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로마서강해 71 남의 터

푸른 섬 2014. 5. 11. 16:56

남의 터

로마서1520-21

창세기11장에 바벨탑 사건이 나옵니다.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일 때 인간들이 꿈꾸는 것은 인간들의 이름을 냄과 동시에 하나로 똘똘 뭉치는 겁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성읍과 탑입니다. 오늘날이나 과거나 성읍과 높은 건축물들은 인간들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흔적들입니다.

 

성읍을 만들고 탑을 만든 이유는 오직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한 공동체를 만드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읍이나 탑은 어디에서 가장 먼저 나타납니까?

창세기 417절에 가인이 에녹성을 쌓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성이 곧 창세기11장에 나오는 성읍과 동일합니다.

 

라멕이 하나님보다 자신이 훨씬 힘이 강함을 자랑했듯이 노아 홍수 후 셈, , 야벳의 후손들은 모두 힘을 합쳐 라멕이 이루었던 성읍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힘은 항상 한 사람에 집중됩니다. 라멕에게 집중 되었듯이 애굽왕에게 집중되고 바벨론 왕에게 집중됩니다. 힘을 합친다고 하지만 각 인간들은 자신들이 가진 힘을 한 사람에게 밀어 주는 꼴이 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자신이 세운 왕은 자신의 투영이 됩니다.

 

라멕을 보면서 우린 라멕같이 못 되어서 안달이 나지 않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아파트 동 하나를 다 사고 싶고, 아니면 아파트 단지 하나를 다 사고 싶지 않습니까?

이번에 나온 유모씨 구원파의 본거지가 제가 잘 아는 동네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구원파 교회 주변 주택이 모두 그 집단 것이라고 뉴스에 나왔지요. 그런데 그곳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소위 말하는 정통 보수교회 주변도 주변 주택을 다 구입했어요.

 

왜 자꾸 땅을 사고 건물을 지을까요?

 

라멕을 몰라도, 바벨탑 사건을 몰라도, 아니 그것을 알아도, 그 짓이 무엇을 위한 짓인지 알아도 인간들은 기어코 성읍을 만들고 탑을 쌓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홍수후 언약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드셨어요.

창세기915절을 보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육체를 가진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인간들은 이 본문을 보면 홍수 심판이 다시없을 것이라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그런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을 모르는 자는 반드시 불로써 심판하시겠다는 것을 깔고 있습니다.

 

정결한 짐승의 번제로 인한 구원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에 대해서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속에 집어넣으실 겁니다. 이러한 사실을 무지개 언약을 통해 알려 주어도 죄인인 인간들은 도무지 듣지 않습니다.

 

노아언약에 근거하여 바벨탑 사건을 보게 되면 이들의 죄가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고기를 먹을 때 피째 먹지 말고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와 함께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고 하셨어요.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에덴동산에서 하신 축복을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온 땅에 가득하고 번성한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고기를 피째 먹지 않았는데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성읍을 짓고 탑을 쌓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될까요?

우리 이름, 즉 아담 이름을 내자는 것이 뭐 그리 큰 문제가 되길레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들을 흩어 버립니까?

 

과적해서, 법을 어겨서 수백 명의 젊은 학생들을 몰살시킨 것도 아니고 단지 모든 인류가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살겠다는데 이것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인간들이 보기엔 문제가 없지요. 지금 자기 이름을 위해 일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 있습니까?

자기 이름이 사라지는 순간 이 땅에서는 실패자가 되잖아요. 누가 실패자처럼 살기를 원합니까?

 

여호와께서 이들을 흩으셨기에 그들은 도시 건설을 멈추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흩어졌다고 해서 도시 건설을 멈출까요?

 

과거엔 한 곳에서 성읍을 건설하고 탑을 쌓았지만 이제는 온 땅에 흩어져서 성읍을 건설하고 탑을 쌓습니다.

로마서에 의해만 모든 사람을 저주 아래 가두어 놓으셨다는 말씀에 대한 실제 적용이지요.

 

물론 인간들은 자신들이 저주 아래 가두어졌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 못합니다.

 

다니엘서를 보게 되면 느부갓네살이 첫 번째 꾼 꿈이 나옵니다.

큰 신상, 머리는 순금, 가슴과 두 팔은 은, 배와 넓적다리는 놋, 종아리는 쇠, 발은 얼마는 쇠, 얼마는 흙인 신상입니다.

 

이것에 대해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은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가 장래 일을 왕에게 알게 하셨다고 합니다. 표현은 장래 일이지만 세상 전체를 다 보여 주셨지요.

 

성읍을 만들고 탑을 만들던 인간은 드디어 자기모양을 따라 신상을 만들고 그 신상에게 절하라고 하지요.

다니엘이 알려 주면 회개해야 할 건데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해 버립니다.

 

자기 이름을 날리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자기 이름을 날리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엔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을 깔아뭉개면서 자기 이름을 날리려고 합니다.

 

라멕처럼, 바벨에 성읍과 탑을 쌓는 자들처럼, 느부갓네살 왕처럼.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좀 이상한 말을 해요.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보면서 인간들이 떠 올릴 수 있는 것은 선교적 도리, 아니면 경제성을 떠올립니다. 주석 책에 그렇게 나와요. 과연 목회 윤리와 경제성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로마서를 제대로 읽었다면 주님께서 사도바울을 통해 하시는 말씀인 그런 의미가 아님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미 로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17절에서 말씀합니다.

115절에서는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해요.

 

그러면 말의 논리가 맞지 않아요. 분명 로마에 있는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전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분명 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전했어요.

이이 이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어요.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지 않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152021절에서 하는 말은 목회 윤리, 인간적인 도리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말일까요?

 

그것은 지난주 우리들이 살펴본 말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나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셨다고 하지요.

이것과 비교해서 오늘 본문을 이해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도 복음을 전하려고 할까요?

이것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구원파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도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요. 물론 그들이 전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제가 예를 드는 겁니다.

신천지도 마찬가지고요.

 

그들이 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도 복음을 전하려고 합니까?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지금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다는 것과는 상반되지요.

사도바울은 지금 자신을 누가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사용하고 있어요.

 

자기 이름 내려고 복음을 전할 수가 없어요. 자기를 따르는 추종자들을 많이 만들기 위해 복음을 전할 수가 없어요.

 

고린도전서3장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습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배웠다는 주장을 합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종일뿐인데 인간들은 바울과 아볼로를 이용해서 자기 이름을 높이려고 합니다.

 

구원파나 신천지가 가짜 복음을 들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을 찾는 이유는 자기이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자기들 세력들을 완벽하게 만들고 있잖아요.

 

그런데 바울의 세력이 없어요. 예수님도 그래요. 뭔가 뚜렷한 경계가 안 보여요. 복음의 경계선은 분명한데 어떤 모임의 경계선이 왔다 갔다 해요.

 

마가복음938절 이하를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 쫓는 것을 보고 자신들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민수기1126절 이하에도 비슷한 사건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장막에 나아오지 않고 예언하는 엘닷과 메닷이 있었어요. 한 소년이 쪼르르 달려와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고자질 했어요.

 

그러자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수아 생각에는 일사분란하게 모세의 지도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모세 중심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 모세 중심이 아닌 곳에서 예언하는 자가 있으니 얼마나 열 받겠어요.

 

우리야 성경을 읽기 때문에 여호수아의 시기가 어느 정도 인지 잘 모르겠죠.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여호수아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말로는 주임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들을 위한 행동입니다.

 

내가 있는 곳이 최고여야 돼. 내가 있는 곳만 참 진리야.

구원파나 신천지나 기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교회 목사를 말씀을 갖다 대 보세요. 그 교회 교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예수님만 전파되면 된다고 해 놓고 자기교회 목사가 똥 취급 받는 것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만 믿는다고 해 놓고, 처갓집 흉보는 것은 용서할 수 없어요.

예수님만 주님이라고 해 놓고 시집 욕하는 것 참을 수가 없어요.

 

복음 전하는 것은 자기 세력 만드는 일 아닙니다. 에녹성을 쌓듯이, 바벨성읍을 만들 듯이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은 복음 전하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도 행전을 살펴 보세요. 그런 모습을 찾을 수가 없어요. 너무나 허물허물, 경계도 모호하고, 뭔가 확 붙들 만하는 고형체가 없어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다는 말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님이 사용하시는 대로 사용되어지는 인생이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한 복음전파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남긴 것이 무엇입니까?

수천억 원의 부동산입니까?

현찰입니까? 자식에게 물려줄 예배당입니까? 그런 것이 없어요.

 

요즘 교회 목사들 보면 너무 대단해요. 그렇게 성령 충만 받은 사도 바울도 쓸쓸하게 나그네로 세상을 떠났는데, 저들은 천문학적인 돈과 부동산등들을 자식들에게 물려줍니다.

이들은 주님이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사도바울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몰라요.

 

알아도 어떻게 할까요? 느부갓네살 왕처럼 해버립니다. 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주님께서 나에게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돈을 주셨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신들의 터가 따로 있어요.

 

이런 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지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주의 소식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 들었다고 하는 자들은 철저하게 자기 이름을 높이는데 주의 소식을 이용해 먹을 뿐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유대인들처럼.

 

여러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마음껏 복음을 전하세요. 남의 터가 없고 나의 터도 없어요.

우린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의 증인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