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음성설교
사사기5장1-31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 오실 때 어떤 모습으로 다가 오시면 좋겠습니까?
지난해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위로와 공감에 대한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참 좋은 말 아닙니까?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 자신의 입장, 자신의 형편을 함께 느껴 주고, 또한 위로해 주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도 자신을 받아 주고, 공감하고, 위로해 주는 교회라면 서로 교회오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직장 다니고, 자식 키우고, 내 여가 챙기고 살기 바쁜데 골치 아픈 하나님의 말씀 생각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고민하지 않고, 지치고 곤한 마음을 위로해 주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은 자신만은 건드리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가 나의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도 자신은 교회 다니는 것만으로도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설교가 뭔가를 생각해야 하고, 싸움을 일으키고, 고민을 발생시킨다면 그런 설교 듣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설교자는 교회에 오는 청중들의 귀를 편안하게 해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설교는 사람의 마음에 합한 설교를 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합한 설교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설교를 말합니다.
설교의 중심에 예수님이 자리 잡지 말고 설교 중심에 사람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사람이 중심인 설교, 예수님은 주변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공감해 주시고 위로해 주실 때 교회 올 맛이 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처한 나의 상황에 대해 공감하시지 않고 위로해 주시지 않는다면 싫습니다.
이것은 나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이렇게 무시당하면서 교회 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나를 존중해 주고, 나를 인정해 주는 예수님. 이런 신을 사람들은 찾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은 드보라와 바락의 찬양입니다.
2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의 두령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적극적인 행동을 볼 수 있지요.
우리도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까?
적극적인 헌신. 아마 하나님께 헌신하자는 말을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거부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대단하다는 말 아닙니까?
자신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자격이 되고 그런 능력을 갖추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 오실 때 이렇게 다가오시면 기분 좋을까요 나쁠까요?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기분 상당히 좋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 오실 때 이렇게 우리 능력을 인정해 주면서, 우리가 행한 행함을 인정해 주시면서 다가오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2절 말씀이 그런 뜻이 아니지요.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면 이스라엘 두령과 이스라엘 백성을 찬송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게 논리에 맞는 말이잖아요.
그러나 오늘 본문을 읽어 내려가 보면 이스라엘 두령, 이스라엘 백성은 어떤 짓을 했다고 합니까?
우상 숭배했다고 합니다.
출발점이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두령,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심지어 삼갈, 야엘 사사가 등장했을 때에도 잠시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숭배에 빠져살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형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지도자가 없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드보라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사람들은 자신을 드보라 편에 두려고 합니다.
제발 그런 짓 하지 마세요.
본문을 제대로 보셔야 합니다.
사사를 누가 일으켰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으켰습니다.
그러니 드보라를 여호와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입니다.
여호와하나님께서 드보라를 세우심은 곧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하나님께 무슨 헌신을 할 수 있겠습니까?
헌신할 입장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이들을 헌신하게 만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드보라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헌신하게 하셨습니다.
이것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몰라요. 아니 안다고 하지만 자기 자신이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어요.
지금 이스라엘을 보세요.
늘 반복입니다. 물론 차이는 있지요. 사건들이 각양각색의 모습을 보이지만 한결같이 반복합니다.
제자리걸음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헌신케 하셔서 대적들을 물리치게 하신 것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곧장 어떻습니까?
다시 자기 자신들에게 관심을 둡니다. 그렇게 한 것이 자신들이 한 것이냥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전쟁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친히 대적을 물리쳐 주셨음을 찬양하고 있지요.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움을 하는 것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묻혀 버립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하시는 일에 묻혀 버립니다.
자신들의 헌신, 열심을 꺼집어 낼 수가 없습니다.
31절을 봅시다.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 가 힘 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내용을 잘 보세요.
우리가 이런 찬양을 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런 찬양을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되면 자신들의 앞날이 뻔 하잖아요.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누가 주의 대적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주의 대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도 언제든지 멸망시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반드시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자신들은 주를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에 해가 힘 있게 돋음 같을 것이라고 자신 만만해 합니다.
사사기5장 전체를 읽어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성경을 보아도 까막눈입니다.
요한복음 1장11절을 보면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라고 합니다.
자기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 땅에 왔는데도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않았다는 말입니다.
자기 백성 아닌 자들이 영접치 않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땅 모든 사람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그런데 영접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12절을 보면 영접하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혈통, 육정, 사람의 뜻은 완전히 부정됩니다.
주의 대적과 주를 사랑하는 자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주의 대적은 오직 혈통, 육정, 사람의 뜻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혈통, 육적, 사람의 뜻을 부정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나는 지옥가야 마땅합니다. 나는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웬 은혜인지 주님의 피가 나를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셨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입니다.
혈통으로 난 자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해요.
물론 이 말을 지식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은 하지요. 그런데 혈통과 육정, 사람의 뜻이 끌어당기기 때문에 마지막엔 자신들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맙니다.
갈라디아서1장10절을 보겠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나와 있습니다.
바로 율법 지키기입니다.
율법 지키는 것이 무엇이 나쁩니까?
여러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
나쁘지요.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자신들이 뭔가 행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를 헛되이 죽게 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 뭔가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그들이 왜 율법을 다시 꺼내 들었을까요?
분명 십자가로 구원받았다고 했는데 왜 다시 율법을 꺼내 들었을까요?
자신이 견디지 못합니다.
십자가만으로 구원되는 것이 너무 밋밋합니다. 삶의 기쁨이 없어요.
몸에서 뭔가 흔적, 증거들을 남길 때 믿는 것 같은데 사도 바울이 전해준대로 하면 아무 흔적이 없어요.
내 눈으로 확인할 만한 것이 없어요.
기껏해야 고백이 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습니다라는 것은 고백일 뿐이지 다른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니 증거를 내 놓아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증거는 무엇인가?
율법 지키기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쉽습니까?
할례행하기, 십일조 하기, 감사헌금하기, 전도하기, 기도하기, 봉사하기, 성경읽기 등등.
이렇게만 하면 믿음이 있는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헌금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성경도 읽지 않는 사람을 성도라 ,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참 어렵지요.
이유가 무엇인고 하면 영으로 모든 것을 분별해야 하는데, 인간들은 육으로 분별하려고 합니다.
첫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의 분별기준은 오직 육체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법을 기준으로 말입니다.
우리들도 그렇지 않나요?
기도하지도 않고, 성경 읽지도 않고, 헌금하지도 않으면 예수님을 믿는 자 같습니까 아닙니까?
믿지 않는 자 같지 않습니까?
말씀을 믿지 않고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결과물을 가지고 믿는다 믿지 않는다 이렇게 판단을 하지 않습니까?
성경 말씀의 기준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그 피능력이 은혜에서 은혜로 이끕니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와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성도는 행복합니다.
인간을 철저하게 여호와의 대적으로, 멸망 받을 자로 남겨 두시고, 그런 바탕위에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성도의 자리가 그렇습니다. 성도는 말씀을 믿는 자입니다. 무엇을 행하는 자가 아닙니다.
찬양의 내용을 보세요.
자신의 모든 행위의 바탕이 우상숭배자로 시작하여 모든 것이 주님의 일하심으로 찬양을 돌리는 모습.
이런 모습이 성도의 모습니다.
성도는 십자가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는 자입니다.
여호수아를 거쳐 사사기로 가면서 주님의 사랑이 더욱더 깊어지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성도의 삶이 그렇습니다.
성도가 살아가면 갈수록 십자가 사랑은 더욱더 깊이 드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