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1장7-12
신명기29장2-4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곧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분명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목전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이스라엘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를 적접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까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에 담아 둔다고 해도 이스라엘이 깨닫지 못합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다. 체험신앙을 많이 이야기 합니다. 그렇다면 출애굽한 이스라엘만큼 많은 체험을 한 사람이 있을까요?
불과 구름기둥으로 사십년동안 인도하셨습니다. 이정도 되면 뭔가 알아 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여호와께서 깨닫는 마음과 눈과 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이방인들에게가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기엔 참으로 기가찰 노릇 아닙니까?
자기 백성으로 부르셨으면 당연히 눈으로 목격하게 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깨닫게 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시지 않았답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체험도 여호와의 뜻을 아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여호와의 뜻을 알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들이나 신앙생활 오래한 사람들을 보면 꼭 자신의 간증이 있어요.
그래서 자신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해요.
그런데 한번 보세요.
이스라엘이 간증거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믿었습니까?
자신들이야 입술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믿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자신들 몸에서 일어난 일을 목격할 뿐입니다.
결국 이들이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신명기 31장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런식입니다.
듣는 사람 어떨까요?
기분 상당히 나쁘겠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말씀을 깨달았습니까 못 깨달았습니까?
못 깨달아요.
여호와께서 깨닫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마지막이 이방 신들을 따르고 여호와를 버리고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어기는 자로 드러나기 위해 자신들이 지음받았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 정도 되면 서서히 짜증이 나지요.
이렇게 만들 것 같았으면 왜 고생고생시키면서 출애굽하게 하시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느냐 말입니다.
그런 생각들지 않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기분 좋아요 나빠요. 기분 상당히 나쁩니다. 그럴 것 같으면 나를 그냥 버려두시지 왜 나를 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나요 하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멸망받아야 마땅한 자임을 증거하기 위해 택함을 받은 백성입니다.
말이 좀이상하지요.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물론 다른 곳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구약 전체가 이런 식으로 귀결되고 있어요.
어느 누가 자신이 멸망받기 위해 태어난 자라고 인정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어떤 인간도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신은 죽어야 마땅해, 지옥가야 마땅해 라고 할 사람있을까요?
이런 자임을 증거하기 위해 이 땅에 살아간다는 것을 믿을 인간 어디 있을까요?
이사야 6장을 보아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6절부터 볼까요.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든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시기로”6-10
죄인들로 판명한 이스라엘, 그 중에 살고 있는 이사야도 죄인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누가 여호와를 위하여 가겠느냐고 하실 때 이사야 선지자가 자신을 보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가 죄인들 가운데 가서 외치는데 그 외침이 무엇을 위한 외침입니까?
마음을 둔하게 하는 외침, 귀를 막히게 하는 외침, 눈을 감기게 하는 외침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여호와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셨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좀 알아듣게 외치든가 해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렇게 이사야 선지자의 죄를 사해 보내셨다면 이사야 선지자의 말발이 먹히게 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의 말발이 안 먹히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무리 외쳐도 이사야의 선지자의 말을 듣고 죄가 사해질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외침이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기적을 보여 주시고, 체험도 많이 하게 해 주셨지만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어요. 인간의 능력으로는 접근 불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지요.
다르게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체험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드러내기 위한 예수님의 활동입니다. 예수님 말씀앞에, 능력앞에 인간들은 죄인으로 드러날 뿐 구원받을 자는 오직 예수님의 택함을 받은 자 밖에 없습니다. 자신들이 들었고, 보았고, 경험했다고 해서 믿을 인간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가 예수님의 택함을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8장 26-27절에서 이사야 6장을 인용하면서 사도행전을 마무리 짓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 복음은 오히려 어떤 역할을 합니까? 깨닫지 못하게 하는 역할.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역할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반문하잖아요. 그럴 것 같으면 사도바울이 왜 고생고생하면서 복음을 전합니까?
방금 말씀드렸지요. 듣지만 듣지 못하는 자요. 보지만 보지 못하는 자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나요.
예수님께서 구원하시는 자만 구원을 얻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이 역사적으로 한 일은 어떤 일입니까?
어떤 인간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전하는 자들이었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엇을 원했습니까?
구원얻기를 원했습니다. 율법도 있고 언약도 있고 성전도 있으니 우리는 당연히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성경도 있고, 읽고, 쓰기도 하고, 듣기도 하니 당연히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자들이 오늘날 교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까?
오늘본문 7절을 보면 이스라엘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했다고 하시지요.
참으로 이상한 하나님아닙니까?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하십니다.
9절 볼까요.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기도를 해도 이런 기도를 합니다.
이런 기도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 목사를 미쳤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미친 자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이 노골적으로 지옥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지요.
그러면서 11절로 넘어 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 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참으로 희한하게 결론을 맺어가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지금 성경을 읽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이방인들이라고 했지요.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려고 구약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지금 이스라엘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아시겠지요.
지금 글을 읽는 당사자들이 이 말을 들어야 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이 당사자들에게 어떻게 들려 질까요?
너희들도 이스라엘과 같은 행동을 하는 자들이라면 이스라엘 꼴 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심은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이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그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구원얻으려고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십일조하고 구제를 했습니다.
자신들이 말씀 앞에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자들의 결국이 이러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택함 받았음을, 구원받았음을 자랑하며 산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들을 십자가 앞에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오직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을 전하도록 하는 것이 이들을 부르신 목적이었습니다. 우리도 늘상 말씀앞에 죄인으로 드러나는 것에 감사하며 십자가만 자랑하는 주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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