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서로 받으라
로마서15장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자신이 얼마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달을 수 있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만만한 모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얼마든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짜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도 하시고, 가르치시기고 하시고, 질문 대답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천국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를 말씀하시고 해설도 해 주셨습니다. 5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라고 제자들이 대답을 합니다.
제자들은 자신 있게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뿌리는 비유, 알곡과 가라지 비유, 겨자씨 비유, 누룩비유, 밭에 감춰진 보화비유, 좋은 진주 구하는 자의 비유, 그물 비유를 다 깨달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5장10절에서 같은 단어를 사용해 듣고 깨달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깨달았다고 했을 때에는 말씀을 정확이 알아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다고 했을 때 마귀 짓을 합니까?
베드로가 사탄 짓을 했지요. 예수님 절대로 십자가 지시면 안됩니다라고 목숨 걸고 말리잖아요.
또한 예수님은 죽으시러 가는데 제자들은 왜 누가 서로 높은가로 싸움합니까?
왜 제자들은 예수님을 팔아먹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까지 했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시대 사람들입니다. 그 시대 언어를 사용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수많은 기적들을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일부러 잊으려 합니다.
마치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음을 잊으려 하는 자는 없습니다. 교회 다니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믿지요.
그런데 사복음에서 일어난 제자들의 모습은 일부러 잊으려 합니다.
왜 그럴까요?
도움이 안 됩니다. 어디에 도움이 안 될까요? 종교 생활하는데 도움이 안 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목사들이 성도들을 갖고 목회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의 전 모습은 일부러 잊으려 합니다.
그렇다면 사복음에서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을 잊지 않는다면 왜 목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동행하셨지요? 그래도 믿음이 안 생겨요.
그러면 동행하실 뿐만 아니라 함께 잡수셨지요? 그래도 믿음이 안 생겨요.
친히 손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어요. 그래도 믿음이 안 생겨요.
삼년동안 수많은 가르침과 체험들을 하게 하셨지요. 그래도 믿음이 안 생겨요.
그러니 목사들이 하는 목회라는 것을 사복음서대로 하려면 허무합니다. 결과를 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희생하고, 함께 하고 교육하고 가르치고, 체험시켜도 믿음이라는 생기기는커녕, 잠시 그 때뿐이고, 결정적일 때는 예수님을 팔아먹고, 부인하고 저주해 버립니다.
그러니 목사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목회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믿음이라는 것도 보장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경험하고 체험하고, 보고, 배우고, 익히고 아무리 몸에 체질화 되게 해도 결론이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사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의 본 모습을 일부러 잊으려 합니다.
그리고는 점프를 해서 사도행전에서의 제자들을 곧장 연결시켜 버립니다.
예수님을 따라 삼년동안 열심히 배우고 익히고, 체험화 한 그 결과로 성령으로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고 가르칩니다.
이렇게 해야만 교인들을 설득할 수 있고 이해 시킬 수 있지요.
만일 삼년동안 열심히 배우고 ,익히고, 체험하고, 체질화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그게 끝입니다. 예수님이 삼년동안 동행해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부정될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이 되셔서 홀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열둘 제자를 불러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라고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받은 교육이 무엇입니까?
내가 배우고, 익히고, 체험 한 것이 바탕이 될 때 그것을 믿을 만하다고 배우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연결고리를 잘라버리는 설교를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본인이 몰라서도 못합니다.
알아도 하지 못하지요. 이렇게 되면 본인도 예수님을 팔아먹은 가룟유다 자리에 가야 하거든요.
모든 일은 주님홀로 일하시고, 나는 도움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 됩니다.
이런 말씀을 누가 좋아합니까?
내가 설교하는 것, 내가 기도하는 것, 내가 눈물 흘리며 전도하는 것, 내가 뼈 빠지게 돈 모아 헌금한 것, 내가 시간 내어 봉사한 거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의 일이 보탬이 되고 도움이 된다고 해야 교인들이 돈을 내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헌금한 것도 주님이 하셨어요 라고 해 보세요. 아마 분을 참지 못할 수도 있어요.
협박받아 가면서 번 돈이고, 나의 생명을 단축해 가면서 번 돈을 정성을 다해 아깝지만 헌금했는데 그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셨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너희도 서로 받으라는 말씀이 나오지요.
이런 말씀은 좋은 공동체, 아름다운 공동체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너희도 서로 받는데 그 받는 것에 대한 예가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받았습니까?
로마서 5장 10절에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고 하십니다.
원수된 자를 위해 대신 죽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원수인지 아무도 몰랐어요. 자신의 원수만 원수인지 알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제대로 된 원수임이 드러났습니다. 물론 이것은 성령 받은 자만 알아먹는 말씀입니다.
성령 받지 못한 자들은 자신은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원수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그 피로 죄를 용서하셔서 성도를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성경말씀이 참으로 어려운 것이 이런 부분입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원수 관계였지요.
그런데 지금 성도와 성도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잖아요.
예수님의 하나님께 영광 돌리심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 받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를 따져보아야 하지요.
제가 여러분들을 받으면, 용서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영광이 안 됩니다. 왜 안 됩니까?
하나님께 영광은 오직 한분 십자가 달리신 예수님만이 돌립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잘못된 말씀입니까?
말씀이 잘 못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읽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너희도 서로 받으라는 말씀을 사복음서로 가서 한번 살펴봅시다.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로 받았습니까?
겉으로야 서로 받은 것 같지만 정작 중요한 일, 즉 하나님 나라에서 내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느냐의 문제가 불거졌을 때 그들은 자신의 본심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합니다.
아들들이 이미 다 장성했어도 미덥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엄마나 나서서 하나님 나라에서 한 자리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을 합니다.
우리 아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삼면동안 예수 당신을 따라 다녔으니 하나님 나라에서 한 자리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라는 태도가 아니라 겸손의 겸손을 보이면서 정중하게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다른 제자들이 보았습니다.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습니다.
분히 여겼다는 말은 제거하고 싶다. 즉 죽이고 싶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느냐를 물으시고 그들의 답변을 들은 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러자 세베대의 두 아들들이 대답합니다. 할 수 있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마20:23)”
예수님께서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씀을 하셨지요. 그냥. 너희들도 나처럼 십자가의 길로 가게 되다가 고난 받고 핍박받고 죽을 것이라고 하셨으면 다른 제자들도 오해를 하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고, 나머지 열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오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의 본질을 드러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주되심을 그들이 성령 받았을 때 증거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드러내지 않으면 자신들은 서로 용납했습니다. 우리는 삼년동안 예수님에게 배웠기 때문에 서로 사랑합니다. 누가 높은 자리 가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박수 치겠습니다. 이런 소리 할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마태복음 5장22절에서 형제에 대해서 노하지 말고, 라가라 하는 욕도 하지 말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이런 자들은 지옥 불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있습니까?
분을 내고 있지요.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아서일까요?
기억못해서일까요? 기억합니다. 배웠습니다. 이정도 모르겠습니까?
삼년동안 함께 동행하면서 배웠는데. 그런데 몸이 어떤 반응을 일으킵니까?
발악을 합니다. 자신이 가야 할 자리에 다른 사람이 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도무지 그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죽이고 싶은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는 이 말씀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지키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주님이 이렇게 일하심을 믿으라는 말씀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린 이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합니까?
나는 나 밖에 모르고, 나에게 조금이라도 손해를 끼치거나, 내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나보다 돈을 많이 벌거나, 다른 자녀가 내 자녀보다 공부 잘하거나, 예쁘거나, 키 커거나, 좋은 차를 타거나 하는 꼴을 보기도 싫어하는 자입니다. 난 주님께서 구원하신 자를 받을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 오늘 말씀을 통해 들통 나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단절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땅의 것으로는 연결고리가 없습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것도 인간들이 할 수 있지요. 믿는다는 것도 인간들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이 믿어져야 되는데. 믿어지지 않으니 자꾸 흉내 내려고 합니다.
오늘도 우린 우리 옆에 있는 형제들을 보면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 밝히 보이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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