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말씀
음성설교
로마서10장1-10
며칠 전 영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마라톤 대회가 열렸는데 한 사람만 정해진 코스로 완주하고 나머지 5000명 모두가 실격이 되었답니다.
그 이유로 첫 번째는 길 안내 표시가 미비했고, 그래서 2등을 달리든 주자가 다른 코스로 달렸답니다. 그러자 나머지 모두가 다 2등일 달리든 길을 따라 달렸고, 그 결과 42.195킬로미터에 4백여 미터 모자란 거리를 달렸기 때문에 1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실격을 당했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도 그렇습니다.
원래 주님께서 말씀을 주신 의도와 달리 첫째 아담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에서 말씀을 해석합니다. 특히 이스라엘과 관련하여서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10장 1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9장을 살펴보면서 우리들은 무엇을 확인했습니까?
사도바울이 아무리 원한다 한들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9장3절에서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지라도 골육친척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이든 행위로 구원받을 인간이 없음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온 반발이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가 허물 있다. 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 그렇다면 어느 누가 하나님을 향해 대적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주체가 되지 못한다면 당연한 반발이지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 주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토기장이가 하나는 천히 쓸 그릇,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천히 쓴다는 말씀은 지옥 보낸다는 말씀입니다. 귀히 쓴다는 말은 천국 보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천히 쓸 그릇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으시고, 곧장 귀히 쓸 그릇이 곧 우리라고 해 버립니다.
9장24절에 나오지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이렇게 되면 귀히 쓸 그릇은 유대인 중에서와 이방인 중에서 부르신 자들입니다.
즉 유대인이 되었든 이방인이 되었던 그 중에 부르신 자들은 귀히 쓸 그릇, 부르심을 입지 못한 자들은 천히 쓸 그릇입니다.
그러면서 30절에서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부딪힐 돌에 부딪쳤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의의 법을 따라 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지 않은 내용이 있지요.
성경에서는 말씀하시지 않지만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다는 말씀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요?
이방인들은 모두 의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이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의를 얻은 자들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떠합니다.
이스라엘 모두 의의 법을 따랐답니다. 그러나 율법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행위를 의지 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에 부딪쳤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방인들은 뭐라고 주장하겠습니까?
여러분, 지금 로마서를 읽는 자들이 이방인들임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일차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자신들은 절대로 의의 법을 다르지 않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자신들은 오히려 로마서 9장 말씀에 의하면 구원받을 자격조건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의의 법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구원 얻을 조건이라 여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바울 자신이 다시 10장에서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
지금 여러분 이 말을 누구에게 하고 있습니까?
로마에 있는 이방인으로서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러면 로마에 있는 자들에게 왜 편지를 썼습니까?
로마서 1장11,12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워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로마서를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그런데 왜 사도바울이 자기 혈통이야기를 하느냐 말입니다.
혈통이야기 하는 것이야 말로 로마에 있는 자들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지금 로마교인들에게 너희들은 사도인 나 바울의 마음을 알아라. 내가 내 혈통이 얼마나 구원받기를 원하는지 알아라고 자신의 혈통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은 첫째로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했습니다.
이삭이 장자 에서가 무조건 축복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단지 이삭의 생각만이 아닙니다.
첫째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곧장 이들의 죄악을 지적합니다.
구원받기를 바라면 뭔가 좋은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9장4-5절에서는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지요.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그러나 이 말씀은 결국 이 좋은 것을 갖고 있는 자들이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다는 결론 아닙니다. 따라서 오히려 이런 좋은 것을 갖고 있다는 것이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얼마나 악한가를 드러냅니다. 오직 약속의 자녀의 씨 속에 들어갈 때 구원을 받습니다.
자기 혈통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은 되레 자기 혈통의 죄악을 더 심도 있게 드러내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10장에서 두 번째 다시 이스라엘의 구원을 언급하지요.
그러면 이번에는 뭐라고 말하는지 볼까요?
2,3절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있지요. 문제는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올바른 지식이 무엇일까요?
아마 백이면 백이 다 예수님을 믿는 지식을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생각이 누구의 생각일까요?
바로 유대인들, 이스라엘의 생각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왜 그렇게 율법을 지키려고 했을까요?
구약성경의 흐름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전이 있어도, 제사를 드려도 율법 지키지 않으면 멸망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죽자 사자 율법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지식, 즉 예수님을 믿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르칩니다.
유대인들의 문제점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문제점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는 올바른 지식을 따라 열심을 내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올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평가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고, 금식하고, 구제하고, 제사 지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것이요,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그냥 대충이 아닙니다.
아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복음서에서 유대인들을 살펴 볼 수 있지요. 이들이 그렇게 나쁜 자들입니까?
우리가 볼 땐 이미 그들을 악한 자라는 전제하에 보니 그렇지요.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결코 그들을 그런 악한 자들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조차도 그들은 당연히 천국갈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직면하게 되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사도바울이 자기 혈통이 그렇게 구원 얻기를 바란다고 해놓고 그 다음 하는 말은 철저하게 그 혈통의 죄를 고발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하나님께 열심히 있는 자들이 이런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있는 자들이 못 받아들인다면 의를 쫒지 않는 자들은 어떨까요?
그야 말하나 마나 아닙니까?
5절을 봅시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율법을 항상 온전히 다 지키는 자들은 그 의로 살 것입니다.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오히려 모든 인간들이 죄 아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율법은 오히려 죄를 더 짓게 만들지요.
10장으로 넘어오면 앞서 말한 말씀은 다 까먹어 버립니다.
마치 2등이 코스를 잘못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 5천여 명이 그 사람을 따라 달리듯이 말입니다.
첫째 아담을 닮아 자기가 죄인임을 몰라요.
그러면서 갑자기 아주 낯선 이야기를 합니다.
6-8절을 읽어 봅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로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믿음이 없는 자들은 결국 무엇을 원합니까? 기적, 이 말씀은 기적을 원하는 말씀처럼 보이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내면적으로 들어가면 이 말씀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바로 행위로 구원 얻겠다는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란 십자가에 달려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피로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 말씀을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할까요?
너무 간단하지요.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가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확인되지만 마음에 믿는 것은 누가 확인하나요.
내가 아무리 마음에 믿는다고 해도 상대가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마음으로 믿는 것을 판단하실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판단하시는 그분이 주신 믿음이 아니고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구원 얻기를 바란다고 말해 놓고 이야기가 지금 어디로 빠지고 있습니까?
죄를 제대로 드러내 놓고 오히려 인간들은 주님 되신 그분이 이루신 그 결과물로 드러남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인 로마인들은 이 범주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까?
못 벗어납니다.
이 땅에 있는 어느 인간도 자기 형제, 가족, 자식을 아끼지 않는 자 없습니다.
이들의 구원을 바랍니까?
이들과 원수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자기 혈통의 구원을 그렇게 간절히 원해 놓고 그들의 죄를 고스란히 지적하면서 오직 주님이 구원을 주신다고 해 버립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이제 자신의 혈통과는 더더욱 철천지원수가 됩니다.
그러나 구원은 바울의 원함과 상관없이 주님께서 주십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너희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라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견고하게 하고 피차 안위함을 받기 위해서 보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로마의 성도들을 견고하게 하는 말씀으로, 피차 안위함을 받는 말씀으로 들러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면 이 말씀이 로마의 성도들을 어떻게 견고하게 하는 말씀으로 들릴까요?
복음 전파는 결국 그들의 죄를 지적해야 하며 그 결과는 오히려 핍박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에서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혈통들이 있겠지요. 이들에게 얼마나 열심히 복음을 전할까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들을 설득시키는 것입니까? 이해시키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오직 말씀 밖에 없지요. 죄를 지적하고, 오히려 이들에게 전하는 것은 복음밖에 없습니다. 복음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구원을 주실 자를 구원하시고, 지옥 보낼 자를 지옥 보내시는 일을 목격하는 목격자로 살아가게 됨을 깨닫게 해 줍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로마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의로가 될까요? 또한 얼마나 견고하게 할까요?
지금 오늘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우리를 더욱더 견고케 되게 하는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