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중세철학
질문: 예배
학자들은 유월절 중심의 제사가 나중에 초대교회에서는 성만찬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유월절 제사가 성만찬으로 바뀐 게 아닙니다. 유월절 자체를 예수님이 완성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기념하는 그 관례, 관습에 대해서 그들은 버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성만찬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성만찬을 통해 예수님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만찬보다도 그 예수님에 관한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사도 바울 더 후대에 들어가면, 사도 요한에 들어가면 사랑과 말씀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하게 됩니다.
따라서 성만찬이라든지 세례의식이라는 것이 정기적으로 됨으로써 관습화 되어버립니다. 그것이 그전까지 일시적으로 정해졌지만 그걸 하든 안 하든 관계없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 쪽으로 나갑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고. 사도 바울도 내가 세례 주러 온 것도 아니고 성만찬 하러 온 게 아니고 바로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했거든요.
나중에 사도 요한이 되면 교회 내에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형식은 유사하고 똑같은데 복음이 달라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 같은 경우에는 더 중점적으로 교회 어떤 제사 형식을 취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교회 내에서 다른 복음이 전파되느냐 그 문제를 중점으로 말합니다. 또 나아가서 교인들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살 것이냐 그 문제에 더 치중하면서 요한계시록 같은데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세 철학-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학화한 것이 바로 중세철학이다, 중세신학이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서 그 당시 신학을 한 사람들 같으면 대단히 기분 나쁘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복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모르지만 복음을 빼놓고 나머지는 다 옳은 소리를 한 사람이니까 자신들은 우리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를 가지고 신학을 정리했다. 이렇게 말해다오. 아마 그들은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부터 출발합니다.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라는 것은 있다, 있음. 있음이라고 하면 뭘 묻겠습니까? 왜 있느냐? 이걸 목적인. 어떻게 있느냐? 이걸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인. '인'이라 하는 것은 원인. 그 다음에 존재가 무엇을 보여주느냐? 이걸 형상인.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느냐? 이걸 질료인. 이 질료인 하니까 질료라는 말은 현재 잘 안 쓰지요. 여러분들이 이해하실 때 이것은 그냥 기본 물질이라고 보면 돼요.
왜 있느냐, 어떻게 있느냐, 뭘 보여주느냐, 구성되어 있느냐?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에 대해서, 그 당시는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기 전의 상황이기 때문에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존재에 대해서 존재라는 것을 구성하기 위해서 이 4가지 요소에서만 구성하지 그 다음은 100% 없다. 이게 전부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학이라는 게 뭡니까? 자, 신학자가 뭐하는 거고, 그 당시 목회자들이 뭐하는 거예요. 이거잖아요. 자기가 이제 복음을 알았다, 또는 예수님을 알았다, 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았다.
참고적으로 중세철학은 삼위일체 이후입니다. 중세사회에 대해서 어두운 사람은 도대체 이게 어느 정도인지 왜 그런지 진짜 암흑시대라고 하니까 공부도 안하고 암흑시대라고 해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은 강조가 안 돼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은 나중에 근세철학에 와서 목적이 되어 있습니다. 이게 나중에 목적인은 누가 증명하는가? 증명하는 신학으로 들어가 버려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왜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있는가? 천지창조, 무에서 창조했기 때문에. 무엇을 보여 주느냐? 하나님의 형상을 진흙에서 거기다가 하나님이 훅 불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겼다.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하나님이 주신 흙으로 만든 인간의 육체로 되어있다. 4가지 다 설명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내용을 어디의 존재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과 결합을 시키니까 완벽한 신학이 되어 버렸어요. 완벽한 신학이 툭 튀어나와 버렸다고요. 그런데 이것은 성경에 있는 내용을 조직신학의 고속도로 나와 있는 것처럼 지금 하나님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뭘로 접근한다? 존재로 접근하고 나, 혹은 다른 인간에 대해서도 뭘로 생각하고 존재로 생각하니까 그 사이에 뭘 집어넣습니까? 성경을 집어넣어서 이런 신학으로 신을 만들어 버린단 말이죠. 그리고 이것을 가르치면 돈 받아먹는 목사의 생계가 보장 됩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질료로 들어와서 형상으로 되어 있다. 이 질료를 가지고 육이라 하고 근육이라 하고 형상을 가지고 영혼이라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을 영혼과 육으로 된 이분설이라고 합니다.
그걸 그대로 받은 사람이 루터와 칼빈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그전에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어거스틴이고. 어거스틴은 어디서 나오느냐? 플라톤의 형상론에서 나오죠.
이러한 플라톤의 형상론하고 플라톤의 존재론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하고 약간 차이나요. 차이나는 게 뭐냐 하면, 플라톤은 인간의 존재, 이걸 허상으로 봤어요. 가짜. 왜 가짜로 봅니까? 진짜 맞는데.
플라톤은 아주 생각이 깊은 사람이에요. 뭐냐 하면, 인간이 있나, 없나? 인간이 있지. 아니지. 그것은 철수가 있나, 없나? 철수가 있지. 아니지. 김철수는 김철수지 인간이 아니지. 인간은 어디 있느냐 하면, 김철수, 이영희, 최병덕, 이런 사람들, 유사 인간들을 모아서 인간이라는 개념을 형성한 거예요.
칸트에는 뭐가 있느냐? 인간의 있음은, 인간의 존재는 인간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인식한다는 그 인식론 안에 존재가 있습니다. 인식론 안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주체 안에 존재. 존재라 하는 것은 주체 안에 존재가 있어요. 나중에 이게 또 주체 안에 존재가 개인이 아니고 나중에 뭐로 바뀌느냐 하면, 역사 안에 존재. 역사 속에서 존재해요.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여리고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홍해가 갈라진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이러한 현대철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불트만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적으로 되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칸트 이후에 존재라 하는 것은 계속해서 인식되어야 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인식된다는 말은 미래에도 과거에 일어난 일이 같은 법칙 하에서 일어나야 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은 그때뿐이에요.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과거에 있었더라도 지금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지금은 유용성이 없고 의미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경우에 인간을 무어으로 되어 있다? 인간은 형상과 질료로 되어 있고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로서 인간의 형상으로 화된 하나님의 형상의 어떤 일부. 그러니까 먹구름이 하늘에 있다가 지상으로 내려오면 뭐가 됩니까? 비가 되지요. 그러니까 우리 가슴을 적시는 빗물은 하늘에 있는 먹구름이라는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는 빗물이 되어서 녹아들 때 우리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온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귀한 형상을 갖고 있는 나의 존재성은 뭐가 됩니까? 곧 나는 신성이 되겠죠. 이게 성화론입니다.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것을 건드리지 말자. 그리고 그것을 점점 더 키워나가자.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존재론은 degree of being이라고 합니다. 이걸 쉽게 이야기하면, 존재는 다 있으니까 어떤 존재냐 하는 거예요. 존재의 가치가 존재할만한 가치가 많이 있느냐, 없느냐? 이걸 70점, 60점, 50점 이렇게 점수를 매겼어요. 누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데 오늘날 성화론이 뭡니까? 당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많이 입으면 80점, 90점 되고 없으면 10점, 이렇게 되잖아요.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쁘다가 아니라 같은 인간이니까 뭔가 통하는 게 있는 거예요. 복음을 모르는 인간들은 뭔가 통하는 게 있어요. 존재의 승격화를 위해서 자기의 수준을 높이자! 이 두꺼운 성경책을 백 번을 보고 새벽마다 몇 번을 해도 관계없고 성경을 아무리 봐도 성경책 탁 덮고 결국 정립된 것은 뭐냐 하면, 나의 존재의 질을 높이자. 탁, 그거 하나 아는데. 그게 기독교 들어오기 500년 전에 이미 여기 아리스토텔레스가 벌써 다 정리를 해 논 거예요.
영혼을 만약에 불멸로 만들어 놓으면 실체는 어디 있나? 개인만 덜렁 떠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신이 뭘 만들어 놓았어요? 신은 존재자를 만듦으로서 신이 존재함을 즉 자기를 뚜렷하게 나타냈더란 말이에요. 이게 오늘날 천문학의 마지막 결론이 이거에요.
호킹 박사의 천문학이 뭐냐 하면, 우주는 왜 있느냐? 인간들이 우주를 탐구하기 위해서 우주가 있다고 현대의 모든 천문학자들이 다 공통적으로 이야기합니다. 현대 물리학자 다 이야기하거든요. 아마 김영기 박사도 그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실제 신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 놨다는 거죠. 인간이란 존재를 통해서 인간은 뭐를 알 수 있다? 신을 알 수 있는 거예요. 이게 플라톤 사상입니다. (호킹 박사는 신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 플라톤 사상의 허점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했단 말이죠. 신은 인간을 만듦으로서 신이 있음을 알잖아요. 인간이 있으니까 신이 있다 말이죠. 신이 있고 난 뒤에 인간 없어도 된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갔다가 왔다가 도로 가도 됩니까, 안 됩니까? 이제는 인간 없어도 신이 있다고 주장하는 게 플라톤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처음에 신이 있는 게 인간이 있기 때문에 있다 하다가, 왜 이제 와서 인간 없애고 신 있다 하느냐, 왜 거짓말하느냐 따지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된 것은 이것은 안디옥신학이고,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은 이건 라틴신학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버리면 신은 어디 있어요? 사람 속에 있고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버리면 신은 따로 존재하고 육신은 따로 존재하고. 이러면 이건 두 신이 되어버리고 이건 신이 한 신이 돼버렸죠. 이것은 신은 따로 있고 여기는 사람이고 사람 속에 또 로고스와 신성이 있죠.
그래서 제일 처음에 나오는 아리우스주의가 안디옥신학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마리아의 아들이다. 그는 인간 중에 최고의 인간이지만 하나님하고는 격이 안 맞다. 요새 여호와증인하고 비슷하지요. 그래야만 구약의 단일신과 일치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니까 아타나시우스가 뭐라 반대했습니까? 만약에 예수님이 진짜 신이 아니라면 우리 구원문제에서 중간에 사다리가 깨져 버린다. 인간에서 나와서 신이 될 때 그게 도란스, 또는 직류를 바꾸는 전류를 바꾸는 인간으로 들어와서 신으로 나와야 되는데 만약에 예수님이 완전한 신성이 아니라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자체가 박탈당하죠.
아리우스나 안디옥신학은 예수님은 신은 아니지만 인간 중에는 완전한 인간이다. 따라서 모든 말씀을 이뤘다, 다 이루었다, 하면 그럼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꼭 신성시는 안 해도 인간 중에 완벽한 인간이라는 쪽으로 설명해도 되지 않느냐?
그러면 왜 이 논쟁들을 하는 거예요? 나란 존재를 제발 천당 좀 넣어줘. 종교의 임무, 그들은 말하기를 교회의 임무, 종교의 임무가 뭐냐 하면, 일단 점포를 내라. 프랜차이즈, 점포를 해 놓고 사람 많이 꼬셔서 천당 많이 보내 주면 하나님이 많이 기뻐하는 줄 알고 이게 교회의 임무인 줄 알고 있어요.
교회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세웠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면 끝나는데 그게 아니고 사람들 설득시켜서 천당 비어 있을까봐 천당 너무 비면 원래 영화관람 무대 해놓고 사람 없으면 썰렁하잖아요. 천국을 썰렁 않게 하기 위해서 애타는 심정으로 사람들에게 호소해서, 호소하면 먹어준다는 거예요. 성령이 아니고 애끊는 호소력으로 설교하면 감동감화 받아서 신자 된다는 거예요. 그들이 필요한 게 뭐냐 하면, 신자 되고 싶잖아요. 그러면 아까 존재의 디그리, degree of being, 존재의 정도에 따라서 점점 해주면 설득해서 그들로 하여금 구원할 수 있다. 이게 뭐냐? 하나밖에 없는 천국에 다양성,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라 이렇게 보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