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 강해 8

푸른 섬 2012. 2. 5. 15:15

사사기 강해 7

구원




음성설교


사사기6장1-10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인해 산속에 숨어서 살아 갑니다.

미디안, 아말렉, 동방사람들은 이스라엘 가운데 식물을 남겨 놓지 않았습니다.

특히 미디안 사람들로 인해 이스라엘은 아주 미약하게 되었습니다.

미다안 족속은 아브라함의 세 번째 아내 그두라의 후손들입니다. 누가 누구를 핍박하고 있습니까?

누가 누구의 원수로 행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브라함의 자손의 원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고 있지요.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의 세 번째 아내 그두라의 자손들인 미디안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액스트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삭의 자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야곱의 자손이 아닙니다.

이들은 멸망의 대상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만 구원하심을 알려 주시기 위해 미디안 족속을 만드셨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슨 짓을 했느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멸망받을 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결정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하면 멸망받을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물러나 있습니다. 거리를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면 이들이 이스라엘을 치는 몽둥이로 사용됩니다. 물론 이 몽둥이는 멸망받을 몽둥임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면서 멸망받을 몽둥이임이 드러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심히 미약하게 된 이유는 여호와 목전에서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이 다시 강하게 될수 있을까요?

쉽게 합시다.

1번 회개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

2번 부르짖는다.

몇 번일까요?

잘 모르겠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으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너희의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었을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어떤 반응일까요?

여러분 이스라엘이 부르짖었다는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다, 이것 아닙니다.

찾기는 뭘 찾아요. 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밖에 볼 수 없는고 하면 부르짓었지요.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셔서 왜 너희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였느냐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면 어떻게 반응이 나와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우리가 청종치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겠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미디안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런 이스라엘의 반응이 없어요.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상 사사를 세우십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우리들이 사고 체계와 맞습니까?

맞지 않지요.

살기 힘들어서 부르짖었다. 이것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그러면 우리생각에 이 부르짖음이 여호와를 찾는 부르짖음이라 생각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했다면 먼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았습니다가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 너희들이 나의 말을 청종치 않았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들의 사고체계와 성경이 안 맞아요.

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청종치 않았다라고 했으면 네,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대뜸 사사를 세워주십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신앙생활하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인들은 어떻게 신앙생활합니까?

저 예수님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용서해 주세요. 예수님 뜻대로 살게 해 주세요. 그래서 말씀대로 살아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해 주세요.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하지 않습니까?

날마다 자기를 돌아 보아서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도움을 구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까?

오늘 하루도 주님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았음을 한탄하면서 주님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언제나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신앙생활을 꿈꾸며 살아가지요.

오늘날 교회에 가면 다 이런식으로 설교를 하지 않습니까?

노력하는 인생, 그보다 더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은 없지요.

그 이유가 무엇을까요?

바로 성경아닙니까?

마태복음 25장1-13절을 보면 열 처녀 비유가 나옵니다.

사람들이 이런 본문을 보면서 뭐라고 결론 내립니까?

여러분 깨어 있으세요. 깨어 있어야 예수님을 만납니다.

기름을 넉넉히 준비해야 합니다.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기름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기도입니다. 여러분의 헌신입니다. 여러분의 헌금입니다. 여러분의 봉사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준비할 때 신랑되신 예수님을 맞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설교하지 않습니까?

성경을 볼때도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보지 않고 다르게 볼 방법이 있습니까?

성경을 읽게 되면 성경이 어떤 식으로 다가 옵니다.

온천지 법입니다.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법이지요.

그러니 노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열처녀 비유를 설교하면서 인간의 열심을 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인간이 하는 일이 기껏해야 부르짖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준이 낮아서 그랬을까요?

이들이 율법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선지자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말씀을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는데 왜 회개하지 않고 부르짖을까요?

그것을 인간의 본모습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리 앞당겨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용하셔서 인간의 본모습, 즉 첫째 아담안에 있는 자들의 본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첫째 아담안에 있는 자들의 본모습은 어떠하다. 기껏해야 부르짖는 것입니다. 즉 가인의 외침이지요.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 없습니다. 오직 자신들이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어디를 보아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첫째 아담안에 있는 자들의 관심은 자기 몸 편하게 살기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한번 보세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누구를 세우셔서 구원하십니까?

바로 사사를 세우십니다.

기드온을 세우셔서 구원하십니다.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을 짓을 해서 구원해 주는 것이 우리들의 상식아닙니까?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구원받을 짓, 적어도 회개는 해야 구원해 주는 것이 우리들의 상식아닙니까?

그냥 살고싶다고 해서 구원해 주신다는 것은 도무지 우리 인간들이 받아 들일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구원받을 건더기가 있어야 구원될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 천국에 갈려면 뭔가 껀덕찌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네까?

예를 들면 예수님을 믿는다든지, 아니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한다든지 말입니다.

아니면 기도를 하든지, 성경을 읽든지, 헌금을 하든지.

이런 것들이라도 있어야 천국갈 근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것들이 전혀 없어요.

오히려 그들의 악한 면만 더욱 돋 보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빌립보서4장18절에 보면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말이 어떤뜻일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사는 삶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삶이라 생각되지 않습니까?

특히17절을 보면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이렇게 말씀하니 당연히 본이 되는 삶이 떠오르지요.

그러면 본이 되는 삶이 어떤 삶입니까?

여러분 바울을 본받아서 삽시다라고 하면 어떤 생각을 합니까?

새벽기도 빠지지 않기, 주일 성수하기, 십일조 하기, 교회 봉사하기 , 전도 하기, 성경 읽기.

아마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이런 것 외에는 생각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면 세상에서 윤리적으로 살기, 불의를 행치 않기 등등.

그런데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이런 일들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수 있는 일 아닙니까?

그러면 천국가기 쉽지요.

이렇게 해서 천국 갈수 있다면 바리새인들이 천국갔지 않겠습니까?

제가 너무 수준을 낮게 잡았습니까?

그러면 수준높은 바울 본받기는 무엇입니까?

선교사로 나가기입니까?

이것도 별거 아니지 않습니까?

자신이 믿는 종교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자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러면 바울을 본받으라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이미 빌립보서2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바울 개인의 삶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삶은 바울 개인의 삶이 아닙니다.

빌립보서2장5-11절을 봅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말씀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마음을 품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라고 하지요. 그 마음은 하나님의 본체셨지만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그러니 너희들도 예수님을 본받아라 이렇게 나와야 하지요.

그런데 어디로 흘러버립니까?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흘러버립니다.

그러니 이미 주님되신 분이 따로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너희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되신 예수님께서 오직 주님되신 예수님만을 전하도록 성도를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노력하고 수고해서 주님께 영광돌리는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사람이 일이 되지요.

예수님의 마음을 인간이 어떻게 품겠습니까?

품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예수님의 삶을 살게 하신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삶은 언제나 인간 자신이 부인되면서 예수님의 삶이 흘러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게 제가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이스라엘의 죄악과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이 겹쳐집니다.

죄 없다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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