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세이

스가랴 강해 2

푸른 섬 2010. 11. 1. 21:10

다시 택한 예루살렘

스가랴1장7-17

얼마 전에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투루판이라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아주 먼 곳 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5시간 이상을 가야 하는 곳이지요.

 

중국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위치한 작은 도시입니다.

이곳은 과거 실크로드 여행의 거점도시입니다.

 

위구르어로 깊게 파인 땅이라는 뜻을 가진 곳인데

 수면보다 평기가 낮아 독특한 풍광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이곳은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습니다.

예로부터 불의 땅이라 불렸답니다.

 

투루판은

서유기에서 삼장법사 일행이 화염산의 불길 때문에

 고초를 겪는 사건의 무대로 등장할 만큼 예부터

 무더운 지역으로 유명한 곳이랍니다.

 

실제로 화염산 입구에 가보니 쫌 더웠습니다.

 초가을에 갔는데도 온도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그런데 습도가 거의 없으니 고온임에도 불구하고

그늘에만 들어가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곳을 여행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포도농사에 관한 것입니다.

포도밭으로 들어가 보면 먼지가 폭딱폭딱 납니다.

그만큼 건조하다는 말입니다.

 

1년 강수량이 10mm 리가 안 되는 척박한 땅에서

 포도농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포도가 얼마나 맛있는지, 또한 씨도 없고 말입니다.

 

또한 그렇게 큰 포도나무는 처음 보았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가?

 

그것은 지하 인공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함으로

척박한 땅을 푸른 초원으로 만들었답니다.

 

감아정이라 불리는 인공수로는 지하의 수맥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수직의 우물을 파고 그 우물의

밑바닥을 파고 그 우물의 밑바닥을 서로 통하게 하여

산 위 눈 녹은 물이나 지하수를 유입시켜 관개에 이용했답니다.

 

신장에는 감아정이 1600여개나 있는데

투루판 분지에 1300여개가 집중되어 있답니다.

총길이는 5000킬로미터가 넘는답니다.

 

황하의 길이와 거의 비슷하며, 베이징-항조우 대운하

 3200킬로미터보다 더 길다고 합니다.

 

약2000여년 전 한 나라 때 감아정이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수나라 때에는 실크로드를 따라

건설되어 중앙아시아까지 확대되었답니다.

 

만리장성, 경항대운하, 그리고 감아정이 고대 중국의

 불가사의한 3대공사중 하나랍니다.

 

사람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아무 쓸모도 없고 도무지 사람도 살수 없는 곳을

푸른 초원으로 만들어 내니 말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들을 보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가 없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땅을 파고 들어가 땅 밑으로 수로를 만든다.

살기 위해 하는 인간의 의지력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 기술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들은 그야 말로 땅의 일입니다.

 

놀랍지만 인간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요.

 

누가 감히 하늘에 떠 있는 달에 사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겠지요.

 

한국 사람들은 그곳에 계수나무가 있고

토끼 두 마리가 절구방아를 찧고 있다고 상상하며,

 신이라 여기며 기도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러한 곳에 사람이 발을 내딛었습니다.

사람이란 이렇게 대단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주님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사람의 상상과 능력이

 이렇게 대단한데 주님의 나라라는 것이 눈에 들어 올 리가 없습니다.

 

즉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는 것도 끝이 없는데

 무슨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갖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위대한 문화유산을 만들면 무엇합니까?

 

그 만든 것은 누가 누립니까?

그 다음 세대. 그 다음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가 그곳을 차지해 버리지요.

그러면 그러한 문화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입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돈벌이만 될 뿐이지요.

아니만 그곳을 차지한 나라의 자랑거리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만든 세대는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전도서6장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음으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명이로다"

 

이 말씀에 의하면 심령의 모든 소원대로 감아정을 파서

 척박한 땅을 옥토로 만들게 하신 분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것을 몰라요.

인간들은 자신의 능력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주님께 감사가 없어요.

척박한 땅을 주신 것도 주님이시고,

 산위의 만년설을 주신 것도 주님이시고,

 땅속의 물을 주신분도 주님이신데 그것을 알지 못해요.

 

그러니 자신들의 생존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6장7절을 보면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죽음을 무릅쓰고 물길을 만들어 농사를 짓는 것도

그 입을 위한 것뿐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좀 짜증나지 않습니까?

위대한 문화유산을 기껏해야 그 입을 위한

것이라고 폄하해 버리시는 주님.

전도서 1장으로 가봅시다.

 

2절에서11절을 봅시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니라"

 

이렇게 말하면 당장 이전 세대를 우리가

기억하잖아요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얼 기억합니까?

자기들 입장만 생각해서 이전 세대를 이용해 먹을 뿐이지요.

 

특히 해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가 자기에서

 무엇이 유익하냐는 말씀을 생각해 보면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에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흙으로 돌아갈 때 해아래서 수고한 것이 과연 유익할까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해아래서 수고한 것이 어떤 요소로 작용합니까?

헛된 것으로 작용할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지혜자입니다.

 

헛되지 않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능력 만이 헛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지혜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사람으로서는 해볼 것 다 해본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의 그 모든 수고들이 헛됨을

전하는 자가 지혜자의 삶입니다.

 

지혜라는 것이 참으로 독특하죠.

 

그런데 참 지혜자 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니 어떻게 됩니까?

 

십자가의 피 능력만이 참 지혜이며, 너희들은

다 죄인이라고 규정해 버립니다.

 

인생의 삶이 헛되다는 것이 아니라 죄과

나은 배설물이라는 것입니다.

 

전도서에서처럼 인생이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면 좀 기분이 덜 나쁠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서가 전하는 참 지혜자 예수님이 오시니

인생이 헛되다는 것이 그냥 헛된 것이 아니라 죄를

보여주는 헛된 인생임을 밝혀버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서를 읽으면서 불교에서 말하는

공수래 공수거라는 말을 떠올릴 것입니다.

 

빈손으로 왔다고 빈손으로 간다는 말 말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 마는 힌두교에서도

이 땅의 삶을 허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치 다른 도 닦는 종교와 같이 기독교가 이해되어 질 수 있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삶이 헛되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삶이 죄인의 삶으로 가득차 있음을 확 들추어 내셨습니다.

상당히 기분 나쁘죠.

 

헛되다고 하면 이해가 됩니다.

젊어서 열심히 돈 벌어서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늙어마케 죽을 때가 가까웠을 때, 자식들도 오지

 않고 할 때 참으로 인생이 허무하구나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죽음을 앞둔 인간치고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인간 있겠습니까?

자식 키우고 돈 벌고 할 때, 힘 이 있을 때에야 이런 생각 안 듭니다.

잠시 잠간 들지 모르지만 금세 잊어버리지요.

 

그러나 힘도 없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인간에겐 삶은 허무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 전도서의 말씀이 아멘으로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님의 십자가가 확 밀고 들어 옵니다.

 

인생은 헛되다가 아니라 인생은 죄속에서 뒹굴던 삶이었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존심 확 상합니다.

 

죄라는 말은 지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천국과도 뗄래야 땔 수 없는 관계입니다마는.

 

죄라는 것이 언급되니 사람들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죽여야 합니다.

 

인생이 허무함을 알면서도 예수님을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피 공로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인생이 헛됨을 알면서도

 십자가의 피 공로를 의지하지 않을까요?

 

물론 주님의 성령이 없어서입니다.

 

이렇게 하면 정답이지요.

 

그러면 그 과정이 없잖아요.

 

그 과정을 살펴봅시다.

이들은 철저하게 해 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했죠.

 

이 말은 이들은 해 아래 땅위에 갇혀 사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해아래라는 말씀을 언급했다는 것은 해 아래를

벗어난 다른 세계가 있음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해 아래를 언급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며 헛되다로 세상은 끝나 버리겠지요.

 

지혜를 언급하시는 이유는 해 아래 세계가

아닌 다는 세계가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지혜의 세계, 지혜의 나라.

 

지혜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해 아래 사는 모든 것이 헛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혜의 나라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나라입니까?

그것은 간단하죠.

 

해 아래 모든 것이 헛됨을 고발하는 나라가 지혜의 나라입니다.

해 아래 모든 것은 지혜의 나라에 의해 움직이며 평가받습니다.

 

오늘 본문스가랴를 보게 되면 낯선 이야기를 합니다.

 

환상이야기를 합니다.

해 아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나라,

주님의 나라쪽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주님의 나라 이야기가

모두다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해 아래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냥 일어나는 것들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 쪽에서 조정해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말입니다.

참 허무하죠.

 

쉽게 말하면 지금 우리들이 각자 사는 것,

 어떤 나라는 부자고, 어떤 나라는 화산이

폭발하고, 어떤 나라는 가난하고, 어떤 나라는 콜레라가 발생하고 등등.

 

이런 모든 것들이 해 아래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들이 조종하시는 주님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말입니다.

 

한번 살펴봅시다.

 

8절에 보면 홍마 자마, 백마가 있습니다. 말의 색깔들이죠.

이들이 무엇이냐고 스가랴 선지자가 묻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이들이 땅에 두루 다니면서 뭘 합니까?

 

땅의 상황을 보고하죠.

"우리가 땅에 두류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온하고 정온하더이다" 11b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는 알아들으십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가 간구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지 칠십년이 되었나이다"

 

이에 여호와께서 선한말씀과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나라에서 결정된 사항이

이제 스가랴 선지자에게 전달됩니다.

14-17절입니다.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의 위하여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 하며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먹줄을 우리 어린이들이 잘 알지 모르겠습니다.

먹줄은 언제 사용할까요?

건축할 때 사용하는 도구가 먹줄입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해 아래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 해아래 상황은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해 아래서 주님의 결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나라 쪽에서 모든 것을 파악하고 기도하고

그 응답을 통해 해 아래 일들을 진행시키십니다.

 

물론 이 가운데 스가랴 선지가가 놓여 있어서 그 말씀을 전달하는 기능을 합니다.

지금은 성경말씀이 이 기능을 하고 있죠.

 

그러니 해 아래 일들은 그냥 저절로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예루살렘과 성전을 허무하게 만드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십니까?

 

왜 예루살렘을 버리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택하십니까?

그 이유에 대해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 솔로몬 성전이 허무하게 되었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왜 예루살렘을 버리셨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시 택하십니까?

 

그 이유는 긍휼이 무엇인지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12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이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았습니다.

 

심판의 과정을 겪은 후 긍휼이라는 카드를 통해 이들을 다시 택하십니다.

이들이 회개해서 착해서, 율법 지켜서 다시 택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 나라에서의 감찰과 간구와 응답을 통해 이 일들이 진행된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다시 택함을 입은 예루살렘은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그야 당연합니다.

 

우린 죄인입니다. 우린 오직 주님의 긍휼로 다시 택함을 입었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와야 되겠죠.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이유가 그렇습니다.

이것은 다 이미 주님의 세계 쪽에서 계획된 바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분이 주님이심을 증거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모든 사람을 헛된 인간으로 규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긍휼을 자기 백성들에게 베푸셨습니다.

이 긍휼을 입은 자가 성도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매일매일 살면서 무엇을 전할까요.

자신의 삶이 죄인의 삶임을 드러내면서 십자가의

 피 공로를 전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시 택함을 입은 예루살렘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피로 죄용서함을 받아 구원을

얻은 주님의 백성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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