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형상 본받게 하기 위하여
음성설교
로마서8장26-30
오늘 본문 26절에서 이와 같이 성령도 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이와 같이라는 말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피조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탄식하고 고통을 겪으면서 무엇을 기다린다고 했습니까?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을 기다립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피조물들이 처음 창조 때의 영광을 다시 찾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베드로 후서3장7절을 봅시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피조물들은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보면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따라서 로마서 8장에 나오는 피조물들의 탄식과 고통은 아들들을 응원하는 탄식과 고통이라는 말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역할이 끝날 때까지 자신들의 해야 할 일, 즉 주님의 백성, 성도들을 응원하는 차원에서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22절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라고 하셨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을 받은 성도입니다. 눈만 뜨면 보이는 것이 피조물이지요. 성도는 이 피조물을 보면서 이들의 고통과 탄식속에 있음을 압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오늘 본문 26절로 이어집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피조물만 성도를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도 응원하십니다.
지금 사도바울을 통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조금 후에 알게 됩니다.
성도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연약하다는 말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마치 이 말씀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 연약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조력자로 도우신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러나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로마서를 보게 되면 성령께서는 조력자가 아니라 친히 주관하시는 주님의 영으로 성령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로마서 6장19절을 할 때 연약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았지요.
로마서5장6절을 봅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여기에 나오는 연약이라는 단어가 부족하다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무얼해도 죄밖에 안 나오는 죄인, 즉 사망만을 결과물로 내어 놓는 삶을 사는 죄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8장26절에 나오는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말씀은 성령 없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특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라는 말씀을 하시지요.
이 말씀은 사도바울 자신에게 적용시켜보면 자신이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가 기도하십니까? 오직 성령께서. 여기에 오직 이라는 단어가 나오지요. 성령 외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 외에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기 때문에 그 기도의 응답으로 죄를 알고 예수님의 피를 믿고 산다는 말씀입니다.
27절에 보면 마음을 살피시는 이, 즉 아버지 하나님께서 성령의 생각을 아십니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이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는 내용이 건강하게 사는 것, 부자되는 것, 자식공부잘하는 것 이런 것일까요?
이런 것들은 마귀가 원하는 것이지요. 마귀가 예수님께 시험한 내용이 돈 많이 버는 것, 세상권세와 영광을 가지는 것, 능력을 보여 하나님 아들 행세하는 것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내용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28절을 봅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
여기에서 또 반복됩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이지요. 모르고 있으면 곤란합니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알고 있습니다. 무엇을 알고 있을까요?
성령님의 기도,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선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의 피을 전하는 것입니다.
29절에서 말씀하고 있지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도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입니다. 이들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아들의 형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외모 닮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십자가의 길이 아들의 형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이신 삶을 아들의 형상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모범이란 행위를 말합니다. 즉 윤리적인 것을 두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이 아닙니다.
만일 이런 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이 되어 버리면 지금까지 로마서의 말씀과 정면으로 충돌이 됩니다. 결국 행위가 나오게 되는데 행위는 반드시 율법과 짝을 이루지요. 그렇게 되면 죄인으로밖에 드러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을 그렇게 사용할 수 있을까요?
결국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형상 본받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잖아요.
아들의 형상은 곧 십자가입니다.
마태복음3장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사람들은 사랑하는 아들의 형상을 어떻게 규정했을까요?
돌로 떡덩이 만드는 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장정 오천 명을 먹이시는 분, 물위를 걸으시는 분, 파도와 , 바람을 잠잠케 하시는 분, 죽은 자를 살리는 분, 병을 고치시는 분 ,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분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생각했습니다.
삼년동안 따라다닌 제자들이 그러했지요. 이들이 그러했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 볼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누구의 생각이었습니까?
바로 마귀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16장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납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지요.
그러자 제자들이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수많은 기적과 능력을 눈으로 목격한 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내린 평가입니다. 이들은 성경을 알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도 이런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
그 다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제자들의 대표해서 대답하는 것입니다.
“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니 17-19”
베드로의 고백이 옳아요 옳지 않아요. 예수님의 칭찬을 보면 분명 베드로는 제대로 고백을 했지요.
베드로가 신났겠지요. 제자들도 신났을 거고. 그런데 이것을 알게 한 분이 누구랍니까?
예수님의 아버지가 알게 하셨다고 하지요.
이게 오늘 본문과 연결되어 있어요.
베드로는 아무것도 몰라요. 기껏해야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한 사람 정도로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아버지께서 예수님은 주님이시고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려주셨지요.
이 알려주심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사건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22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님 멱살을 잡고 항변합니다. 왜 그럴까요?
십자가 지셔 버리면 자신들이 어떻게 됩니까?
또한 이런 행동에 근거하여 볼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지시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려 주셨지만 베드로 자신은 십자가 지지 않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바로 고난 받고 십자기 지시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거부하는 행동이 사탄의 행동이며 곧 사람의 행동입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말씀의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십자가의 길이 참 하나님의 아들다운 모습, 즉 아들의 형상입니다. 어떤 사기꾼이 눈을 찍은 사진을 두고 예수님의 얼굴이라하는데 그런 사고 방식자체가 사탄의 생각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정하셨다는 말은 미리 정하심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되어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맏아들로 세우시기 위해 미리 정하신 자들을 맏아들이 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선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맏아들 전하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성령께서 기도하시고 조치를 취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일들도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성도는 이 말씀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길 수 있지요. 고난 중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염려가 들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자체를 주님께서는 거부합니다.
30절을 봅시다.
“또한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읽게 되면 신나지요. 그런데 이 말씀아래 깔린 베이스가 무엇입니까?
고난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시지만 결코 그 길이 실패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께서 친히 성도를 끌고 가셔서 반드시 모든 것을 협력시키셔서 선을 이루도록 만들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맏아들 되신 예수님을 높이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연약하여 빌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십니다. 그러니 성도는 누구에게 이끌려 살아갑니까?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삽니다.
그래서 앞서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지요. 그 말씀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이 무엇입니까? 성도는 실패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실패하느냐 성공하느냐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성도는 반드시 누구만을 전합니까? 맏아들 되신 예수님만을 전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합니까? 바로 맏아들이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 즉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전하는 것 때문에 예수님께 일어났던 그 일이 성도에게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이 모습이 아들의 형상입니다.
특히 30절에서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행위에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세계에 속한 것, 즉 주님께서 하시는 일 속에 들어감을 못 박아 버립니다. 미리 정하셨을때 이미 부르심과 의롭다 하심과 영화롭게 하심이 다 포함되어 버렸습니다.
따라서 태어나기 전부터 죽어서 천국가서 까지도 십자가의 능력이 어떠한 능력임을 증거하는 자가 성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