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의 고발
로마서11장1-6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성경의 중심을 인간구원으로 보는 순간 성경은 우리에게 도깨비 방망이가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인간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경을 보게 되면 결국 인간의 본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가 드러납니다.
창세기2장16-17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이 말을 누가 반복합니까?
창세기3장으로 가면 뱀이 사람에게 반복하게 만듭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우리가 성경을 읽을때에는 이미 우리가 죄의 종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읽으셔야 합니다.
그러니 이미 성경이 기록되었을때에는 죄의 종인 죄인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뱀의 접근 방식에 죄의 종인 인간들은 놀라지 않을수 없지요.
뱀이 물으니 여자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2,3절을 볼까요.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여자는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더 집어 넣었지요.
이것을 보면 여자의 위치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습니까?
하나님보다 한수 더 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말씀을 더 집어 넣어서 더 강력한 규제로 선악과를 따먹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보다 더 철저하게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려고 하지요.
그런데 뱀이 여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라고 뱀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였습니다. 결국 여가자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렇게 엄격히 적용한 하와는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에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제가 먼저 말씀드렸지요. 이미 죄가 왕노릇 하는 상황에서 창세기가 주어 졌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죄가 무엇인지를 살펴 보아야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의 관심은 늘 상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으면 하는데 관심을 둡니다.
이런 생각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의 모습니다.
사람들은, 즉 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하와와 같은 방식으로 접근을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을 입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당시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려고 나름대로 추가하는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물론 율법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렇습니다. 죽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복받기 위해서입니다. 즉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려고 더 많은 율법지키기 위한 조항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성경에서는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연구합니다. 뿐만 아니라 복을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킵니다. 따라서 율법을 지킨 자신들은 당연히 영생을 얻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칭찬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말씀이신 분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와 같지요. 자신은 결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 인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올려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되신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자리를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너희자신을 믿지 말고 예수님 자신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이들에게 통할까요?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꿈인 인간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들을 화나게 하고 기분나쁘게 하는 말씀으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이들을 향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손을 벌렸지만 이들은 그 손을 거절합니다. 오히려 그 손을 제거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 11장으로 넘어 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이 말씀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 즉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는 말씀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맞지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누굽니까?
은혜를 따라 남은 자가 그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따라 남은 자가 누굽니까?
엘리야시대를 예로 들고 있지요.
읽어 봅시다.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의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리라”
역시 말씀이 꼬입니다. 어렵습니다.
분명 하나님이 자기 백성 백성을 버리지 않았다라고 해 놓고 하는 말이 엘리야을 언급하지요.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한 내용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열왕기상 19장1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엘리야 선지가가 이스라엘왕 아합에게 수년동안 엘리야의 말이 없으면 비도 이슬도 있지 않으리라는 예언을 합니다. (왕상17장1)
이 예언을 한 후 요단 앞 그릿시냇가에 숨었습니다. 그곳에서 시냇물을 먹고 까마귀가 물어주는 고기와 떡을 먹고 지냈습니다. 상당히 고달펐겠지요. 우리야 동화 같은 이런 사건을 즐길지 모르지만, 이 모습이 곧 사도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먹을 것을 주시면 먹고, 주지 않으시면 굶고, 손으로 일하고.
결국 가뭄은 엘리야도 피해가지 않습니다. 시냇물이 말랐습니다. 엘리야가 마실 물이 없지요.
그래서 여호와께서 시돈땅 사르밧 과부에게 명하여 엘리야에게 음식을 주게 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의 움직임이 엘리야의 움직임과 동일합니다.
물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르밧과부가 물을 가지러 가는 데, 그때 엘리야가 떡한 조각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과부집에는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입니다.
아들과 마지막으로 이것을 조리해 먹고 굶어 죽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셔도 꼭 이런 집에 엘리야를 보내십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자신을 위해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너와 네 아들을 위해 떡을 만들어라고 합니다. 물론 그 통의 가루와 그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없어지지 않게 하실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 후에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누굴 원망합니까? 엘리야를 원망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참으로 복잡하지요. 죄도 생각나게 하고 아들도 죽었다. 결국 원망합니다. 죄를 깨닫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들이 죽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닙니까?
그러나 엘리야는 아들을 살려 줍니다. 그러자 여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아들 살려 주니 이런 소리를 합니다.
벌써 굶어 죽어야 하는데 굶어죽지 않고 살려 주었더니 이런 소리를 해요.
이런 자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는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명과 대결을 벌입니다.
열왕기상18장23-24절을 봅시다.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을 붙이지 않고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여기에서 하나님이란 단어가 나오지요. 바알, 아세라도 하나님이고, 엘리야의 하나님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이름단어갖고 참 하나님이니 아니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성령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응답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이들을 조롱합니다.
27절입니다.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니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 것 하매” 오늘날 목사가 이렇게 조롱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윤리적인 자들이 얼마나 마귀적인지를 아시겠지요.
그러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그들의 몸을 칼과 창으로 상하게 합니다. 이것을 그들의 규례입니다. 즉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규례를 따라 피를 흘리면 자신들의 기도를 들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녁때가 되어도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열심이 대단하지요. 하루종일, 그리고 온 몸을 바쳐.
이젠. 엘리야차례입니다.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엘리야가 돌 열 두개를 취하니 이 야곱은 옛적이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니라”
이 말씀을 왜 하는지 아시겠지요.
너희들은 야곱 같은 자다. 죽어야 되는 자다. 심판받아야 하는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36-38절을 봅시다.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 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결국 엘리야가 이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비가 내리기를 기도하니 비가 내렸습니다.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갑니다.
그리고 광랴로 나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원합니다.
살기 위해 도망쳐 놓고 하나님 앞에서는 죽고 싶다고 해요.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잠이 들었습니다. 천사가 어루만지며 엘리야를 깨워 떡과 물을 먹입니다. 그리고 사십 주, 사십야를 가서 하나의 산 호렙에 도착합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묻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론 엘리야의 말이 사실이지만 조금전 우리들이 살펴본 18장을 보면 거꾸로 아닙니까? 자신이 다시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했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팔백오십명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여전히 권력자 아세벨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 눈에는 지금 엘리야 자신만 남아 이제 자신도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로마서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그리고 18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지금 이 말씀을 로마서에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고발했다고 하지요. 이스라엘은 누구를 죽이는 자입니까? 바로 엘리야를 죽이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한다면 어떨까요?
똑 같습니다. 여전히 육적 이스라엘이든, 이방인이든 모두가 다 사도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서 하나님을 위해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칠천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하십니다.
사도바울이 엘리야를 언급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결국 복음을 전하는 자는 늘 엘리야의 상황에 처하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눈에는 구원받을 자가 없어요. 하나도 없어요. 안 보여요. 그런데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자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지금 사도바울의 상황이 어떤 상황이라는 말입니까?
엘리야의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듣는 이방인들은 어떤 상황. 엘리야의 상황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자기 백성이 어디 있습니까? 바로 엘리야 같은 자, 바울 같은 자, 이런 자야 말로 참으로 은혜를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입니다.
엘리야의 심정, 사도바울의 심정이 바로 엘리야의 심정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사도바울도 역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자입니다.
물론 이방인들의 죄도 고발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길로 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는 있습니다. 성도의 자리가 바로 이런 자리입니다.
고발하는 자로서 혼자 남았다고 죽여달라고 하는 자리가 바로 성도의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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