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32

푸른 섬 2013. 6. 2. 13:16

좋은 소식

로마서1015-21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전하는 소식은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입니다.

누가복음 2 10절을 보면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실을 두고 천사들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들이 로마서를 살펴 보지만 예수님의 오심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까? 전혀 아니지요. 철저하게 주님의 백성과 주님의 백성 아닌 자들을 분리해 버립니다. 쓰레기를 분리 수거하듯이 주님이 원하시는 자에게는 구원을 주시지만, 원하시지 않는 자들에게는 복음이 쓰레기 취급받도록 만들어 버리십니다.

 

누가복음 2 14절을 보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온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천사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온 백성에게 해당되는 사람들은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 즉 하나님으로부터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기쁜 소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직 자기 백성만 구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로 보내주지 않은 인간들에겐 철저하게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 듣는 인간 한명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 듣는 것 같았지만 그것 조차도 주께서 그렇게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예수님을 팔아 먹고,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 맹세까지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러 가는 길에도 그들은 누가 자기들 중에 가장 높은 자리 차지할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중에 누구라도 자기 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 다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심보를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승천하셔서 주님이 되셔서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예수님으로부터 택함을 입은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참으로 자신들에게 기쁜 소식을 주시는 분으로 오해했지요. 예수님의 목적과 제자들의 목적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보니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가 예수님을 죽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 받기 전에는 결코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라는 말씀을 제자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성령받기 전에 이들이 이해한 이 말씀은 사복음서에 제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축복, 즉 자신들이 원하는 축복을 주시는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오늘날로 표현하면 이제 고생 끝났고, 이제 나에겐 많은 돈 벌고, 권세도 누리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수 있다. 당당히 남을 지배하며 살아갈수 있다. 지금까지 나를 괴롭힌 인간들을 이제는 내가 그들을 지배하며, 부리며 살수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조금은 참아야 하겠지요. 집없는 것은 잠시일 것이다. 떠돌이 생활도 잠시 뿐일 것이다. 조금만 참자 그러면 곧 내가 원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참으로 자신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시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보니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 자신들에 하신 말씀, 베푸신 기적들, 모든 말씀하나하나가 자신들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가를 드러내는 말씀으로 보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 자신들 편에서 하시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게 되니 그 말씀말씀이 자신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말씀임을 알게 됩니다.

 

에베소서6 17절을 봅시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성령의 검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검의 특징은 찌라고 베는 것이지요.

이 역할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412-13절을 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 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일을 하시는데, 우리가 지금 로마서를 살펴보고 있지요.

로마서 안에서 이 말씀을 적용해 보면 어떻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율법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더 짓게 만든다. 이 말씀과 꼭 일치하는 말씀 아닙니까?

 

좋은 소식을 전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을 전하셨지요.

 

다시 누가복음으로 가 보겠습니다.

234,35절입니다.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픙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예수님께서는 비방받는 표적이 되기 위해 태어 나셨습니다.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집중적으로 비방할까요?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칼이 사람들의 마음을 찔러대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도대체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내셨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주님이심을 전하니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드러납니까?

세상의 주인은 인간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 자신에게 구원과 심판이 다 있다고 하니 인간들이 도무지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내가 챙기는 것이지 예수 당신이 어떻게 나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수 있느냐고 비난합니다.

 

로마서를 우리들이 살펴 보고 있지만 모든 인간들을 죄인으로 몰아버리는 이 말씀을 인간들은 어떻게 받아 들일까요?

 

말씀이 칼이 되어 인간들을 푹푹 찔릅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려지겠습니까? 먼저 좋은 소식이라고 했지요. 지금 누가 좋은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이 좋은 소식을 전하고 있지요.

그런데 우리들이 로마서를 살펴 보니 좋은 소식입니까 아닙니까?

유대인이 되었든지 이방인, 즉 헬라인이 되었든지 이들에게 로마서는 어떻게 들려지겠습니까?

 

엄청 기분나쁘게 들려질수 밖에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구원이 없다는 말씀을 해 버리니 이것보다 기분 나쁜일이 어디있습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한 말씀을 더하시지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모두가 죄인이다. 그런데 그냥 죄인이 아니고 지옥가야 하는 죄인이다라고 해 버립니다.

 

그러니 이게 어떻게 좋은 소식입니까? 뿐만 아니라 구원과 심판은 오직 주님의 손안에 있다고 하니  더욱더 분노기 일어나지 않습니까?

 

도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라는 말이 나오지 않겠어요.

그러니 사도바울이 말하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 아름답다는 말이 좋게 들리겠습니까?

 

그런데 분명 주님께서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를 하느냐에 대해서는 주님 입장에서는 관심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것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평가가 예수님을 죽이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사랑하는 자의 참 모습이라 하십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을 통해 하시는 이 말씀에 대해 사람들의 평가는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관심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평가를 내리시는가가 중요하지요.

 

자 그러면 사도바울이 계속해서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보내셔서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소식은 사람들이 듣기에 어떠한 말씀일까요?

 

칼로 푹푹 찌르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하면 로마서 1장에서 지금까지 해온 말씀이 사람들의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는 자는 사도바울을 죽이고 싶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주님께서 주신 성령을 받은 자는 이 말씀에 당연히 아멘 아멘하겠지요.

 

푹푹찔리는 것이 축복으로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좋은 소식을 전했지만  이스라엘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로마서1016절을 보면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참으로 주님께서 사람들을 기분나쁘게 하시는데는 일가견이 있으십니다.

 

여기에서 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시지요. 어떤 사람은 아니면, 많은 사람은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런 표현을 모든 사람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도 이런 식으로 표현했지요. 인간들이 보기엔 과장법이라 생각하겠지만 이 말씀은 과장법도 아니고 사실 그대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주님께서 칼로 푹푹 찌르시는 말씀으로 보시면 됩니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이사야 선지자의 외침을 로마서에서 인용하지만 이 말씀은 현재 하시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말씀은 묵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말씀을 자꾸 역사속에 묶어 두려고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역사에 매이지 않습니다.

이사야 당시나, 예수님 당시나, 사도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전한다고 믿을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나요?

이 말씀은 16절과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16절은 전해도  아무도 안믿었다고 했지요.

그런데  17절에서는  분면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하시지요. 이 말씀은 곧 주님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믿음을 주셔서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전한다고 듣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9장에서 주님께서 원하는 자를 구원하시고 원하는 자를 지옥보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래서 18절에서 다시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17절에 의하면 분명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생긴다고 하셨지요.

 

그러면 인간들은 이렇게 접근하지 않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면 듣고 믿는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적인 사고 방식을 사전에 철저하게 차단해 버립니다.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들어도 안믿어요.

 

19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이 말씀은 곧 이스라엘이 알았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20절에서는 내가 나를 차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바 되도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이 말씀들의 뜻은 곧 21절입니다.

이슬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이지만 하나님께서 종일 하나님의 손을 벌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믿지 않습니다. 결국 이런 일로 인해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이스라엘이 불순종했기 때문입니까? 논리는 그렇지요. 그러나 이방인들의 구원도 역시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능력으로 믿음을 주셔서 구원하셨습니다.

 

즉 구원받은 이방인들도 누구와 전혀 다르지 않다.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도 똑 같은 자들이지만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지금 이 말씀을 읽으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슬러  말하는 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주님의 용서, 긍휼이 필요 없는 자이지요.

 

지금 이 말씀을 이방인이 일차적으로 읽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신다면, 겉으로 보기엔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자신들에게 굉장한 기쁜 소식으로 다가온 것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은 어떤 일을 합니까?

칼로 찔려 쪼개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지금 로마서를 읽은 우리들을 칼로 찔러 쪼개는 일을 하시지요.

 

결국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은 주님께서 보시기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겐 꼴도 보기 싫은 인간으로 드러납니다.

이들이 전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자신의 삶이 아니라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전합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곧 자신은 늘 주님께 불순종하고 주님의 말씀을 거스러는 죄인임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피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됨을 전합니다.

 

그러니 말씀을 전하는 자신도 찔리고 말씀을 듣는 자도 찔리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참으로 주님의 증인, 아름답다도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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