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세이

5. 영혼론 1

푸른 섬 2011. 9. 30. 23:45

5 영혼론1.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영혼의 본성을, 그리고 영혼이 물체적 세계와 맺는 관계를 새로운 시작으로 바라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선재한다고 믿지 않았으며, 또한 이데아가 물체 없이 나타난다고 믿지 않았다.]

그러니까 영혼이라는 것은 있는데, 그것은 원래 없는데 물질이 생기면 거기에 영혼이 달라붙어서 생겨난다 이 말이에요. 만약에 예를 들어서 구원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할 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봤습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언제 창조하느냐 하면, 우리 아기 몸이 태어날 때 그때 영혼이 같이 창조한다는 겁니다.

어거스틴 같은 경우에는 영혼창고가 있어서 일단 영혼창고가 있는데 그것은 아담으로 내려오는데 아기가 자기의 신체가 생길 때 그 영혼창고에서 일부가 여기에 첨가됨으로 말미암아 영혼+육체가 돼서 사람이 된다는 거죠. 하나는 선재설이고 하나는 창조설이죠. 그렇게 되지요.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문제점은, 만들 때는 영혼이 안 만들어졌지만 그럼 물질이 없으니까 죽을 때도 같이 날아가지 않느냐? 물질이 없는데 영혼도 없으니까.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죽을 때 영혼이 같이 날아가 버리니까 영혼이 없다고 보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생긴 영혼은 이게 죽더라도 영혼은 계속 영원토록 남아 있다는 거죠. 그런 차이점이 있어요. 어느 것이 마음에 드는지 여러분 마음대로 골라잡으면 돼요.

생길 때는 영혼이 없다가 인간이 생길 때 하나님이 같이 영혼을 창조해서 집어넣는데 일단 사람이 되고 난 뒤부터는 사람의 육체가 소멸돼도 영혼은 딴 데다 따로 존재해야 된다는. 왜냐하면 영혼이라는 것은 사람이 그동안 자기가 살아오면서 들었던 풍월이라든지 들었던 감각, 이런 것들을 집대성한 거예요.

[기독교 신학도 역시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비질료적이고, 비물질적이어서 모든 질료적 존재자들보다 탁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서 오리겐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따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존재이지만 존재의 피안이다. 이는 흡사 하나님이 누스(정신)이지만 우리 이성의 피안에 있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출애굽기 3장 14절을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한 것이라고 본 것처럼, 하나님이 존재 자체라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나지안즈 그레고리우스는 후에 하나님은 시공간적으로 유한한 만물과 달리 무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해명했다. 이것은 곧 그의 동생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주장했듯이 신적인 본질의 고유한 차이점은 하나님의 무한성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여기에 '무한성'하고 '피안에 있다'하고 여러분, 같은 말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피안에 있다'하는 것은 현재 우리 눈, 우리 이쪽에는 안 계시다는 뜻이고, '무한'이라 하는 것은 어디에도 계신다는 뜻이에요. 그 차이점이 있지요.

우리 인간 동네에는 하나님이 개입하겠나, 하나님은 거룩한 영적인 분이고 우리는 더러운 물질적인 분인데. 라고 생각하는 것은 피안에, 저쪽 세계에 있는 것이고, 무한하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을 전부다 담아낼 수 있다 이 말이에요. 포괄한다 이 말이에요.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만약에 인간이 죽어도 어디 품안에 있습니까? 인간이 죽어도 하나님 품안에 있겠죠. 하나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고. 하나님 손아귀를 피할 자, 벗어날 자가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뭐가 문제겠어요? 만약에 하나님이 저쪽 세계에 있다고 한다면, 이쪽 세계 훌훌 털어버리고 저쪽 세계 가면 되지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면 어디로, 어디로, 갈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필요가 없지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떠나서 간다. 라는 그런 성경구절이 있고, 또 성경에 보면,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의 안에 있다. 이렇게 되어 있다 말이지요. 어느 쪽을 선택할 거예요. 어느 쪽을 골라잡을 거예요.

[인간은 성경의 창조기사(기록)에 따라서 몸과 영혼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혼만으로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옛날부터.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만으로, 영혼만으로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그러면 영혼만 갖고 있는 인간은 생각을 완전히 못한다는 말입니까? 그게 또 골치 아픈 거죠.

만약에 육체가 없어서 부족을 느낀다면 그러면 천사하고 인간하고 누가 너 낫느냐? 이 말이에요. 사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천사보다 더 낫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세상에 보면 천사보다 못하지요. 천사가 베드로 감옥에 있을 때 왔다 갔다 했는데 우리는 3차원 공간 때문에 감옥 뚫지를 못하잖아요. 천사가 와서 깨워서 옥문을 와장창 지진이 일어나서 깨뜨리고 빼내 줄 때 과연 그것이 우리보다 못하다고 볼 수 있느냐?

[영혼만의 불멸성은 하나님이 인간을 영혼만으로 창조하지 않았듯이 참된 인간 구원이 아닐지도 모른다.]

따라서 영혼만 구원되는 것은 온전한 구원이 아니고 미흡한 구원이다 말이죠. 뭣을 곁들어야 됩니까? 육체를 곁들일 때 다시 그때 비로소 영혼과 육체가 하늘나라 결합해서 온전한 영혼이 된다.

[인간을 몸과 영혼의 단일성으로 본다는 것은 철학적으로 우선 영혼을 동물적인 육체의 형상으로 생각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 유사하다. 이 영혼은 이 '형상'을 통해서 분리시킬 수 없는 단일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혼론과 대비해 본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 영혼이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 자립적 형상이라고 한다.]

여기서 '자립적 형상'이란 말이 상당히 중요해요. 그냥 형상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타인, 다른 사람과 유사성이 있게 돼요. 유사성이 있게 되고, 그 사람한테 일어나는 것은 독특한 것이 아니고 나한테 일어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에 자립적인 형상이 돼버리면 그 사람에게 있던 그러한 모든 일들은 절대로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지요. 왜? 따로따로 노니까.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죄인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명의 가치가 남게 되는 거예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자립적이라는 말은 구원은 개별 구원이라는 거죠. 개별 구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예요. 개별적으로 구원받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한 신학적인 근거로서 개별적 형상으로 단독적으로 하나님과 형상 대 형상으로 관계해야지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이전까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다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 우리는 아담의 형상을 입었다. 따라서 우리 서로 협력하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이렇게 두리 뭉실, 협력이 가능하고 일치가 가능한 쪽으로 이야기했어요. 그렇게 되면 내가 저 사람을 위해서 뭔가 도움 줄 수 있고,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뭔가 보탬이 될 수 있는 이런 게 있는데 그 사람이 농땡이 치더라도 다른 사람이 기도하면 뭔가 효과 보고, 라는 그런 조로 말이죠. 왜냐하면 그 당시는 플라톤주의기 때문에 인간의 형상이라는 것은 니나, 개나 똑같다. 이 말이죠. 다 같은 공통의 형상이 있으니까.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동일함이다. 이것이 유리된 것뿐이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형상이 덩어리가 있는데 쪼개어 진 게 아니고 어떻게 된다? 각자각자 따로 있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따로 줬다는 거예요. 이런 것들이 다 구원관과 연관이 있겠지요.

일반교인들이 좋게 말해서 순진한 것도 있지만 자기 구원을 확정하기 위해서 세세한 것 다 따진다고.

내가 구원받고 난 뒤에 다시 범죄하면 그게 다시 철회되는 겁니까? 취소되는 겁니까? 그러면 취소 안 된다면, 어떤 범죄는 취소되고, 어떤 범죄는 취소 안 되는 겁니까? 라든지. 목사님, 구원받았다고 확신했는데 저녁 5시 반 때에 확신이 사라졌는데 확신이 사라질 때 과연 그때 당장 예수님이 재림한다든지 내 목숨 달라고 했을 때는 나는 과연 확신 없는 채로 천당 갈 수 있겠습니까? 이런 문제. 그런 문제를 일일이 하나하나 그런 것은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이야기고, 저쪽에서는 심각한 문제거든요. 개인적으로 봐서는. 중요한 문제 아닙니까? 그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이게 누적이 되면서 그런 호기심과 그런 질문들이 누적이 되면서 교회가 총괄적으로 답해 줄 필요가 있단 말이에요. 그때는 아주 형이상학적으로 높은 자리에서 전부다 설명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이 뭉쳐져 있다가 각자각자 흩어졌다 이 말이에요. 이렇게 설명하면 뭐가 유리합니까? 교회여, 서로 봉사하라. 서로 협력하라. 그래서 둘이 같이 기도할 때는 하나님이 거기 계시고, 합심해서 기도하면 같은 형상이기 때문에 ... 이게 유리하지만 이건 이렇게 개별적 영혼이 유리한 것은 뭐냐 하면, 내 구원론은 내가 챙겨야 된다 말이지요. 내 구원은 내가 챙겨야지.

그리고 또 뭐가 유리하냐면, 내가 비록 이발사가 돼든, 농부가 돼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주신 고유한 하나님의 사명이 있습니다. 라는 칼빈의 소명론과 여기에 유리하겠지요. 칼빈의 소명론. 남의 직업을 부러워하지 말란 말이야. 남의 환경을 부러워하지 말란 말이야. 남의 인생을 부러워하지 마라. 그리고 본받자, 하지 마라. 나는 나에게 개별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형상은 따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칼빈의 소명론에도 이 점이 유리하단 말이죠.

[토마스가 영혼의 자립성을 논증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은 존재인 만큼 현실성을 지니며 또한 행위 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행위 한다는 것이고 또한 행위를 위한 것이다.]

무슨 뜻이냐 하면, 각자각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다는 거죠. 해야 될 일이 있고 이유가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은 하나님, 하나님 빙자하면서 주신 그 사명을 감당 안하고 그걸 나태하게 내팽개치고 돌보지 않는 자기 사명을 감당치 않는, 그렇게 되면 그 영혼은 자기 영혼을 자기가 망치는 짓이 되는 거죠. 내가 안 해도 남이 하는데 뭐. 하나님이 형상이 여러 갈라져 있으면 뭐, 내가 안 해도 남이 하는데 성립되는데 그렇게 되면 인간은 농땡이 칠 가능성이 많다. 농땡이로 만들 수 있잖아요.

[행위는 존재를 따르며, 작용은 본질을 따른다.]

우리가 행위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이런 행위를 원하는 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행위 하잖아요. 아버지가 일하시니까 내가 일한다는 그런 조로 말이죠. 이제는 너희가 내 안에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처럼.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지금 행위 한다는 거예요. 행위 하는데 행위를 제대로 해야죠. 하나님이 나를 존재케 했던 그 행위가 내 존재를 통해서 행위로서 발산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행함이냐 믿음이냐? 이 문제를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로부터 해서 존재 자체를 뭐로 본다? 존재 자체를 하나님의 행위의 열매로 보기 때문에 믿음이냐 행위냐 하는 논제가 그 난제가 사라져 버리죠.

존재가 우선되면, 나가 우선되면 내가 믿을 것이냐, 행할 것이냐 이렇게 되지만, 나라는 것을 뭐로 본다? 원천적인 하나님의 행위로 봐 버리면, 행위에서는 행위가 보이지요. 하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내가 있고, 그래서 나는 존재했고, 따라서 하나님의 행위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마땅히 나에게서 하나님의 독자적으로 주신 남이 흉내 못내는 나만의 인생, 나만의 사명감이 행위로 나올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야고보서의 말이 맞죠. 행함으로 네 믿음을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 야고보서 다 풀려 버렸어요.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것은 악마의 믿음, 귀신도 안다는 거예요. 귀신도 하나님 존재를 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아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행동을 아는 것이 믿음이라고 보는 거지요. 하나님의 행동 때문에 내가 있고, 따라서 나는 하나님처럼 행동하게 되는 게 뭐가 어렵고, 뭐가 이상스럽냐 말이지요. 그럼 야고보서 다 풀려 버린 거예요. 그럼 로마서의 믿음은 뭐냐? 그것은 바로 행함으로 보여주는 믿음이지요. 여기에 어려운거 없잖아요.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말이에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행위,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자기를 존재케 하신 하나님을 위한 행위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행위라고 볼 수 없고,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볼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반드시 그 하나님의 행위에 따라서 존재해야 될 사명이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저주 받아 마땅하다 이 말이에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에 따르면 궁금한 것, 어려운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제가 볼 땐 그게 종교에요. 오늘 중앙일보에 보니까 이상적인 오늘날 이 시대에 참된 모범적인 교회 상이 나왔다. 이렇게 해요. 보니까 민중 신학을 이야기한 사람인데, 그 사람은 모든 교회를 가지고 전부다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서 500개의 문화센터를 운영한데요. 교회가. 문화센터 해서 진짜 바람직한 오늘날 교회 상이라고 중앙일보에서 칭찬을 늘어지게 해 놨다고.

야, 사람을 좋게 하려면 무슨 짓은 못해. 그래서 제가 왜 그 목사 이야기를 하냐 하면, 토마스 아퀴나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주교가 어떻게 포교를 합니까, 천주교가 어떻게 전도합니까? 바로 그 식이잖아요. 하나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다. 따라서 하나님 믿는 자도 행동한다. 어떤 행동?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럼 그 선한 행동을 우리가 보이자. 우리가 보이는 게 뭐냐? 질병으로부터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무지와 문맹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교육과 의료사업, 거기에 매료되어서 사람들로부터 좋은 인상을 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녀들과 이런 사람들의 월급부터 없애야 됩니다. 왜? 월급 받고 다하면 기업이 돼지, 자선사업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성직자들과 신부와 수녀들은 안 해야 되고, 수녀들이 여자야 얼마 안 되지만, 남자들은 가정 가지면 안 되니까 가정을 안 가지고, 아예 독신으로 살면서 성직자 노릇을 할 때 이것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장 하나님의 액션, 하나님의 행위의 바람직한 교회 상이 되는 거지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 그 당시의 중세 때 먹혀 들 수밖에 없어요. 둘 다 왜? 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 좋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거기에다가 반대할, 도와준다는데 뭘 반대해요. 착하지. 착한 하나님. 아주 선하시고 착한 하나님 아닙니까? 못된 하나님이 아니고, 착한 하나님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십자가라 하는 것은 선지자처럼 인간을 고발하는 건데 십자가가 확 빠져버렸으니까 그게 과연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고 했는데 복종할 복음도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그게 과연 바람직한 교회라고 할 수 있느냐 말이지요.

[그러므로 지적 작용의 주체인 인간 영혼은 본질적으로 비물질적이며 자립적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인간의 육체를 분명히 인간의 육체가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해 놓고는 심리적으로 모든 초점은 어디 입니까? 영혼에 집착했지요. 육체에다 집착한 게 아니고 영혼에다 집착한 거예요. 이것은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 당시 철학이 뭐냐 하면, 인간이 구원받는 데는 육체는 도움이 안 되고 영혼이 장려되고, 영혼이 계승되고, 영혼이 정화될 때 씻음 받을 때 비로소 인간은 구원된다. 그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인간 영혼은 그 자체로서 자립적 형상 혹은 자립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 영혼은 육체의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형상 혹은 자립적인 존재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뭐라고요? 육체 없이는 뭐가 안 생긴다? 영혼이 안 생긴다고 이야기해 놓고 여기 와서 갑자기 영혼이 육체가 주름지어서 만들어낸 게 영혼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자립적 형상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마지막 죽었을 때 육체는 없어져도 뭐는 남아있다? 영혼은 남아있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육체는 사라지고 영혼은 남아있다. 라고 했을 때 여러분, 신학적으로 무슨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까?

뭐가 자립적 존재입니까? 영혼이죠. 그럼 자립적 존재니까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유의지론에 의하면 죄는 자유의지에 의해서 짓잖아요. 그러면 인간이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게 아니고, 인간 중에서 어디가 발휘한다? 영혼이 자유의지를 발휘하고 육체는 따라올 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의 구속은 어디를 겨냥하면 돼요? 영혼을 겨냥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십자가 질 필요도 없이 성령을 바로 보내면 된다 말이에요. 성령이 뭐예요? 하나님의 마음가짐 아닙니까? 하나님의 좋은 마음 아닙니까? 착한 마음이잖아요. 하나님의 선한 마음 아닙니까? 정의로운 마음. 그러니까 성령을 바로 주면 되는데 십자가 왜 지느냐 이 말이죠. 성립이 안 되잖아요. 아니, 잘못은 영혼이 잘못했잖아요.

영혼이라 하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보면 영혼은 무슨 관계이냐면, 언어적 영역. 영혼이라는 것은 언어적 영역에서 시작해요. 언어라 하는 것은 말이다, 말. 그러니까 하나님과 뭣을 한다? 기도가 뭐예요? 대화 아닙니까? 대화. 인간은 정신은 영혼이 쥐고 있고, 하나님은 누스라 했지요. 아까 정신이죠. 하나님과의 관계는 육체 대 육체의 관계가 아니고 정신 대 정신이 통한다고 할 것 같으면 인간의 죄에 대해서 구속하려면 영혼에서 직접 다가오면 된다 말이에요. 그게 뭐냐?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깨우치라, 똑바로 살아. 바보야. 똑바로 살아. 이 죄인아. 니, 제자 맞아?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직접 다가오면 되는데 왜 십자가 지느냐 말이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지 않고, 십자가 질 필요도 없이 바로 성령을 마지막 때 종말의 영으로 주면 될 것 아니냔 말이죠. 왜 십자가 진 것을 근거로 해서 성령이 오시는가? 왜 십자가 영으로 성령이 오시는가?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몰라요.

왜? 토마스 아퀴나스 때문에. 자기 영혼구원에만 눈독을 들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윤리 도덕적이에요. 그 사람은 뭘 모르냐? 거룩을 몰라서 그래요. 거룩이라 하는 것은 영혼, 육체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거룩한 분의 만남에서 우리는 거룩이라 하는 것이 조금도 없다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죽은 자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그 영혼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육체적 형상에도 불구하고 자립적 형상, 존재라고 강조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분이다. 예수님의 육신의 모양을 거부한 것을 요한일서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적그리스도라고 하지요.

적그리스도의 특징이 뭡니까?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다. 그게 영지주의라는 건데, 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느냐 하면, 육체가 구태여 필요치 않기 때문에 그래요. 육체는 어차피 없어질 것 아닙니까? 없어질 것, 뭐하려고 챙깁니까? 하나님께서 없어질 것까지 챙길 필요는 없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네 들이끼리. 그게 하나님의 언약의 거룩이 뭔지 모르고 기껏해야 하나님 뜻을 살펴서 자기 구원만 챙기겠다는 겁니다. 자기 영혼구원만 챙기고 육체야 보~너스 준다고 하니까 저거들 따라오지. 이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아마 사도 요한이 들었다면 대번 적그리스도라고 할 거예요.

성경에 십자가 중심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해설했으면 할머니가 됐든, 아주머니가 됐든, 아이가 됐든 간에 그걸 알아야 돼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으로 해설했다면 그 해설을 그들이 알아야 돼요. 신의 존재를 안다고 아이고, 신자입니다. 신의 말씀대로 사세요. 라고 이렇게 부추길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그것 하기도 바쁜데 뭐, 문화사업을 펼친다? 세상에. 바쁜데 교회해서 문화사역을 500군데나 하는 기가 그래. 그것 하기도 바쁜데. 이게 무슨 이상적인 교회, 모범적인 교회입니까?

[이와 같이 인간 영혼의 자립성이 주장된다면, 이 두 가지가 서로 화해될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자립성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영혼의 자립성이 곧 인간의 자립성이냐, 아니냐? 자, 보세요. 이게 지금 예를 들어서 상대방을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상대방 나라에 가서 무기를 사용하고 잔혹하게 육체를 죽일 수 있느냐 이 말이에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인간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무슨 짓을 해도 된다고 한다면, 아프리카의 정복이 정당화되고, 인디아에 대한 학살이 정당화되겠지요. 그렇지요? 인간의 신체는 구원과 상관없잖아요. 줘 패서 죽여서 사람을 예수 믿게 할 수 있단 말이에요. 왜? 사람은 극한의 죽음이 올 때는 뭐든지 믿고 그 사상에 동의한다고 해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는 심리가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게 과연 그런 전도방법이 옳으냐 이 말이에요. 영원구원 받으면 될 거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영혼은 육체의 실체적 형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하나의 온전한 실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인간 본질의 한 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영혼이 하나의 온전한 실체라면 인간의 실체적 단일성은 파괴될 것이다.]

[만약 영혼이 개별적 실체라면, 인간의 실체적 단일성에 대한 문제는 제기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난국에도 불구하고 인간 영혼이 그 자체로서 자립적 형상이라는 전제가 더 이상 음미도 되지 않는 않은 채 폐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는 명백하다. 인간 영혼이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종적 완전성을 모두 끌어안는 온전한 자립적 형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자립성은 있지만 그 자립성이 온전성은 아니란 말이지요.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설명하기를 천사는 형상 자체로서 온전하고, 인간은 천사와 같은 형상을 갖고 있지만 그 자체로 온전치 않고 그런 차이점이 있다

왜 영혼 자체를 주장하는지 보세요. [영혼은 지적작용을 수행하며, 바로 그 때문에 오직 인간의 감각적 능력들이 수행될 수 있을 때에만 그 자체로서 자립적인 존재라고 말해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러니까 왜 영혼이 자립적이냐 하면, 내가 꿈을 꿀 때 남이 간섭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간섭 못 하잖아요. 그러니까 각 개별적 영혼은 하나님이 주신 개별적이지요. 하나님이 각자각자 내가 상상할 때 남이 내 상상에 끼어들지 못해요. 내가 구상하고 있는데 남이 거기서 간섭 못합니다. 왜? 나만의 자립적 존재이기 때문에.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왜 자립적인 게 좋으냐 하면, 독자적인 하나님의 사명이 각자 각자 주어졌기 때문에 그 사명은 남들이 탈취하지 못해요. 또 그렇게 될 때 마지막 심판은 단체로 심판하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끄집어내서 선악 간에 심판한다.

이러한 신학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정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도록, 자기 직업에 대해서 고마움을 먹도록 감사할 수 있도록 되어있지요. 이렇게 가르치면 사람들이 데모하겠습니까, 데모 안 하겠습니까? 데모가 안 되지요. 왜냐하면 내가 농사꾼이 된 것은 뭐 때문이다? 내게 주신 사명이다. 내가 영주한테 당하는 것도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다. 이걸 참아야 된다. 중요한 것은 나라를 뒤집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영혼을 아주 천사처럼 가꾸어 나가는 것이 그게 중요하지, 내가 이 사회를 뒤집어서 이 감각적인 것, 없어질 물질에 대해 이런 육체를 가꾸기 위해서 내가 힘쓴다는 것은 내 영혼에 대해서 손상을 준다 이 말이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육체에 힘쓰면 뭐가 소홀 됩니까? 영혼이 소홀하게 되고, 영혼에 힘쓰면 뭐가 소홀 돼요? 육체가 소홀하게 마련이란 말이죠. 그래서 육체는 영혼을 핍박하고 영혼은 육체를 또 감시하기 때문에 너무 육체를 좋아하고 감각적인 걸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하면 그 사람의 영혼은 망친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영혼 위주, 육체 밑에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것이 오늘날 칼빈주의 문화관에 들어가면 클래식은 괜찮은데 대중가요는 안 된다. 클래식이라는 게 다른 것이 아니고 옛날의 대중가요가 클래식이거든요. 옛날 대중가요는 되는데 오늘날 대중가요는 안 된다는 것은 모순이 생긴다는 겁니다. 찬송가는 되는데 다른 대중가요는 안 된다. 이런 식으로 해요. 왜 안 됩니까? 대중가요는 우리 감각적인 것을 작용하고, 찬송가는 우리 영혼을 살지게 하기 때문에. 또 영혼이란 걸 집어넣어요. 분명히 사람은 단일성이라고 하지만 단일성이 아니고 자꾸 뭔가 떼어 놓는, 떼는 작업을 해 놓는 거예요. 자꾸 떼어 놓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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