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
로마서15:9-13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실 때 어떻게 대하시면 좋을까요?
흔히 인격적인 하나님이셔서 하나님은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에 선악을 나름대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판단하여 행할 능력이 있는 주체로 사람을 대한다고 합니다.
재미있죠. 하나님을 인간 자신을 근거로 어떤 분인지 설명한 꼴이잖아요. 그래서 포이어 바허라는 철학자는 신을 인간의 자아 투영에 의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끊이 없이 자신의 욕망을 신에게 내 뱉습니다. 돈이 필요한 사람을 돈을, 건강이 필요한 사람은 건강을, 욕심을 비유고 싶은 사람은 욕심을 비워 달라고, 남이 저주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남이 저주 받기를, 자녀가 성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녀 성공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이 믿는 신이 이러한 일을 해 줄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떠는 사람은 두려움 없게 해 달라고, 자족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자족하며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과연 어떤 예수님이신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와 좀 안 맞아요. 인간들이 아무리 하나님과 코드를 맞추려고 해도 안 생겨요. 이십년 정도가 아니라 아담 이후 쭉 안 생겨요. 하나님과 맞추려고 하면 계속해서 어긋나 버립니다.
오히려 주님은 방금 기도하는 그런 내용을 탐심이요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
탐심이 무엇입니까? 무엇인가 갖고 싶다, 하고 싶다죠. 사람이 살면서 갖고 싶고, 하고 싶고, 보고 싶은 것 빼 버리면 무슨 낙으로 살아갑니까?
개나 소도 아니고. 자녀들이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죠. 그러면 다른 것 하고 싶어 해요. 게임을 하고 싶어 하든지, 아니면 친구들과 놀고 싶어 하든지. 이 땅에 사는 사람치고 원하는 것 없는 사람 없어요.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말씀과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보게 되면 또 우리 속에서 뭔가 튀어 나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어떻게 돌릴까?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찬양일까?
그래서 행동도 조심하고, 말도 조심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성경구절에 근거하여 가사도 써보고.
별의 별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합니다.
왜 이런 마음이 튀어 나올까요? 그것은 인간 자신들이 인간을 정의 내렸듯이 인간은 도덕적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면 하나님의 말씀조차 주체의 움직임에 의해 말씀대로 되어질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주체인 인간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기에 이방인들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지옥가야 마땅한 자들이지요. 로마서에 의하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우상숭배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했기 때문에 긍휼을 입었다? 아닙니다.
아니면 이방인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다. 이것도 아닙니다.
오직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요한복음5장에 38년 된 병자가 나옵니다. 베데스다 즉 은혜의 못가에서 천사들이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가장 먼저 들어가면 금메달을 딸 수 있습니다. 물론 손으로 밀어도 상관없습니다. 발로 걸려넘어지게 해도 괜찮습니다. 먼저 들어가기만 하면 병이 낫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실 때 자신의 신세 한탄을 합니다.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도와 줄 사람만 있으면 제일 먼저 들어가 나을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날 고치심으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이것을 위해 38년 된 병자는 38년 동안 병자로 살아야 했고, 천사들이 물을 움직일 때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이 지금까지 살아 와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이 사람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말씀이지요. 그러면 이 사람은 다시 죄를 범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그런데 주체가 있는 인간은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겠지요.
그런데 그 죄는 어떤 죄입니까? 율법에 근거한 죄이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는 그런 죄가 아닙니다.
용서하심을 거부하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38년 동안 병자 생활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병자에겐 최악입니다. 말이 38년이지 누가 이 사람을 수발듭니까? 본인은 어떨까요? 지옥 가는 죄를 범치 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38년 동안 병자로 산 것이 자신의 노력으로 되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9장에서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38년 동안 병자로 살게 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죄용서 받은 것은 자신이 원해서입니까? 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죄용서 받은 후 죄를 짓고 안 짓는 것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일까요? 아닙니다.
긍휼을 입었다는 것은 죄 아래 가두어진 인생으로 살려지다가 주님의 피로 주님이 어떤 분이심을 증거하게 하기 위해 죄용서함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것은 이방인들이 구원의 조건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로마서11장11절에서는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다고 합니다.
시편18편을 오늘 본문 9절에서 인용했지요.
시편18편을 보게 되면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 왕과 그의 백성으로부터 핍박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해 이들에게 복수하셨고 다윗이 알지 못하는 백성이 다윗을 섬긴다고 찬양합니다.
이 말씀은 얼마든지 역으로 적용할 수 있다고 로마서 11장에서 말씀합니다.
로마서11장32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주님께서 순종하지 않는데 가두어 두셨고, 시편18편에서는 사울 왕과 그 일당, 즉 하나님의 백성조차도 순종하지 않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혈통적 이스라엘이든, 이방인이든 모두가 다 순종하지 않는 가운데 가둬진 자들로서 긍휼을 입을 자면 긍휼을 입습니다.
로마서9장15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하십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하려면 반드시 불순종가운데 가두어진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즉 주체가 하는 짓이라곤 항상 불순종밖에 없다는 것이 드러나야 합니다. 죄를 짓는 자임이 드러나야 합니다.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이 죄를 용서하셨을 때 이 모든 것들이 드러났습니다.
죄 아래 가두어진 인생, 자신이 주체가 되어 병 낫고 싶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니 원망하는 주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의 주체의 욕망과 만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죄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죄를 모릅니다.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는 말씀도 알아 먹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 사람은 안식일부터 제대로 지켜야 하겠지요. 안식일을 범하게 해 놓고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시니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하겠습니까?
죄라는 것은 반드시 율법과 관련되어 있잖아요. 안식일날 예수님도 일하셨잖아요. 그러니 죄의 기준이 완전히 달라져 버립니다.
38년 된 병자의 인생은 이제 모든 것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감을 전하는 인생이 됩니다.
출애굽기를 보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려고 하시는지 나와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제 노예에서 해방시켜,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 축복받은 인생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출애굽기2;23-25절을 봅시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을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이 말씀만 보게 되면 이스라엘은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될 뿐만 아니라 탄식하고 부르짖는 일이 사라지겠구나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러나 모세가 애굽땅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들에겐 더 심한 고통이 임합니다. 뿐만 아니라 출애굽 후에도 이스라엘이 꿈꾸는 세계가 펼쳐지지 않습니다.
약속의 땅은 왜 그리 강자들이 살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구원 목적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습니까?
사람들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천국 가는 거잖아요. 그런데 천국 가는 것만 소망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는 부자처럼 매일 잔치하며, 친구가 가득한 삶을 살고 싶어 하잖아요.
이스라엘이 꿈꾼 출애굽이 이런 출애굽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그런 식으로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광야길로, 원망이 나오는 길로 인도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들이 애굽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명기8장16-18절을 봅시다.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이 말씀만 들으면 좋지요.
그런데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을 광야길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언약이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새언약입니다.
십자가만을 전하게 하기 위해 광야로 인도하셨고 강한 힘을 소유한, 우상 숭배하는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겁니다.
자신들의 존재 이유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는 증거물로 그들은 그들의 삶을 한걸음 한걸음 살게 되었던 겁니다.
마치 38년 된 병자처럼.
오직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인생을 살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보게 되면 오직 하나님의 긍휼이 작렬하는 사건들을 계속해서 목격하게 됩니다.
이미 확보된 왕의 자리, 사울왕은 그 자리가 자신을 위한 자리인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왕의 자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는 자리입니다. 참된 왕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긍휼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긍휼을 증거하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멸망하십니다. 진짜 심한 것은 38년 된 병이 아니라 지옥 가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의 긍휼하심의 적용으로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주님의 주되심을 제대로 드러내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여기에 끼어들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다고 한다면 이런 인간은 38년 된 병자보다 더 심한 것에 걸린 자입니다.
주님의 긍휼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긍휼을 입은 자신의 주체를 전하는 자는 자기에게 영광 돌리는 자입니다.
여러분은 십자가만 눈앞에 밝히 보입니까?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만 눈앞에 밝히 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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