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강해 22 들릴라와 삼손

푸른 섬 2012. 5. 27. 14:17

사사기 강해22

들릴라와 삼손의 죽음




음성설교


사사기16장1-31

삼손을 지난 두 주간 동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린 무슨 생각을 하게 됩니까?

그래 그 정도 했으면 이제 삼손이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는가라고 말입니다.

특히 나귀의 턱뼈로 천명을 죽인 후 목 말라 죽을 뻔 할 때 한 기도 생각나십니까?

15장18절입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

그렇게 신나게 노래까지 부른 후 목말라 죽겠다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샘이 터졌지요. 엔학고레라고 말입니다.

이정도 되면 삼손의 삶이 변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16장 시작부터 가사에 있는 기생에게 내려갔습니다.

기생집에 들어갔지요. 여러분 상상이 갑니까?

삼손은 나실인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신이 늘 함께 하는 자가 아닙니까?

16장에 나오지요. 그는 늘 힘이 강한자로 살았습니다.

그 근원이 머리카락에서 나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머리카락이 잘리고 난 뒤에 강한 힘이 사라졌다는 말은 머리카락이 잘리기 전에는 언제나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자신이 나실인임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16장17절을 봅시다.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삼손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행동하는 것을 보면 어떻습니까?

과연 나실인 답게 행했습니까?

아니지요.

나실인 삼손이 이렇게 살았다는 것은 당시 다른 사람들의 삶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생존, 행복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옳다고 생각되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을 다스려야 하는데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놀고 있습니다.

삼손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삼손의 행위를 보게 되면 모태에서부터 나실인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머리를 깍지 않아 힘이 있다는 것, 이것을 알고 무엇을 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삼손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았습니다.

힘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삶을 살았지요.

힘이 없었다면 감히 겁이 나서 블레셋 지역으로 가겠습니까?

절대로 갈수 없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자신이 힘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자신의 머리카락에서 비롯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용하여 삼손은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왜 기생에게 들어갑니까? 제가 삼손을 하면서 몇 번이고 말씀드렸습니다.

나실인이면 나실인 답게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목사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성도는 성도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법조항들을 갖고 와서 사람들을 괴롭게 만들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삼손을 보면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그렇지요. 삼손처럼 살면 안돼요. 삼손처럼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았아요.

단지 우리가 삼손을 본받을 부분은 그가 눈이 뽑혀 잡혔을 때 기도하는 모습, 자신의 죽음으로 원수들을 죽이는 것은 본받읍시다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도 문제가 있지요. 만일 이것을 본받으려면 눈알이 뽑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

삼손은 이리 저리 골치 아픈 인물 아닙니까?

그런데 히브리서 에서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넣어 놓았다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삼손이 밉겠어요. 아마 성화를 주장하는 자들은 삼손을 설교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면 이렇게 주장하겠지요. 우린 완전하지 않아요. 그러나 삼손처럼 죽을 때에 완전해져요.라고 하겠지요.

이것도 본문말씀과 맞지 않아요.

죽을 때 삼손이 완전해 졌다는 말이 안 나오잖아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삼손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말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종교적 욕망을 채우는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삼손을 보더라고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사람이 될까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 읽어도 깨닫지 못하지요.

삼손의 모습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전혀 본이 안 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희한하지요. 삼손은 자신이 좋아서 가사에 있는 기생집에 들어갔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삼손은 알아요. 자신이 힘이 얼마나 센지.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원한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그러나 삼손은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자신의 힘이지요.

그러니 아무리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죽이려고 해도 삼손 자신을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 가사에 있는 기생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매복하여 새벽에 삼손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한밤중에 일어나 성문짝을 문기둥, 빗짱 통째로 빼어 어깨에 매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가져갔습니다. 힘이 장사지요. 그냥 집문이 아닙니다. 성문짝입니다.

아무리 작아도 어느 정도 크기겠습니까? 왜 이렇게 했을까요?

쉽게 말하면 까불고 있어라는 태도 아닙니까? 덤비려면 덤벼보라는 태도 아닙니까?

이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 하는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이 여인이 유대인인지 아니면 블레셋 사람인지는 알 수 없어요. 그러나 이 여인이 사는 위치가 블레셋 땅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 여인을 유대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또한 들릴라가 은 일천 일백 개 즉 은 일천 세겔을 말합니다. 한 세겔은 4일 노동임금입니다. 10년 동안 하나도 쓰지 않고 모으기만 해야 하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이 돈을 받고 삼손을 넘겼다는 사실을 볼 때 이 여인이 만일 블레셋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전에 여인에게 협박을 한 경우는 있었지요. 그런 경우엔 블레셋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들릴라는 유대인입니다. 그러니 돈밖에 모르는 시대를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겐 돈으로 매수하는 방법이 최고겠지요.

그래서 저는 들릴라를 유대인으로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 보지 않게 되면 들릴라가 돈을 받고 삼손을 팔았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블레셋여인이라면 어차피 삼손과는 원수관계가 아닙니까? 그러니 그렇게 많은 돈을 받고 팔 이유가 줄어들지요.

또한 들릴라가 삼손을 사랑했다는 것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삼손을 사랑했기 때문에 돈으로 들릴라를 매수했다면 이해가 되겠지요. 그러나 본문에서는 삼손이 여인을 사랑했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블레셋 방백들이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인 이유가 분명해 지지 않겠습니까? 들릴라가 유대인이라는 사실 때문일 것입니다.

들릴라는 고민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어요.

돈을 준다고 하니 들릴라가 삼손에게 곧장 묻습니다.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굴복하게 살 수 있을는지 자신에게 말해달라고 합니다.

삼손이 대답합니다. 7절입니다.

“삼손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참 신기하지요. 블레셋 사람들도 생각했어요. 삼손을 제어할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게 참 이상한 것 아닙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힘을 머리카락과 상관없이 주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머리카락과 상관있게 하셨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면 힘이 계속 있어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면 되지 않습니까?

왜 함께 죽어야 하느냐 말입니다. 이게 사람들의 생각 아닙니까?

실패 했습니다.

두 번째 또 들릴라가 묻습니다.

10절입니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보라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청하건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이제는 내게 말하라”

이번에서 새 밧줄을 사용하라고 하지요. 그러나 또 실패했습니다.

세 번째 묻습니다.

13절 함께 읽어 봅시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그러자 삼손이 이번에는 머리털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러나 역시 거짓말 했지요.

그러자 들릴라가 뭐라고 합니까?

15절 함께 읽어 봅시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들릴라는 삼손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삼손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삼손의 사랑을 이용하지요.

날마다 이 말로 삼손을 재촉합니다. 나를 사랑한다면서 내 진실을 말해주지 않아요.

날마다 이렇게 말해 보세요. 남자 미칩니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입니다. 왜 번뇌할까요?

사랑 때문이지요. 삼손이 들릴라를 너무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랑을 힘이 세다고 자기가 어떻게 조절할 수 있습니까? 자기 마음을 자신이 조절할 수가 없어요.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는 말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삼손을 이해해 주어야 해요.

삼손은 드디어 진실을 말합니다.

사랑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습니다. 물론 그 사랑은 삼손의 사랑이지요. 들릴라가 삼손을 사랑한 것은 아니잖아요. 삼손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한 것입니다.

여인은 이용하려고 했을 뿐인데 삼손은 그것을 사랑으로 생각한 것이지요.

삼손의 머리카락이 밀려버렸습니다.

들릴라가 블레셋 사람들을 부릅니다.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왔습니다.

들릴라가 돈에 환장한 여자인줄 아시겠지요. 성공할 때 까지 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세 번정도 실패하면 양심의 가책이라도 있을 텐데.

삼손이 뻔히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러나 돈이 우선입니다.

18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그 여인에게로 올라 오니라 라고 기록하지 있습니다.

강조해서 읽어야 할 부분이지요.

삼손의 힘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이 사실을 몰라요.

자신의 머리카락과 함께 힘이 사라진 사실, 즉 여호와께서 자신을 떠나신 사실을 알지 못했어요.

왜 그럴까요? 단지 머리카락 잘랐다고 문제가 되나요. 삼손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머리카락이 뭐냐고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단지 나실 인으로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을 뿐이잖아요.

머리카락 없는 삼손과 있는 삼손이 다른 삼손인가요?

같은 삼손이잖아요. 삼손은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들릴라가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잡으러 왔다고 했을 때 삼손은 예전의 힘을 쓸 수가 없었어요. 여호와께서 삼손을 떠나셨습니다.

삼손은 두 눈이 뽑혔습니다. 가사로 끌려가 놋줄에 매여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여전히 삼손을 두려워하고 있지요. 그러니 눈이 빠졌는데도 놋줄에 매여 놓고 있으니 말입니다.

22절을 봅시다.

“그의 머리털이 밀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의도적으로 이 말씀을 기록해 놓지요.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들이 기대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삼손이 다시 힘을 얻어 이제 제대로 된 사사 역할, 구원자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지요. 그러나 이것이 마귀의 생각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신이 났습니다.

23,24절 봅시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 하고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이르되 우리의 땅을 마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주었다 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

보세요. 블레셋 사람들은 알고 있어요. 삼손이 지금까지 한 일이 어떤 일이었습니까?

자신들의 신 다곤을 치는 일이었습니다. 곧 자신들을 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어요. 삼손도 단지 개인적인 원한 관계로 생각했을 뿐이에요.

오히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 즉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통해서 삼손의 행한 일이 여호와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블레셋 손에서 구원하신 일임을 알게 하시지요.

블레셋 사람들은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삼손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의 대상이었는지 엿볼 수 있는 장면이지요.

너무나 즐거워서 삼손을 불러다가 자신들을 위해 재주를 부리게 합니다. 삼손이 재주를 부립니다. 무슨 재주를 부릴까요? 눈이 안 보이는데. 블레셋 사람들의 놀림감 되었습니다.

이때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부탁을 합니다. 이 집, 즉 신전을 버티는 기둥을 찾아 그것에 의지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블레셋 모든 방백들과 지붕에는 남녀 삼천 명 가량이 삼손의 재주 부리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28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문제의 원인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자신에게 있지요. 또한 들릴라에게 있잖아요.

그러나 자신의 문제점은 알아 차렸습니다. 그러나 들릴라에 대한 원망은 없어요.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들릴라에 대한 원망이 나와야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들릴라를 죽여 버리겠다가 없어요.

단지 삼손은 자신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블레셋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기를 원합니다. 신전을 버틴 기둥을 무너뜨리니 신전 전체가 무너져 버렸습니다. 삼손도 죽고, 블레셋 모든 방백들과 삼천여명의 백성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삼손을 이렇게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블레셋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돈을 받고 판 들릴라도 포함됩니다.

들릴라의 모습은 이전에 레히에 삼손을 잡으러 온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사용하셔서 이런 악한 이스라엘을 블레셋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먹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이런 큰 구원입니다.

갈라디아서1장4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구원받은 성도는 악한 세대가 어떠한지를 아는 자들입니다.

악한 세대는 십자가의 피를 거부하는 세대이지요.

이들은 자신들의 수고, 열심, 땀을 내세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붙들고 있는 것을 율법입니다. 즉 자기 행함이지요.

이들이 전하는 것은 사람을 좋게 하는 것입니다. 누가 들어도 기분좋은 복음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이지요. 이들은 죄를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기 몸을 주신 것도 사람의 기쁨을 위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우리 죄를 위해 자기 몸을 주신 것은 오직 십자가 지신분만이 영광받기 위한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삼손이든 모두를 죄 아래 가두어 두신 것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만 영광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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