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사사기강해 24 미가와 레위청년

푸른 섬 2012. 6. 10. 13:18

레위청년과 미가

사사기17장7-13

7절을 보겠습니다. “유다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

여호수아13장14절을 봅시다.

“오직 레위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었으니 이는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음이더라”

이 본문은 여단 동쪽지역을 므낫세 반 지파와 르우벤, 갓 족속에서 기업으로 주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13장33절에서 한 번 더 말씀하게 계십니다.

“오직 레위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레위지파는 기업을 받지 못했습니다. 즉 돈 되는 땅을 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야 말로 기업이지요. 사업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업이 있지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업이다라고 하면 듣기 좋습니까 나쁩니까?

굉장히 듣기 좋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업이다. 나의 기업이다라고 하면 얼마나 기분 좋습니까?

그렇다면 기분 좋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의 소망을 이루어 주실 분이라 생각되기 때문이지요. 나를 든든히 받쳐주고 지지해 주고 실패하지 않고 성공케 해 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돈을 주시고, 건강이 없으면 건강을 주시고, 자식문제 해결해 주시고, 남편 문제 해결해 주시는 분.

앞길이 정말로 평안한 삶을 보장해 주시는 분.

그런데 병행구절인 14절을 보게 되면 기분이 달라집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음이더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업이 되시는 것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기업이 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업이 되신다는 말씀을 들으면 든든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기업이 된다고 하면 불안하지요.

왜 그럴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제물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굶어야 됩니다. 굶어 죽을 수도 있어요.

이렇게 보게 되면 레위지파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나머지 지파들은 자신들의 땅이 있어서 농사도 지을 수 있고 또한 양, 소를 기를 수가 있어요.

그런데 레위지파들에는 이것이 금지 되어 있어요.

여호수아14장4절을 보면 “요셉 자손은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두 지파가 되었음이라 이 땅에서 레위 사람에게 아무 분깃도 주지 아니하고 오직 거할 성읍들과 가축과 제물을 둘 들만 줄 뿐으로”

거할 성읍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가축과 제물을 둘 들만 있어요.

쉽게 말하면 빈 창고, 빈우리만 있지요. 물론 자기 집은 있어요.

민수기18장20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 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희한한 말씀이지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업이시고 분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나와야 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만나를 내리듯이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 줄게라고 하셔야 하지요.

이게 우리들 마음이지요.

그런데 뭐라고 하십니까? 21절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22절 봅시다.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니 이는 죄를 당하여 죽을 까 하노라”

회막에는 오직 레위자손만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지파들은 가까이 하면 죽어요. 왜. 그럴까요? 죄 때문입니다.

23절입니다.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는 자들입니다.

레위인들이 회막에서 봉사하는 일이 없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인으로 죽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레위인들이 회막에서 봉사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살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레위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용서 받은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십일조와 회막, 즉 성전에서 하는 일을 맞바꾸는 것입니다.

만일 레위지파가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이 없다면 이스라엘백성에겐 저주, 죽음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레위지파는 누가 먹여 살립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먹여 살리시지요.

왜냐하면 여호와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지파에게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레위지파를 어떻게 먹여 살리십니까?

이스라엘의 십일조로 먹여 살리십니다.

꼭 이스라엘의 십일조라야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먹여 살리시지 않습니다.

이 내용을 알고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7절을 보면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소년이 있으니 그는 레위인으로서 거기 우거하였더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들이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여호수와에 나오는 땅 분배입니다.

여호수아15장입니다.

유다 지파가 제비뽑아 얻은 땅들이 나옵니다.

이 땅 안에 누가 거주합니까? 레위지파 사람들이 거주하지요.

여호수아20에서는 도피성이 나옵니다.

7절을 보면 “무리가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아르바 곧 헤브론을 구별하였고”

여호수아21장에는 레위지파 사람들이 거할 성읍과 가축을 먹일 들을 분배받습니다. 10절을 보면 헤브론과 그 사면 들을 레위 자손중 그핫 가족들에 속한 아론 자손이 받은 땅입니다.

베들레헴은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27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7절을 보면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이 있었으니 이는 레위인으로서 거기서 거류하였더라고 합니다.

레위 청년이 9절에서 자기소개를 한때 자신이 유다 베들레헴 레위인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볼 때 레위지파에게 땅을 분배해 주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유다 베들레헴에 잠시 머물러 살았던 모양입니다.

거류하다는 표현이 잠시 머물러 살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레위청년의 모습을 볼때 이 뜻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유대땅 베들레헴에서는 먹을 것이 나오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먹고 살기위해 길을 떠납니다.

레위 청년이 미가 집에 머무는 것을 보게 되면 먹을 것 때문이지요.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겠다는 제의에 동의했습니다.

은 일천백이 십년월급같으면, 은 백이 일년월급정도됩니다. 그런데 일 년에 은 열을 받고 옷 한 벌에 식물을 주겠다는 제의에 두말없이 동의했습니다. 이것은 레위 청년이 왜 베들레헴에서 거할 곳을 찾아 에브라임 산지로 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는 먹고 살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왜 먹고 살수가 없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십일조를 누가 주신다고 하셨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지파에게 주신다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아 레위인들에게 십일조가 오지 않는 것은 누가 십일조를 주시지 않은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주시지 않았지요.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고요.

그러나 레위지파는 이스라엘사람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레위지파에게 십일조를 주시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해야 하겠지요.

즉 정말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들의 기업임을 믿고 사느냐를 물으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레위청년은 어떻게 해석합니까?

하나님의 율법에 관심이 없습니다. 말씀에 관심이 없어요.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십일조가 드려지지 않으니 먹을 것이 없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먹을 것을 찾아 나서야죠. 이게 레위청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먹을 것을 찾아 나섰는데 그가 어떤 행동을 합니까?

먹을 것을 위해 , 돈을 위해 미가집 제사장이 됩니다.

미가는 레위청년을 어떻게 대합니까?

돈으로 레위청년을 자기 집 제사장으로 고용합니다 .

미가의 태도를 보세요. 레위인을 거룩히 구별하여 소년이 미가의 제사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레위인을 그냥 제사장으로 삼았던 것이 아닙니다.

나름 정성을 다합니다.

나름 말씀을 지킵니다. 그래서 거룩히 구별하여 자기 집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미가는 횡재했습니다. 헐값에 제사장을 고용했습니다.

그러고는 미가가 뭐라고 합니까?

13절을 함께 읽어 봅시다.

“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자기 생각에 한 가지 아쉬운 점, 즉 레위인으로 제사장 삼는 것 , 이것이 아쉬웠어요.

그런데 이제 이 아쉬운 점도 제대로 채워지고 제법 구색을 갖추었습니다.

나름 율법대로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이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라고 합니다.

레위지파의 본래 의무가 무엇입니까?

죄용서와 관련된 일을 해야 하지요. 그런데 이 일이 밥벌이가 안 됩니다. 먹고 살수가 없어요.

그래서 축복빌어주는 가정집 제사장으로 취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셨습니다.

십자가 지기 위해 오셨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을 해결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주님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주님이심을 전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율법이든 뭐든 성경 전체가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청년이나 미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을 전하는 말씀으로 대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더 많은 축복을 위해 이해하고 적용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의 입에서 십자가 복음이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십자가 설교 연속으로 4주하면 쫓겨나요 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설교를 해야 쫓겨나지 않을까요?

축복, 위로, 치유 설교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에 찾아가서 설교를 할 때에도 그 가정이 축복받는 설교와 기도를 해야 하지요.

목사들이 심방 가서 무슨 설교하겠어요. 십자가피를 전하는 설교를 할까요?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피를 전하면 다음부터 부르지 않아요.

그 성도가 수고한 것을 칭찬해 주고, 지금의 상황이 다 하나님의 뜻이며 더 큰 축복을 주실 것을 설교하고 기도해주어야 제대로 된 심방이 됩니다.

이것은 그야 말로 미가와 레위 청년의 관계이지요.

이렇게 함으로 결국 노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사의 생존문제 해결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목사정년이 75세랍니다. 십자가복음만 제대로 전하면야 죽을 때까지 해도 되지요. 그러면 목사들이 왜 법을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생존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생존밖에 없어요. 물론 여기에는 더 윤택하게 사는 삶도 포함되지요.

성도들은 60세 전후에 은퇴하는데 자신들은 75세까지 보장받겠다는 것이지요.

성도들은 이런 목사에게 월급주면서 무엇 해 달라고 합니까?

축복을 빌어 달라는 것입니다. 저주를 다 차단해 달라는 것이지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합심 기도 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무엇을 원합니까?

주님께서 복주실 것을 원하지요.

마치 미가가 말했듯이 주님께서 이제는 복 주실 것을 안다. 확신한다는 말입니다.

목사든 교인이든 둘 다 생존에 미쳐 있고, 축복에 미쳐 있습니다.

성전에서 죽임당하는 어린양에는 관심이 없어요.

레위인들은 자신들이 희생제물이 되어야 하는데 이런 것은 싫어합니다.

목사들, 성도들은 자신들이 희생제물이 되어야 하는데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원하는 것은 남을 희생시켜 자신이 축복을 받는 것뿐입니다. 그 대상이 목사가 되던 교인이 되던 하나님이 되든, 예수님이 되던,

무엇이든지 이용해서 축복만 받으려고 해요.

진정한 축복은 십자가 복음이 믿어지는 것인데.

자신이 레위인으로 부름 받은 것이 축복임을 알지 못하는 자는 저주 받은 자입니다.

목사들은 결국 무엇을 노리고 설교할까요?

갈라디아서 2장4절입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거짓 형제들은 결국 자기 종 삼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피 복음만을 전하지 않고 사람의 행위를 전합니다.

성경 말씀을 따라 행위를 해야 축복받는다고 가르치지요. 말씀을 따라 행위를 해야 천국들어갈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말씀을 따라 행위를 해야 천국 가서 큰 상급 받는다고 가르쳐요.

이렇게 말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기 종삼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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