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12세기 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신학이나 철학이나 그렇지만 이 책에 나와 잇는 신학 같은 것은 큰 산이 있다면, 큰 산이 모든 신학에 있어요. 그 산이 여러분들은 신앙인이니까 신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차가 철로에 이렇게 달린다면, 큰 산이 있는데 산을 뭐로 보면 되느냐 하면, 이걸 존재로 보면 정확합니다.
존재에 대해서 시비 거는 사람이 나타나는데 그 사람이 루터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루터는 오늘날 신학에서도 사람들이 거부하고 싶은 신학자에요. 왜냐하면 존재에 대해서 거부했거든요.
그러면 루터는 뭐냐 하면, 신학은 존재에 대해서 이렇게 멀리서 후딱 지나가면서 이걸 탐구하는 것은 이걸 철학이고 신학이라면, 진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둔 것은 뭐냐 하면, 십자가다 이 말이에요. 진짜 하나님은 남겨 둔 것은 큰 산처럼 존재가 아니고, 십자가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루터가 그런 이야기하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존재에다가 십자가를 보태면 될 거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는 뭐가 됩니까? 내 존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십자가가 되겠지요. 글쎄, 그것이 말도 안 된다는 거지요.
루터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을 잡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칼 바르트입니다. 루터가 뭔가 다르다 하는 것을 감을 잡은 사람이에요. 그렇게 감은 잡았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칼 바르트가 포기 못한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존재성입니다. 인간의 존재성, 신의 존재성이에요.
여러분들이 신비주의나 합리주의 이것과 우리가 보려는 신비주의나 의지주의가 우리가 보려는 합리주의와 상관없다고 보지만, 아니에요. 감정이나 의지라는 것은 반드시 뭐가 성립될 때나 나오는 이야기냐 하면, 이성이 먼저 중심을 잡을 경우에서나 비로소 그게 다가 아니야, 하는 식으로 나온다 하는 게 의지와 감정입니다. 이성이 먼저 터 잡고 있는 상태에서 이성으로는 좀 미흡한 것 같아. 라고 거기에 하나 토 달고 나오는 게 의지와 감정주의지, 이성은 영 엉터리고 그래선 안 되고, 이렇게 나오는 것이 신비주의와 의지주의란 게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 합리주의든, 신비주의든, 의지주의든 이 모든 것이 관심이 어디 있느냐 하면, 관심은 이 큰 산, 이 존재라는 엄청난 큰 산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냐하면 이렇게 존재 자체에 그걸 분석해서 알게 될 때에 뭐를 아느냐 하면, 그 존재에서 분산된 떨어져 나온 나라는 존재자를 알게 되지요. 왜냐하면 거기서 한 소속이니까, 한 속성이니까.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존재가 만약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형상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이죠. 그럼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속성을 알면 하나님 형상을 입은 우리의 속성을 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결국 돌아오는 게 뭐예요? 내가 누구냐를 안다 말이에요.
나라고 하는 것은 항상 변화하는 존재고, 변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안정성이 없잖아요.
우리가 늘 변하니까 내가 누구냐를 알려고 하니까 너무나 변화무쌍하니까 변하지 않는 어떤 존재를 상정하는 거예요. 한결같은 분, 그걸 예를 들어서 신이라 합시다. 신을 내가 앎으로 말미암아 신을 믿는 나는 한결같이 이게 나구나. 내가 바로 구원받았구나. 자기의 신분을 확정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변화된 나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고, 변하지 않는 그 무엇에서 찾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합리주의나 의지주의나 관념주의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신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는 아는 방법에 있어서 인간에게 세 가지의 사유적 요소가 있잖아요. 하나는 이성적 요소가 있고 하나는 감정적 요소가 있고 하나는 의지적 요소가 있단 말이죠. 변할 만한 요소부터 해서 변하지 않는 것을 구축, 확정 지으려는 그런 시도가 신학이다 이 말입니다.
변하지 않는 게 무엇이냐? 하는 그것에 철저히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루터는 참, 돌발적으로 나오지요. 존재의 자리에다 십자가를 집어넣어 버린다 말이에요. 십자가를 집어넣어 버리면, 십자가는 뭐냐 하면, 나와라 이겁니다. 해체입니다.
루터가 전 신학체제, 철학체제를 훑어보고 연구해도 제일 중요한 것을 사람들이 놓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거부하는 하나님부터 새로 시작해 보자. 인간을 거부하는 인간을 환영하지 않는 그 하나님부터 모든 걸 새로 출발해 보자. 배척.
네가 보기도 보아도 보지 못하고이라는 말씀이라든지,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는 그 말씀. 들을 귀 있는 자를 들을지어다. 이게 뭐, 들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니들이 뭘 알겠느냐? 아냐고 나한테 듣고 있느냐 말이죠. 너희들이 아무리 애써봐야 내 이야기를 아는가? 니들이 뭘 알아? 그런 뜻이다 이 말이죠. 절망이죠. 그 절망을, 저는 절망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걸 칼 바르트는 다른 뉘앙스로 이야기했어요. 위기라고 했어요. 절망과 위기가 좀 다른가? 절망이다. 칼 바르트는 위기. 루터는 십자가. 루터는 사실 십자가라는 말, 절망 쪽으로 선회하고 예정이란 말을 썼어요. 루터는 예정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칼빈의 예정론이 루터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어떻게 전환됐는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칼빈의 예정론은 루터에게서 나온 게 아니고, 이건 유대교에서 나온 거죠. 분명히. 유대교 사상과 일치되지, 루터에서는 별로 연관 안돼요. 왜냐하면 루터의 예정론을 뽑아 올 때는 반드시 십자가와 같이 뽑아 와야지. 이것은 십자가는 떨어뜨려버리고 예정론만 턱 해가지고 거기에다 하나님의 형상하고 결합시키는 게 어디 있어요. 그런 반칙이 어디 있습니까? 그건 말이 안 되지요. 십자가를 빼 놓은 예정론은 예정론이 아니고 주권론이 되지요.
주권이란 말은 성경에는 없어요. 주권이란 말 자체가 성경에서 용납을 안 하는 말입니다. 예정이지 주권이 아니에요. 주권이라는 말은, 이것은 성경의 용어가 아니고 철학적 용어에요. 모든 인간은 다 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어요. 어린애도 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있어요.
십자가를 들이대는 순간 우리는 절망이고, 그 뒤에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은혜고 이렇게 돼요.
하나님은 자기의 은혜성을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 모든 기존의 사고방식을 전부다 오직 택한 백성에게만 전부다 그것을 절망과 절망, 기대가 깨어지고, 모든 소망이 다 깨어져 부수는 방식으로 데려가고 인도하시고, 꿈꾸면 꿈 깨고, 또 꿈꾸면 꿈 깨어버리고, 계속 그 사람이 만들어내는 꿈을 꾸는 족족 다 깨지게 만드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은혜 됨을 깔아놓는 그런 식으로 주께서는 인도하십니다.
이걸 가지고 모세가 만났던 하나님이 뭐라고 했냐면,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입을 자에게 긍휼을 준다."는 진짜 하나님의 자기소개서. 나머지는 다 거짓말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죄 안에 가두어 둔 것은 은혜를 더욱더 은혜 되게 하심이라" 로마서 5장
거저 주신 은혜였으니까. 나의 존재성을 찾기 위한 내 나름대로의 노력은 전부다 의지든, 이성이든, 감정이든 다 깨져 버렸어요. 이걸 루터가 알았어요. 이 사실을.
평소에 우리는 십자가는 말로만 알았지 십자가는 근처도 않고 우리 스스로 평소에 살아가는 모든 방식이 이 안에 다 들어 있어요. 나보다 더 큰 나를 생각하는 것이 인간들의 모든 변화의 지향성입니다. 항상 나보다 더 큰 뭐?
변화를 줘야 존재의 높은 자리까지 빨리 단시간 내에 갈 수 있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의 심리가 뭡니까?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변화를 추구해서 거기다 돈 때려 넣는 사람들.
그 변화를 잡는데 안셀무스는 이성으로 잡았고, 여기나오는 아벨라르는 의지로 잡았고, 베르나르는 신비주의로 잡아버린 거예요.
메시야의 영이 오게 되면 십자가를 알게 되고 십자가를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바로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일한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까 모든 나의 꿈꾸는 것은 내 마음대로고, 깨부수는 것은 하나님 마음대로고. 맨 날 꿈꾸고 깨지고, 꿈꾸고 깨지고, 꿈꾸고 깨지고. 그러면 꿈을 안 꾸면 될 거 아닙니까? 안 꿀 수 없어요. 존재인데. 존재니까 안 꿀 수가 없고 하는 족족 깨질 때 그것이 구원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신자에요. 그래서 모든 것이 은혜인 줄 아는 겁니다.
이러한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이르기까지 여기 안셀무스부터 해서 우리는 뭘 해야 되느냐? 도대체 존재가 어디까지 가느냐 하는 것을 탐색을 해 봐야 돼요.
존재가 어디까지 가는지 아십니까? 마지막에는 쿠자누스까지 가요. 쿠자누스가 이런 소리했습니다. 신은, 말하지 마라. 신은 언어로 유일함이다. 이게 끝이에요. 신에 대해서는 입 다물라. 신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야 된다. 왜? 모든 곳에 계시고, 모든 곳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쿠자누스에요. 그래서 쿠자누스, 뒤에 나와요. 쿠자누스는 나중에 후대 사람이거든요. 루터 약간 이전의 사람이라고.
그래 쿠자누스는 이런 이야기를 하기까지 안셀무스부터 시작해서 이성부터 해서 쿠자누스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을 정립하고 신이란 이거다 하고 해답을 내기 위해서 얼마나 나름대로의 사고논리를 총동원 안 했겠습니까? 했겠지.
한국교회의 모든 목사들이 한 짓거리가 그 안에 다 들어있어요. 다 쓸데없는 짓거리가 그 안에 다 들어있어요.
한국 목사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인간이 일하지 하나님은 일 하지 않는다는 거, 이게 특징 아닙니까? 우리가 먼저 나서서 일해야 되지, 안 그러면 우리는 가만있으면 안 된다는주의 아닙니까?
그런 경향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 책에도 나와 있어요. 믿고 가만있으면 되는 게 아니다. 이런 소리가 로이드 존스 책에 여러 군데 나와 있습니다. 제가 로이드 존스의 책을 가만히 보면서 로마서 보면서, 에베소서 강해서 다 보면서, 권위라는 책부터 베드로전후서 강해를 보면서 이 분이 종잡지를 못하는구나. 안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종잡을 수가 없어요. 이 사람을. 자기가 오늘 꼭 박영선 목사님을 보는 것 같아요. 도대체 중구난방이라. 자기도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교인들을 보면 괘씸해 미치겠고, 전혀 신앙생활 안 하는 것처럼 분통을 터뜨리고, 그리고서 그들에게 이야기하려니까 내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고.
그러니까 결국 한다는 것이 쿠자누스처럼 부정적 용어죠. 하나님은 뭐는 아니고, 뭐는 아니고, 뭐는 아니고 식으로 이야기해요. 부정적 단어, 압니까? 아시죠. 부정적 단어를 가지고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마찬가지지요.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인간입니까? 인간만이 아니고, 그럼 하나님입니까? 하나님만은 아니고. 뭐가 아니고로 해서 대충 짜 맞춰 가라는 거지요. 대충 얼기설기 짜 맞춰 가라는 거지요.
안셀무스의 이성론에 있어서 초점은 뭐냐 하면, 더 큰 것, 최고 큰 것이 신이다. 이 개념입니다. 우리는 겸비해야 되고, 겸손해야 되고, 마음을 낮추어야 돼요. 그러니까 안셀무스의 말에 대해서 은혜롭다고 동의할 수밖에 없지요. 이게 바로 이성적인 거예요.
그러면 이성적이라는 경우에 약점이 뭐예요? 최고 자리에 신이 있기 때문에, 그러면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굴복하고 마음을 낮추고 결국 뭐예요? 가만히 있어라. 이것 아닙니까? 입 다물고 가만있으면 신의 형상이로소이다. 주의 피조물입니다. 그만 가만있어도 칭찬이 늘어지지요.
그런데 잠잠하고 이러면 아무것도 안 한 게 되잖아요.
무슨 말이고? 앞에 조용하라며. 잠잠하라며. 뭘 열심히 해? 그러면 그 다음부터 교인들은 어떻게 되느냐? 자기 나름대로 교인들이 마음씨가 좋아서 목사를 해석해 주는 거예요. 마음속으로는 겸손하고 행동은 열심을 내고. 그렇게 되는데.
안셀무스의 보상론이 나오는데.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보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신 자신이 스스로 보상하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성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합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우리는 개뿔도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니까 가만있으면 되는 거지요. 그런데 가만있으면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라고 집사들이나 평신도가 목사한테 대드니까 목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은 이성적인 신앙이고. 신앙은 세 가지가 있어야 되는데 그게 뭐냐? 이성적인 신앙, 그것만 다가 아니라, 의지적인 것도 있어야 되고, 감정적인 것도 있어야 된다.
그러면 교인들은 헷갈리는 게 첫째, 둘째, 셋째가 어떻게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있느냐?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해답에 대해서 누구 하나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구를 1/3로, 33% 이런 식으로 이런 식밖에 안 돼요. 여기 이성적인 것, 의지적인 것, 감정적인 것. 의지라 하는 것은 전도고, 감정이라 하는 것은 기도고, 이성은 뭡니까? 성경공부 아닙니까? 지정의. 보통 이런 식으로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 가지 해서 균형을 맞추어야 된다는 거죠.
의지는 어떤 게 의지인가 봅시다. 피터 아벨라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이라 하는 것은 의지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생활은, 하나님이 지금 자기 백성에게 원하는 윤리적 도덕적 행위는 이성적으로 보면 알아서 행하는데, 알아서 행하는 게 아니고 알아서 행하면 그냥 위선적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진짜 하고 싶다는 의지가 동해야 그게 진정한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한 행동이 나오지.
거짓말 하지 마라. 거짓말 안 하면 되지.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도둑질 하지 마라. 그럼 도둑질 안했으니까 됐지. 이것은 이러면 안 된다는 거지. 도둑질 안했다. 그러니까 나, 하나님이 착하다 할 것을 이루었다. 그러니까 복 주세요. 일반교인들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도둑질 하지 마라 하면 목사가 도둑질하지 마세요. 하면, 목사님, 그건 우리한테 해당 사항이 아닙니다. 도둑질 안합니다. 요새 바쁜데 밤중에 들고 가는 그것도 기술 있어야 되지. 도둑질 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십계명에 도둑질 하지 마라는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은 지금 도둑질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하고 있으니까 하지 마라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고 있으니까 너희는 백 날 내가 하지 마라해도 안 멈춰지지. 그런 뜻이에요. 간음하지 마라 말은, 지금 간음하고 있는데 내가 간음하지 말라고 해도 안 멈춰지지. 네가 그런 인간이다. 그런 뜻이에요. 아니 우리가 무슨 도둑질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십계명이 어려운 게 도둑질이라 하는 것은, 제가 예를 들게요.
잠언서에 보면 몰래 먹는 떡이 맛있지요. 왜 같은 떡인데 몰래 먹는 게 맛있을까요? 몰래 하면 ( )치는 겁니까? 몰래 먹는 떡하고 과일이 맛있다 말이지요. 왜 그래요. 왜 몰래가 들어가면 왜 그렇게 맛있는 거예요. 훔쳐 먹는 그게 맛있다는 거죠. 왜 훔치는 게 똑같은 재료로 되어 있는데 맛있는 겁니까? 그것은 우리가 날 때부터 도둑놈이기 때문에 그래요. 도둑놈은 도둑놈 심보를 발휘해줘야 그 값을 하고 있는 겁니다. 도둑놈은 도둑놈처럼 살아야 그 맛이 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맛이 나는 거예요. 같은 떡이라고 엄마가 먹지 말라 하는 그 떡을 몰래 먹어 보세요. 얼마나 맛있다고.
십계명은 우리의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이 가미된 겁니다.
십계명이 누구한테 준 겁니까? 이게 출애굽 해방됐던 백성들에게 준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출애굽 할 때 모든 것은 누구 것이에요? 자기 게 없어요.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애굽에 살던 사람이라서 반드시 뭘 갖고 있다? 나의 것, 내 것이라는 것이 안에 들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도둑질 안 해야 되는 약속의 땅의 백성으로서 애굽에 살던 사람, 내 것이 성립되어 있는 사람은 이것은 반드시 충돌하게 되어 있어요.
출애굽할 때에 너희들이 종 되었던 고아와 과부 되었던 것을 건져내었잖아요. 그러면 현재 있는 것이 누구 겁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있는 겁니다. 땅도 그렇고 나의 생긴 것도 전부다 하나님의 것, 우리는 죽어야 마땅한, 뒤따라오는 애굽 군사들처럼 물에 빠져야 마땅한데, 세상에 물에서 기어 나온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물에 빠져 죽었겠지. 물에서 누가 살아요.
그런데 죽어야 될 인간이 살았잖아요.
고린도전서에 보면, 너를 값 주고 샀나니 너는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라 되어 있고. 그러한 인식에서 율법에서 벗어난 걸 가지고 성령이라고 합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네가 구원받은 것이 성령의 행함이냐 율법의 행함이냐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네가 뭘 해서 구원받은 그 뜻이 아니고 너희 현재 모으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너를 덜렁 구원 받은 것을 네가 아느냐 이 말입니다. 아까 처음에 존재와 십자가 이야기할 때 했잖아요.
위기와 절망이 없는 곳이 어디냐 하면, 하늘나라에요, 천국이에요.
아직도 우리가 구원된 자로서 이 세상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 머물러 있는 자로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매일 같이 절망과 위기로서 우리를 인도하신다 말이에요. 그러면서 나중에 모든 것이 네가 나된 것은 나의 은혜라고 이야기해요.
아벨라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동을 하는데 인간의 이성이 아니고 의지로만 돼야 된다. [아벨라드는 그리스도가 마귀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오셨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반대했으며, 또한 인간이 하나님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하나님이 오셨다는 견해도 거절하였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을 문자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으로 가르치며 한 모범을 보이기 위함이라는 이론을 전개했다.]
아벨라드가 속죄, 그러니까 값을 치러서 보상했다는 보상설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다가 뭐를 집어넣느냐 하면, 예수님의 자발적인 의지적인 사랑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모범적이었다.
[안셀무스가 법률적이고 계량적인 방식의 보상논리에 입각해 있다면 아벨라드는 용서와 화해를 사랑의 행위라는 인격적 사건으로 보았다. 이로써 그는 의지의 자율성과 인격주의를 특성으로 하는 근세의 중요한 씨앗으로 간주되기까지 한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계통에서 뭔가 본 훼퍼 계통의 신학에서 상당히 이것이 많이 대두되지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시키신 분이다.
예수님이 모범된다는 말은, 결국은 예수님을 뭐에 이용하느냐 하면, 내가 진정 나는 어떠한 존재냐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이용물이 되지요. 하나의 모범 케이스가 될 뿐이죠. 결국 최종적으로 남는 관심사는 누구에요? 결국은 나에요. 나. 나란 말이죠. 쉽게 말해서 예수님이 산인데 어떤 산이다? 아벨라드 같은 경우에 예수님이 산이라면 존재의 산인데 무슨 산입니까? 사랑하는 산. 사랑의 산이에요.
일반인들이 흔히 윤리 도덕적인 사람들이 교회 왔을 때 목사님, 설교는 맞는데 내가 보기에는 너무 합리적이고 너무 이성적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맞는데 틀렸다는 말은 아닌데 너무 사랑이 없는 것 같아요. 라고 할 때에 하하하, 저 사람 또 아벨라드 후계자로군. 이렇게 파악을 하고 있어야 돼요. 그때 이렇게 해야 됩니다. 적당히 균형 맞춰. 이렇게 하면 안 되고. 당신이 십자가를 아냐 말이죠. 사랑한다고 넣어 주냐 이 말입니다. 사랑한다고 천국에 넣어 주냐 말이죠.
어떤 목사는 여러분 이성적으로 십자가를 알아야 되고, 그걸 멈추면 안 되고 균형을 맞춘 중에서 의지적으로 사랑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성적으로 십자가를 알고 의지적으로 사랑 맞추면 구원해 줍니까?
아벨라드의 속죄론, 아벨라드가 이해하는 십자가를 잘 알았지요. 십자가는 뭐라고요? 보상해 주는 게 아니고 계산해서 우리한테 회계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모범설. 사랑이 이것이다. 사랑이 여기 있으니 사랑이라는 걸 봤으니까 너도 본받으라. 하는 모범적으로 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세 번째, 신비주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그냥 베르나르라 하죠. [안셀무스가 신 존재의 개념적 객관성에 입각한 확실성을 주장한 것과 달리 아벨라드가 신 인식의 주관성을 강조했다고 할 때 이는 지성과 의지 사이의 대조로 읽힐 수 있다. 그런데 아벨라드처럼 주관성을 강조하면서도 의지보다 감정에 더 초점을 맞춤으로써 신비주의를 표방하는 또 다른 입장이 나타났으니 바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였다.]
신비주의에서 여러분들이 하나 꼭 알아두셔야 할 것은, 신비주의는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어, 야, 목사님, 지금까지 십자가 반대편은 존재요, 존재의 반대편은 십자가라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신비주의에 오니까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제가 말한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이 말은, 개별성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러니까 개별성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면 신은 존재자가 되잖아요. 신비주의가 되면 존재가 아니고 존재성, 다른 말로 하면, 신성,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신성. 신다움. 거기에 관심이 있어요. 신다움.
신성과 신에 대해서 여러분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만약에 어르신이 위에 계시면, 하나님이 계셔 버리면 여기 있는 장소 말고 다른 장소에는 하나님이 안 계시잖아요. 하나님이 없는 곳이 생기잖아요. 맞지요. 하나님이 여기 계셔 버리면 하나님이 없는 곳이 계시잖아요. 그런데 신성이 돼버리면 어디에도 다 계시잖아요.
신비주의는 그게 아니고 뭐예요? 신에 대한 것이 아니고 신성에 관한 거지요. 어떻게 나쁘게 생각하면 두루 뭉실. 그렇지만 신성의 장점은 뭐냐 하면, 가만있어도 신과 교류가 된다는 점이 좋지요. 한 분이 아니고. 자자, 기도합시다. 꿇어 앉아! 꿇어 앉아! 손 모으고. 기도합시다. 라고 특별히 어떤 의식이나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삼위일체 하나님이여, 누구 이름을 불러 가지고 할 때 되는 게 아니고, 가만있어도 뭐가 됩니까? 마치 여름에 장맛비 오듯이 추적추적 온 어깨에 온 몸을 적시지요.
그 거룩성과 그 신의 충만성에 푹 젖어 들어가 보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 해 봅시다. 신을 만나는 게 아니고 신 속에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신을 만나는 게 아니고, 만난다는 것은 다방에서 만나는 거죠. 신을 만난다 하면 신을 안 만나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신을 안 만나는 경우를 없애 버리자 이 말입니다. 신을 안 만나는 경우를 없애 버리고 늘 신과 함께 있는 이것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성이고, 그 존재성은 신의 신성에 합류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께서 우리한테 요구하는 최종 최고 절정의 수준을 말한다. 라고 하는 것이 베르나르의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가 내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처럼 그때는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으리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와 내가 하나 된 것처럼 그때는 너희와 내가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둘이 아니다 이 말이죠. 둘이 아니란 말은 한 덩어리란 말이고, 한 몸이란 말이고, 결국 쉽게 말해서 하나다 이 말입니다. 하나, 그러면 끝난 이야기 아니냔 말이죠. 말 되죠. 말 된다고.
구원이 뭐라고요? 뭐로부터 구원이라고요? 율법에서 구원 아닙니까? 율법에서 구원된다는 말은 베르나르 식으로 해석하면, 율법으로 구원된다는 말은 법 안 지켜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그런 뜻이 아니고, 가만있어도 어디 안에 있다? 신성 안에 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그게 제대로 된 율법에서의 구원이다. 이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배웠던 못 배웠던, 창녀가 되었던 세리가 되었던 상관없어요. 율법의 모든 인간된 규정은 치우고 신성 속에 있으면 모두 다 신이 된다. 그래서 이런 논리에 의하면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이 하나님 말씀만 듣고도 신이라 하거늘 내가 아버지와 하나라 해서 하나님이라 하는데 뭐가 나쁜 게 있느냐 하는 요한복음의 8장 이야기를 써 먹을 수가 있겠지요. 뭔가 문제인데? 되게 은혜로운데. 율법에서 구원됐다고 했는데 복음적 아닙니까?
하나님은 사랑한 놈이나, 안 한 놈이나, 신을 안 놈이나, 모르는 놈이나 전부다 신성은 동일한 신성이 될 때 그것이 인간이 도달된 궁극적인 차원이다 이 말입니다. 자기의 주관조차 넘어서는, 자기의 주관을 넘어서요.
[그런 신비주의적 경험은 베르나르에 의하면 숙고와 참여와 초월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마지막에 초월이죠. 넘어서 버리는 것.
[초월에서는 자기를 잃지 않으면서 자기를 넘어선다.] 야, 어렵다 이거. 완전히 선불교 같지요. 자기를 잃지 않고 자기를 넘어선다.
[무릇 모든 종교가 자기를 넘어서기를 가르칠 때, 신비주의는 이미 종교의 핵심이다.] 자기를 부인하라. 뭔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자기를 잊어버리라.
결국 셋 다 틀렸지요.
정답은 이거에요. 네가 죄를 아느냐?
신비주의의 약점은, 치명적인 점은 십자가가 최종점이 아니라 십자가까지 넘어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진다는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낚시대로 신비로운 신성으로 건져내면 될 뿐이지, 십자가 죽는 그러한 쓸데없는 과정을 겪은 거예요.
이 신비주의자들이 주로 내세우는 그러한 그들의 근거가 뭐냐 하면, 선지자들이 성신 받을 때 그들이 뭐라고 받았습니까? 신비주의 주장에 의하면 성신은 그냥 온 거예요. 맞는 말 아닙니까? 아니, 사울이라는 염소 키우는 그런 목자도 어느 지역에 가니까 자동적으로 뭘 했습니까? 이상한 소리하면서 예언을 해서 소문이 돌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하나다. 하는 소리를 들었잖아요. 그러니까 신비주의는 뭐다? 신비주의는 뭐가 있기 전에, 신비주의 구속사가 있기 전에, 신비주의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도, 이미 처음부터 성신께서는 천지창조 할 때 어두움을 감싸고, 암탉이 감싸고, 이미 신성, 아까 제가 강조했잖아요. 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신 위에 뭐가 있다? 신성이 있다 이 말이죠.
신은 우리가 아는 범위까지고, 여호와나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범위고, 그것 까지 너, 맞아? 넘어설 때 거기에 누가 기다린다? 신성이 기다린다. 신이 아니고 신성. 거기까지 초월해야 돼요. 거기까지 들어가야 돼요. 이러한 이런 주장 많~습니다. 요새 뜹니다. 불교하고 트랜스젠더는 아니고, 트랜스... 종교간 교통도 이런 식 아닙니까? 신이라 하는 것은, 여호와는 하급신이에요. 상급신은 신이 있는 게 아니고 신성만 있어요. 그것은 새로 인간이 만든 게 아니고 창조 전부터 이미 있었던 신성이 먹구름처럼 내려앉은 거예요.
그들은 뭐를 모르느냐? 죄를 몰라요. 그들에게 뭐가 없습니까? 죄가 뭔지를 몰라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헛되이 하는 거예요. 이게 헬라 철학적인데 헬라인들은 십자가한테 미련한 거예요. 유대인들은 거리끼는 것이지만, 십자가의 지혜가 헬라인들은 이런 신성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쓸데없는 짓을 한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뭐만 전합니까? 십자가만 전한다 말이에요. 결국 그들은 뭘 몰랐어요? 죄를 누락시킵니다. 죄라는 것, 죄의 무서움, 그러니까 지옥의 무서움도 몰라요. 지옥 없는 거지요. 그냥 즐기는 거지요. 지옥 없이 자기의 초월 자체를 즐기는 거예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구원 받으려고 환장한 놈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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