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그리고 영광
음성설교
로마서8장18-25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특징은 어떻게 드러납니까?
아빠 아버지라 부르짓는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 즉 우리 육신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합니다.
그 증거하는 모습의 대표적인 예를 사도바울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상속자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간단하지요. 여러분의 부모님이 계시는데 부모의 상속자라면 부모가 가진 것을 그대로 다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차이점이 있지요. 이땅은 부모가 죽어야 상속자가 결정됩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상속자는 거꾸로 입니다. 고난 받고 죽는 자가 상속자입니다.
17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는 말씀을 하셨지요.
이 말씀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동등하게 대우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래서 고난 받고 죽으심으로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성도는 어떠합니까?
역시 자녀이며 상속자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자녀이고 상속자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자녀요 상속자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천국에서 주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결과가 초래되겠지요.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성도가 왕노릇하지만 주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왕노릇입니다.
지금 로마서8장17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라는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똑 같은 길을 걷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고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성도는 누구의 증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들은 당연히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만을 전하는데 왜 고난이 따릅니까?
오늘본문 18절을 보면 “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생각하건대라는 말은 헬라어를 보게 되면 계산하는 것입니다.
왜 계산이라는 말이 나올까요?
왜 굳이 계산을 해야 할까요?
그것은 현재의 고난 때문입니다. 현재 고난이 너무 심하기 계산을 해 보는 것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현재의 고난을 비교합니다.
그런데 장차 성도들에게 나타날 영광과 현재의 교난이 비교됩니까 되지 않습니까?
비교불가능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문제는 현재 당하는 고난이 장난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먼저 왜 예수님의 자녀가 고난을 당하는가? 그 이유를 우리들이 알아야 하겠지요.
예수님께서 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이 질문은 너무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자녀된 자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그 고난을 성도가 당하게 되어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왜 유대인들이 헤롯왕이,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첫째 율법을 너무 잘 지키셔서.
둘째 율법대로 너무 착하게 사셔서.
셋째 하나님의 말씀에 너무 충실하게 사셔서.
넷째. 자신을 믿어야 구원 얻는다고 해서.
정답이 다 맞는 것 같지요. 그런데 저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는 자신을 믿어야 구원 얻는다고 해서 죽였습니다. 저들은 믿을 것이 누구밖에 없습니까?
자기 민족, 자기 국가, 자기 자리,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모든 자리를 위태롭게 하셨습니다. 예수님만 제거하면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유월절날도 상관없습니다. 기여히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자리 지킴이 문제가 생깁니다.
지금까지 기도한 것이 헛것이 됩니다.
지금까지 십일조 한 것이 헛것이 됩니다.
지금까지 율법 지킨 것이 헛것이 됩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말씀을 외운 것들이 헛것이 됩니다.
지금까지 말씀을 두렵게 대하고 하나님을 경외한 것들이 헛것이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이 헛것이 됩니다.
지금의 평화를 누리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인도 이것조차 헛것이 됩니다.
지금까지 봉사한 것이 헛것이 됩니다.
지금까지 피땀 흘려 쌓아온 자리가 헛것이 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삼년동안 따라 다닌 것들이 아무런 소용없고 보상도 못 받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다닌 삼년이 허송세월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현재 죽음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추어졌던 죄를 드러나게 할 뿐만 아니라 죄를 짓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율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적으로, 상식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이렇게 볼 수 있느냐 말입니다.
지금 로마서에서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께서도 하신 말씀과 동일합니다.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도 예수님을 증거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 차분히 정리해 봅시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말이 왜 고난을 가져옵니까?
반대로 왜 핍박을 가져옵니까?
일차적으로 먼저 생각해 봅시다.
사도바울을 통해 로마교회에 지금 복음을 전하고 있지요. 그런데 만일 이곳에서 사도바울을 통해 하시는 말씀에 아멘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즉 예수님을 믿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던지, 아니면 예수님을 믿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말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을 믿어도 절기는 꼭 지켜야 한다. 특히 안식일은 꼭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사건이 어디에 나타납니까?
로마서에서는 나타나지 않지요. 그러나 갈라디아서를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17절을 보면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이들의 특징은 열심히 일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10절을 보면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라고 하시죠.
이들은 누가 봐도 예수님을 믿는데 열심인 자들입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모습.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구약도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셨지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도 지켜야 하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지금도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이 이 땅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시대에도 똑 같이 있었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이들의 주장이 뭐가 문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자는데, 그것을 열심히 지키자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안 들어요. 율법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한다고 하셨으면 그 말씀에 아멘 해야 하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다 이루셨다는 말씀을 이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하는 짓이 결국 자기 종 만드는 짓임을 주님께서 미리 사도바울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놀랍지 않나요. 율법을 주장하는 자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궁극적 노림수는 자기들 종 만드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21절 이하에서는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은 육체를 따라 난 자 곧 여종에게서 난 자라고 규정합니다. 이들이 누구를 핍박합니까?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난 자, 곧 약속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합니다.
그래서 4장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지금 로마서 8장에서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고난을 받는다고 했지요.
그런데 왜 고난을 받는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있어요.
그러나 고난을 받는 이유를 충분히 지금까지 말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해요.
십자가의 피만이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라고 외치는 것이 핍박을 받을 이유임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먼저 누구로부터 핍박을 받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 물론 당시에는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었지요. 그러나 갈라디아서로 가게 되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핍박을 합니다. 말씀이 참 희한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핍박하는 것을 기초로 하여 이 핍박은 단순히 이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 모두 다 예수님 믿는 자를 핍박하는 자들임을 가장 앞장서서 보여주는 자들이지요.
마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때 헤롯왕이 끌려 들어오소, 본디오 빌라도가 끌려 들어온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쓰면서 이 복음대로, 즉 십자가의 피만을 전하게 되면 너희들이 현재 이 땅에서 얼마나 큰 고난을 받아야 되는지를 아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고난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로마서를 읽고 깨닫는 참 성도들은 자신들에게 닥칠 고난을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18절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계산해 보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눈에 보이는 것은 고난입니다. 나타날 영광은 믿음의 세계에 있지요. 그러나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지요. 그래서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18절 말씀을 들으면서 얼마나 크게 아멘 하겠습니까?
계산해 보건대 현재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얼마나 기쁜 말씀입니까?
그런데 갑자기 피조물 이야기를 꺼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랍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 마치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피조물이 다시 첫 창조 때처럼 회복되기를 바라는 듯 한 느낌을 줍니다.
계속 봅시다. 20-22절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을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피조물은 지금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는 상태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굴복이 스스로 굴복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랍니다.
이런 상태에서 피조물이 바라는 것이 있답니다. 즉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그래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격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나요 몰랐나요?
22절에서 사도바울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다 안다고 하는데.
지금 해와 달 나무, 풀, 동물들, 온 우주가 탄식하고 고통 속에 있답니다.
피조물을 어디에 집어 넣어버립니까?
예수그리스도 안에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탄식속에 피조물들을 집어 넣어버렸습니다.
골로새서1장16절을 봅시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님을 위해 창조된 만물입니다. 온 우주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위해 창조 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굴복케 하시는 분에 의해 굴복당해 탄식하며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누구와 함께 탄식하며 고통을 겪습니까? 이들도 역시 주님의 탄식과 고통을 증거하는 증거물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온 세상이 죄악된 세상으로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피조물들이 증거합니다.
이 뿐만 아니지요. 예수님을 선물로 받은 성도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립니다. 여기에서 속으로 탄식한다고 했지요. 이것은 성령의 탄식입니다.
썩지 않을 몸을 입을 것을 기다리는데 중요한 것은 탄식 속에 성도가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것과 성도의 고대하는 것이 일치하지요. 뿐만 아니라 기다리는 동안 탄식과 고통도 일치합니다.
그런데 어느 누고 다른 피조물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탄식하는 해, 탄식하는 달, 고통당하는 별, 고통당하는 은하계, 고통당하는 나무, 고통당하는 풀, 개, 닭, 탄식하는 우주, 동물들.
세상이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는지 주님께서는 여기에서 분명히 밝히고 계시지요.
결국 성도는 탄식 속에서 몸의 속량을 기다리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응원자가 피조물이지요.
참으로 황당한 말씀을 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24-25절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무엇입니까?
참음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에게 어떤 일이 있습니까? 탄식과 고통이 있지요. 즉 고난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즉 구원이란 믿음의 세계에 속했습니다.그러니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라고 하면서 보는 것을 누가 바라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고난 속에 있으면 이런 말씀을 하시겠습니다. 소망이 없다는 말은 이 땅에 살기 좋다는 말이 됩니다.
이 땅에 살기 좋다는 것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제거할 때 나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보지 못하는 것을 소망하는 자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소망한다는 말은 곧 십자가의 피만을 자랑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겐 고난이 따르지요.
설교 서론에서 기도하고, 전도하고, 말씀 지키고, 순종하고, 율법 외우고, 십일조 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고 이런 것들을 전한다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핍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을 전하기 때문에 성도에겐 고난이 따릅니다.
그러나 성도는 참음으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는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