직접적 도움을 준다면 문제가 없지만 갑작 스럽게 자신의 피와 살을 먹고 마셔야 영생이 있다고 하십니다.
또한 이런 능력행하심도 한결같이 자신들이 터전을 삼고 있던 세계를 부정하는 식으로 하시니 가만 둘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죽여야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라는 집단이 너무 이상합니다.
왜 그렇게 예수님을 환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이유가 다릅니다.
마치 예수님이 살아 계시지 않다는 듯이 자신들이 원하는 예수님 상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자신들의 체제를 지지해주는 예수님.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 주는 예수님.
사람들 사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예수님.
돈 벌게 해 주는 예수님.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시는 예수님. 본이 되는 예수님.
참으로 예수님은 인기가 많으십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실제 예수님은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을까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요즘 사람들이 더 착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심을 믿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 상을 인간들이 원하는 상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생각지 않습니다.
너무 너무 귀한 돌로 여깁니다.
인간세상에 너무나 필요한 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우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우상이 되어버린 세상.
어디서 많이 보던 현상 아닙니까?
예수님 당시나 구약성경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우상 하나님으로 만든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름만 이야기 하면 다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분명 다른 일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런 구원을 주신 분이 어떤 분이라는 것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건축자들의 버린 돌의 의미를 담지 않은 예수님 이름은 가짜라는 말입니다.
건축자들이 쓸데 있다. 정말 요긴하다고 여기는 돌로서의 예수님은 가짜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저에게 이렇게 반박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분명 병자를 고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병이 고쳐진 것이 분명 사람들에겐 유익하지만 죄가 용서되지 않고 구원이 되지 않는다면 병고침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바로 병 고침을 받아도 지옥 갈 뿐임을 보여주는 의미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병 고침이 인간에게 유익한 일입니까?
믿음이 없는 인간은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세계밖에 볼 수 없습니다.
믿음의 세계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현상에 대해 자꾸 유익하다 유익하지 않다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사도들은 계속해서 핍박을 당하지 않습니까? 이것도 유익하다고 볼 수 있습니까?
이들이 병을 고쳤기 때문에 핍박을 당합니까?
그게 아니죠.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를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정말 쓸모 없는 자, 제거 되어야 할 자로 보여졌기 때문에 사도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병을 고쳤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도들을 핍박하거나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 인간들에게 거슬리는 복음,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을 전했기 때문에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20장29-3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흉악한 이리의 특징은 양떼를 아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양떼를 아낀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로 주님의 피를 양떼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흉악한 이리는 양떼를 아끼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피를 빼버립니다.
주님의 피를 빼버리면 결국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합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이야기 하죠.
당연히 합니다. 아니 더 많이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본 모습을 숨길수 있죠.
그러나 주님의 피를 빼버립니다. 왜 주님의 피를 빼 버릴까요?
그래야 사람들에게 유익한, 사람들이 받아 들일 만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까요.
주님의 피를 이야기 하면 인간을 부정해야 하고, 인간 사는 세상을 전면 부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의 피를 전혀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는 하죠. 그러나 주님의 피가 인간세상을 전면 부정하는 것으로서의 피가 아니라 인간 세계를 다시 전면적으로 인정해 주는 피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되지 않지요.
정말 머릿돌이 되지요.
자신들이 알아서 예수님을 귀한 머릿돌로 인정해 주어야 자신들의 정체를 숨길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흉악한 이리가 하는 일입니다.
왜 꼭 다윗이어야 하는가?
왜 꼭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어야 하는가?
십자가는 통과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훨씬 인간들에게 먹혀 들어가지 않는가?
이것이 흉악한 이리가 전하는 거짓복음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끊임없이 세바와 같은 반역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왜 꼭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말해야 하는가?
우린 부활한 주님을 이야기 하자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하고 인정할 만한 사람의 복음을 전하자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