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내가 거듭난 자 라고 굳게 믿고있었고 구원의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마치 그 믿음이 흔들리면 그것은 사단의 공격이라고 생각했고 “아니야, 믿음이 약해져서는 안돼. 더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묵상 하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하면 이러한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승리할수 있게되는거야.” 라며 나 자신을 훈련하며 살던 때가 있었다. “내가 어떻게 구원 받을수 있는가”가 내 신앙의 중심 이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구원을 위한 없어서는 안될 나의 소유물로 여겼던 것이다. 마치 천국행 티켓 정도 처럼. 그리고 그 구원을 사수하여 확실하게 내것으로 소유하기 위해 나는 어떻게 거듭날수 있는가 그리고 나의 거듭남을 어떻게 확인하고 확신할수 있는가 등이 나의 최고 관심사 였다. 그래서 본문같은 말씀을 읽으면 "아, 물과 성령으로 나면 거듭나는거구나.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 있으니 나는 거듭난 사람이구나" 라는 믿음을 가진 나는 담대했고 자랑스러웠다. 누가 내게 “너 그리스도인 이니?” 라고 물으면 나는 “그럼! 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이야!” 라고 자신있게 대답하곤 했다. “거듭남” 이라는 형용사가 그리스도인 앞에 반드시 붙어야 하는줄 알았다. 그냥 그리스도인, 그냥 성도는 무언가 모자라거나 빠진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배웠고 그래야 진짜인줄 알았으니까. 그래야 진짜 구원 받은 성도 인줄 알았으니까. 거듭난 내 자신이 사랑스러웠고 기뻤다.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열심히(?) 전도도 하고 살았다.
그러나 그런것들이 바로 내가 이 우주의 주인공 이었기 때문인것을 그땐 몰랐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었기 때문인것을 그땐 몰랐다. 구원과 영생은 천국과 함께 선물로 주시는것이니 받아 누려야 한다고 들었고 그것이 맞는줄 알았다. 나는 더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배웠고 그래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고 쉬지말고 기도해야 하는줄 알았다. 일단 나는 내 구원과 내 영생을 챙겨야 했으니까.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의 속내와 관심사를 이미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이 다르다는 것을 재차 밝혀주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본문을 읽으면서 느낀것은 예수님은 참으로 아리송한 말씀을 많이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데체 성령으로 난 사람은 어떻게 자기가 성령으로 난 것인지 알수있는지 명확하고 간략하게 말씀해주셨으면 좋으련만… 여기에서 나는 여전히 내 관심사가 나의 구원과 나의 영생에서 떠날수 없다는것을 부인할수가 없다. 내가 진정 그분을 알고있는가! 내가 진정 그분을 사랑하는가! 의 고민 보다는 내가 구원과 영생을 얻을수 있는가에 자동으로 더 관심이 간다는 것이다. 본문 말씀을 통해 또다시 나는 나의 구원과 나의 영생을 어떻게 하면 챙길수 있을까 하는 죄인으로 드러나 버린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너는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볼수있는 존재가 아님을 말씀하신다. 그 말은 우리는(인간은) 구원을 원한다고해서 얻을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애초부터 거듭남 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불가능 하다는 말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 생각난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 외에 우리는 하늘나라에 들어갈수 없는자들 임을 재차 밝혀주신다.
한 말씀이 눈에 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성령으로 난 사람은 그 바람 소리는 듣는다 하신다. 여기서 나는 그 “소리”라는 것에 연관 될법한 두가지가 생각났다. 한가지는 세례요한의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고, 또 한가지는 양치는 목자의 목소리다. 그 참 복음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아는자들.. 그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참 목자임을 아는 양무리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바로 그 소리를 듣는다는 말씀으로 이해해 볼수 있겠다. 성령으로 난 자들은 예수님의 주님되심을 말씀을 통해 듣고 믿는 자 들이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을 하시기 바로 전에 예수님은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하신다.
정리 해보자면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듯 하다, “니고데모야, 거듭나야 한다는 나의 말에 놀라거나 겁먹지 말거라. 너는 거듭날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잘 안단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내가 십자가에 들리는거야. 그리고 그것이 내가 너에게 나타내는 나의 영광이야. 그것을 아는 자가 영생을 사는거란다”.
인간의 관심사는 온통 자신들의 구원과 영생과 천국에 있고 그것들을 얻어내기 위한 방법들에 몰두되어 있다. 예수님은 영생이 있다 하신다, 구원이 있다 하시고, 하나님 나라가 있다 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함을 요한복음 시작부터 누누히 밝히고 계신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하나님의) 영광이라 하신다.
그 십자가를 나타내시기 위해 우리를(죄인을) 사용하시며 그 십자가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그것이 전부다. 그분의 영광 나타나심. 그것이 전부다.
나는 나의 구원이라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산다.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믿었고 구원을 위해 신앙생활을 했다. 내 인생을 나의 구원을 위해 살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문 말씀을 통해 나의 구원에대한 관심사를 계속 부수어 버리신다.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내 구원에대한 탐욕을 남겨둔다. 내가 바로 니고데모요 근심하며 가버리는 청년이다. 내가 눈떳다 하나 못보는 자요 잃어버린 양이다. 내가 아버지의 재물을 훔쳐 집 나간 그 둘째 아들이요 내가 아버지께 노하고 입이 한자나 튀어나온 그 첫째 아들이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질문을 했던 마태복음 19장에 등장한 청년(율법을 잘 지키고 살았던 바리새인 청년)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가(인간이) 스스로 구원 불가한 자들임을 밝히신다.
몹시 놀란 제자들이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라고 질문하자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태19:26) 하신다 (곁에 있었던 제자들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몹시 놀랬던 것으로 보아 제자들도 그 청년과 다를것 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이 엿보인다). 역시 다소 엉뚱하다 싶은 답변을 하신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듯 하다 “너희는 누가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라는것에 관심 두지마. 하나님 마음대로야!”.
나는 한때 내가 거듭난 자 라고 굳게 믿고있었고 구원의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마치 그 믿음이 흔들리면 그것은 사단의 공격이라고 생각했고 “아니야, 믿음이 약해져서는 안돼. 더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묵상 하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하면 이러한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승리할수 있게되는거야.” 라며 나 자신을 훈련하며 살던 때가 있었다. “내가 어떻게 구원 받을수 있는가”가 내 신앙의 중심 이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의 구원을 위한 없어서는 안될 나의 소유물로 여겼던 것이다. 마치 천국행 티켓 정도 처럼. 그리고 그 구원을 사수하여 확실하게 내것으로 소유하기 위해 나는 어떻게 거듭날수 있는가 그리고 나의 거듭남을 어떻게 확인하고 확신할수 있는가 등이 나의 최고 관심사 였다. 그래서 본문같은 말씀을 읽으면 "아, 물과 성령으로 나면 거듭나는거구나.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 있으니 나는 거듭난 사람이구나" 라는 믿음을 가진 나는 담대했고 자랑스러웠다. 누가 내게 “너 그리스도인 이니?” 라고 물으면 나는 “그럼! 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 이야!” 라고 자신있게 대답하곤 했다. “거듭남” 이라는 형용사가 그리스도인 앞에 반드시 붙어야 하는줄 알았다. 그냥 그리스도인, 그냥 성도는 무언가 모자라거나 빠진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배웠고 그래야 진짜인줄 알았으니까. 그래야 진짜 구원 받은 성도 인줄 알았으니까. 거듭난 내 자신이 사랑스러웠고 기뻤다.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열심히(?) 전도도 하고 살았다. 그러나 그런것들이 바로 내가 이 우주의 주인공 이었기 때문인것을 그땐 몰랐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었기 때문인것을 그땐 몰랐다. 구원과 영생은 천국과 함께 선물로 주시는것이니 받아 누려야 한다고 들었고 그것이 맞는줄 알았다. 나는 더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배웠고 그래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고 쉬지말고 기도해야 하는줄 알았다. 일단 나는 내 구원과 내 영생을 챙겨야 했으니까.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의 속내와 관심사를 이미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이 다르다는 것을 재차 밝혀주신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본문을 읽으면서 느낀것은 예수님은 참으로 아리송한 말씀을 많이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데체 성령으로 난 사람은 어떻게 자기가 성령으로 난 것인지 알수있는지 명확하고 간략하게 말씀해주셨으면 좋으련만… 여기에서 나는 여전히 내 관심사가 나의 구원과 나의 영생에서 떠날수 없다는것을 부인할수가 없다. 내가 진정 그분을 알고있는가! 내가 진정 그분을 사랑하는가! 의 고민 보다는 내가 구원과 영생을 얻을수 있는가에 자동으로 더 관심이 간다는 것이다. 본문 말씀을 통해 또다시 나는 나의 구원과 나의 영생을 어떻게 하면 챙길수 있을까 하는 죄인으로 드러나 버린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너는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볼수있는 존재가 아님을 말씀하신다. 그 말은 우리는(인간은) 구원을 원한다고해서 얻을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애초부터 거듭남 이라는 것이 우리에게는 불가능 하다는 말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 생각난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 외에 우리는 하늘나라에 들어갈수 없는자들 임을 재차 밝혀주신다. 한 말씀이 눈에 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성령으로 난 사람은 그 바람 소리는 듣는다 하신다. 여기서 나는 그 “소리”라는 것에 연관 될법한 두가지가 생각났다. 한가지는 세례요한의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고, 또 한가지는 양치는 목자의 목소리다. 그 참 복음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주님 되심을 아는자들.. 그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참 목자임을 아는 양무리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바로 그 소리를 듣는다는 말씀으로 이해해 볼수 있겠다. 성령으로 난 자들은 예수님의 주님되심을 말씀을 통해 듣고 믿는 자 들이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을 하시기 바로 전에 예수님은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하신다. 정리 해보자면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듯 하다, “니고데모야, 거듭나야 한다는 나의 말에 놀라거나 겁먹지 말거라. 너는 거듭날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내가 잘 안단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내가 십자가에 들리는거야. 그리고 그것이 내가 너에게 나타내는 나의 영광이야. 그것을 아는 자가 영생을 사는거란다”. 인간의 관심사는 온통 자신들의 구원과 영생과 천국에 있고 그것들을 얻어내기 위한 방법들에 몰두되어 있다. 예수님은 영생이 있다 하신다, 구원이 있다 하시고, 하나님 나라가 있다 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져야함을 요한복음 시작부터 누누히 밝히고 계신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하나님의) 영광이라 하신다. 그 십자가를 나타내시기 위해 우리를(죄인을) 사용하시며 그 십자가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그것이 전부다. 그분의 영광 나타나심. 그것이 전부다. 나는 나의 구원이라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산다.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믿었고 구원을 위해 신앙생활을 했다. 내 인생을 나의 구원을 위해 살았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문 말씀을 통해 나의 구원에대한 관심사를 계속 부수어 버리신다.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내 구원에대한 탐욕을 남겨둔다. 내가 바로 니고데모요 근심하며 가버리는 청년이다. 내가 눈떳다 하나 못보는 자요 잃어버린 양이다. 내가 아버지의 재물을 훔쳐 집 나간 그 둘째 아들이요 내가 아버지께 노하고 입이 한자나 튀어나온 그 첫째 아들이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는 질문을 했던 마태복음 19장에 등장한 청년(율법을 잘 지키고 살았던 바리새인 청년)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가(인간이) 스스로 구원 불가한 자들임을 밝히신다. 몹시 놀란 제자들이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라고 질문하자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마태19:26) 하신다 (곁에 있었던 제자들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몹시 놀랬던 것으로 보아 제자들도 그 청년과 다를것 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이 엿보인다). 역시 다소 엉뚱하다 싶은 답변을 하신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듯 하다 “너희는 누가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라는것에 관심 두지마. 하나님 마음대로야!”. 예수그리스도 안에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고 하나님 나라가 있다. 나는 내 구원과 내 영생을 얻어내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만 하고픈 속내가 있다. 선물로 주신다 해서 뛸듯이 기뻤는데 나를 위한 그 선물을 사랑하는 나를 보았다. 그 죄가 드러난다. 그런데 끊임없이 그분의 보혈에 덮힌다. 나는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계속 죄인으로 드러날 뿐인데 아니 더 교활하고 끈질긴 죄인중에 괴수로 드러날 뿐인데 그분의 십자가는 끊임없이 나를 덮는다. 도데체 이해할수 없는 일이다. 그런 그분앞에 나는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릴 뿐이다. 내가 구원과 영생을 얻었다고 날뛸것도 아니요 자랑할것이 아니다. 구원과 영생은 그분 안에 있는 신비함이지 나의 소유물이 아니다. 거듭남도 내가 사유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그분의 일하심이 너무나 신비하고 기이한 것임을 인식할뿐이다. 말씀과 나의 삶을 포함한 이 역사를 통해 여전히 예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있는 나의 죄인됨을 발각 당하며 그 위에 덮히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깊이 알고 싶을 뿐이고 더 깊이 알면 알수록 그분을 향한 나의 심장은(사랑은) 굳어있음을 인식하며 오직 그분의 긍휼만 구하는 자리에 있을 뿐이다. 베드로의 고백이 생각난다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21:17). 그래서 그분의 십자가와 주님되심을 고백하지 않을수 없다. 성도의 자랑은 오직 그분의 십자가 보혈과 그분의 주님되심 일수밖에 없다.
이 글은 우리가락교회 성경공부란의 이원석 성도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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