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연보
로마서 15장25-29
누가복음16장1-13절을 봅시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의 소유를 먼지 날리듯이 날려 버리는 그런 사람입니다.
쉽게 말하면 주인의 소유를 제대로 관리 못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청지기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청지기를 불러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된 일이냐? 이제 더 이상 청지기 일을 할 수 없으니 맡은 일에 대해서 정리하라고 명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평소 사장이 보기에 제대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장이 그 사실을 알고 지금 맡은 일을 정리하고 그만 두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땅에서는 어떻게 합니까?
가능하면 챙길 수 있는 것을 많이 챙겨서 나가자라고 하지요.
그러면 우리가 이런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아주 악한 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자는 틀림없이 천국 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청지기는 생각했습니다.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정말 할 말 없는 사람입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다. 핑계도 이런 핑계가 다 있습니다.
이 말은 꼭 목사들이 하는 말 같아요. 땅을 파기 싫고, 빌어 먹기도 싫고, 당당하게 사례를 받아서 생활하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청지기가 고안해 낸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빚진 자를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서 빚을 탕감해 줍니다.
절반 아니면 삼분의 이, 아무튼 빚을 엄청나게 삭감해 줍니다. 이건 아직 자신이 갖고 있는 청지기 권한입니다.
자신이 아직 청지기로 있을 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러우니 청지기 권한을 최대한 이용해서 자신의 살길을 찾았습니다.
이 사실을 주인이 알았습니다.
여러분이 주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감옥에 집어넣고 싶겠지요. 아니면 깡패를 불러서라도 족치도 싶지 않을까요?
그런데 청지기의 주인이 더 대단합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했다고 칭찬합니다.
이게 말이 안 됩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에게서는 항상 옳지 않은 것이 나와야 하지요. 그런데 옳지 않은 청지기에서 지혜가 나왔습니다. 논리가 안 맞아요.
우리가 보기에도 옳지 않은 청지기,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던 그 청지기는 이제 자신이 청지기 임무를 계속할 수 없음을 알고 확실히 주인의 소유를 날려 보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렇다면 주인이 청지기 직분을 즉시 빼앗아야 하는데 오히려 지혜 있다고 칭찬을 해요.
이런 주인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이 말씀은 이 세대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을 비교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세대의 아들들은 음란한 세대, 즉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악한 자들, 죄인들입니다.
이들이 바리새인들, 즉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롭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도 우리가 하도 많이 들어서 별로 감이 없지요.
사기꾼, 강도, 살인자 등이 목사, 장로, 집사들, 주일마다 예배드리고, 새벽기도 빠지지 않고, 무엇보다 이 땅에서 소중한 돈에 대해서도 하나님께는 반드시 십일조를 바치는 이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면 좀 와 닿습니까?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히 거할 처소로 영접하리라고 하십니다.
말씀이 좀 어려우니 앞부분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주인이 보기에 자신의 옳지 못한 청지기, 불의한 청지기로 들통 났을 때 불의한 청지기는 자신이 살길을 찾았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살기를 찾았지요. 돈입니다. 주님께서는 돈을 불의의 재물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런데 불의의 재물로 인해 천국 갑니다.
그런데 자신은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청지기는 자신의 불의함이 들통 내는 주인을 죽여 버립니다.
자신이 살길은 불의함을 드러내는 주인을 제거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코 돈을 포기 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는 지금 돈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당면한 현 문제에 눈이 가 있습니다.
살길을 찾은 겁니다.
그런데 빛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자들은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닥친 문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불의한 청지기나 빛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자들 모두가 다 돈을 벗어 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돈에 대한 두 종류의 사람들 입장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13절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죠.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긴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빛의 아들들이라 하는 자들은 재물을 섬기는 자들이지요.
이런 자들이 예수님의 이런 비유를 들었으니 얼마나 조롱하며 비웃겠습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비유 자체가 문제 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 앉아 있는 우리들도 당장 예수님의 비유에 시비를 걸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관심은 지혜가 아니라 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불의한 청지기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를 보면 불의한 청지기도 여전히 자기를 사랑하는 자임이 드러나지요. 그렇지 않나요. 자신이 살길을 찾아 나섰잖아요. 그것도 불의한 방법으로.
그런데 불의한 청지기는 지금 무엇을 아는고 하면 자신이 불의하며 청지기 직분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불의한 일을 합니다.
그런데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불의하다는 것을 몰라요. 그 모르는 전형적인 모습이 돈을 사랑하는 모습니다. 이것이 한 세트입니다.
불의한 것을 아는 것, 더 이상 청지기 직분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불의를 행하는 것과 자신이 불의하다는 것을 모르고 나름대로 정직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한 세트를 이룹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섬기는 삶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삶입니까 아니면 재물을 섬기는 삶입니까?
우린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고 싶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깔끔한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십자가 마을에 있든 사람들 중에 이런 신앙생활을 꿈꾸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성경말씀을 말씀대로 풀고 더 이상 죄와 상관없는, 밝은 빛 속에서, 긍정적이고, 희망차고, 보람 있고, 눈에 보이는 교회모습을 이루어 보겠다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모임이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어려운 성도가 있으면 돕고, 함께 기도해 주고.
불의한 청지기를 읽으면서도 이런 자들은 이런 것을 꿈꿉니다. 그러면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맞지 않아요.
불의가 드러나야 하는데 저들은 불의라는 것을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어요.
빛의 아들들이라 말하는 바리새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보면 기쁘게 연보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연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연보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한 연보랍니다.
여기에 대해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희는 빚진자다. 이방인들이 빚진 자입니다. 이들은 영적인 것, 즉 천국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육적인 것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복음을 들었지요. 그렇다면 당연히 물질로 섬겨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교류가 가능합니까?
질이 다른데 어떻게 교류가 됩니까?
그런데 누가복음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적인 것을 끌어 당겨 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육적인 것으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은 그 섬김이 곧 영적 섬김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말씀은 누구에게 유리한 말씀이 되어 버립니까?
목사에게 유리한 말씀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목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예루살렘성도중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는 겁니다.
복음이라는 것의 출발점이 어디라고 했습니까?
물론 십자가에서입니다. 십자가에서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간다고 했지요.
복음을 받았다는 것은 다른 성도와 다른 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반드시 순서가 있지요. 누가 먼저 받고 누가 나중에 받고. 물론 이것이 시간이라는 것이 개입되면 순서가 바뀌어 버립니다.
먼저 복음을 들은 자가 있고 그 다음 복음을 들은 자가 있지요.
후에 복음을 들은 자는 먼저 들은 자들로부터 복음을 듣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런데 만일 이들 중 누가 가난하다고 했을 때 통하는 원칙은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한 원칙이 작용됩니다.
에베소서4장15,16절을 보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구원은 개인 구원이 없어요. 그리스도의 몸의 구원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서 일하신 결과물로 자신이 거기 거 자리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는 일은 예루살렘 성도들을 사용해서, 다른 성도들을 사용해서 주님께서 일하십니다.
지옥가야 하는 인생이 복음을 들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일하신 결과물입니다.
주님께서 일하셨다는 고백을 기쁜 연보를 통해 영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은 기쁘게 연보하라고 하신 말씀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보를 원하라고 하신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유혹을 받겠습니까?
목사들은 성도들에게 헌금하라고 얼마든지 강요할 수 있는 말씀이 되지요.
그러면 교인들은 헌금해 놓고 자신은 영적인 일을 했다고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는 말씀이 되잖아요.
그런 뜻 아닙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일이 이런 일입니다.
돈이야 구원파든 신천지파든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런데 그들은 영적인 일을 하는 자들이 아니라 육적인 일을 하는 자들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돈을 사랑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기쁨으로 한 연보는 영적입니다.
영적이라는 것, 다르게 표현하면 지혜지요.
자신들도 돈을 사랑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연보하게 하셔서 연보한 겁니다. 그러니 이들은 연보한 것을 결코 의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연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길 뿐입니다.
그러면 연보를 받는 자들은 어떨까요?
내가 복음을 전했으니 당연히 받을 자격있다. 그것 아닙니다.
나도 여전히 돈을 사랑한다. 가난해 보니 돈을 더더욱 사랑하는 자임이 드러나는 구나.
십자가의 피가 아니면 구원받을 근거가 없음을 헌금이라는 것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 복음 이야기 하면서 돈 이야기, 연보 이야기 꺼내지 않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우린 돈 문제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인간 누구나가 돈 없이 살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혜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십자가 복음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이 들통 나면서 십자가의 피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돈 문제를 늘 만나면서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월급 받으면서, 사례 받으면서, 보너스 받으면서, 많은 수익 남기면서, 많은 손해 보면서, 연보하면서 죄의 깊이를 알아가는 지혜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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