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강해

고린도전서강해 37 하나님의 계명 지키기

푸른 섬 2015. 5. 17. 20:04

하나님의 계명 지키기

고린도전서718-19

할례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는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와 할례가 관계있습니까? 설교시간에 많이 들었지만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행하든 할례가 나와 무슨 상관있습니까? 상관이 없지요?

 

그런데 만일 이렇게 되면 구약에 나오는 할례언약은 우리들이 볼 필요가 없어집니다.

창세기 17장에 할례 언약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에게 속한 남자는 모두 다 빠짐없이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 살에 있는 영원한 언약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속으로 들어온 남자들이면, 그 사람이 이방인이든 돈으로 산 종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다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만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할례 행하지 않는 것은 언약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 없습니까? 의미가 없습니까? 우린 할례를 행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할례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언약이라는 말은 결코 멈출 수 없는 언약이라는 말이지요. 따라서 누구든지 할례를 받지 않는다면 언약을 배반했기 때문에 천국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주님과 함께 사는 천국에서도 할례언약은 유효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천국 가서도 할례를 행해야 합니까?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할례라는 것은 원래는 하늘 언어인데 땅의 언어로 표현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할례란 천국 것의 그림자라는 말입니다.

 

물질성을 통해 천국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물질은 반드시 없어져야 하겠지요.

 

그래서 로마서228절에서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 하십니다.

골로새서장11절에는 육의 몸을 벗는 그리스도의 할례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를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은 것을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말씀합니다.

 

할례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권능입니다.

이것은 도무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물질성이 아닙니다.

 

오직 주시는 분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에서는 마치 인간의 열심과 결심이 할례를 행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기에 가면 할례 때문에 큰 사건이 하나 벌어집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모세를 불러 모든 여건을 갖춘 후 애굽으로 보내실 것을 결정하셨습니다. 이제 모세는 애굽으로 내려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행하면 됩니다.

 

그런데 갑자가 애굽으로 가는 도중에, 즉 숙소라는 곳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바로 왕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을 보내주지 않으면 장자를 죽일 것을 모세에게 알려 주신 후 이제와 갑자기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전혀 우리들이 예측할 수 없었든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우리 같으면 조건 갖추게 해 주었다면 그 다음 일하도록 확실히 밀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그런 겁니다. 복음 전하게 하기 위해 서울 대학을 졸업하게 하시고 신학대학원을 마쳤습니다. 목사 안수 받았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복음 전하려고 하는데 죽여 버리면 그 꼴이 뭐가 되겠습니까?

 

우린 죽이는 것도 복음 전하는 일종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 주지 않으면 장자가 죽을 것이라는 그 말씀에 근거합니다. 왜 장자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살리는 자는 오직 죽은 자만 살리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재빨리 차돌을 취해 아들 게르솜에게 할례를 행하여 그 표피를 남편 발아래 갖다 대면서 남편을 향해 당신은 나의 피남편이라고 외칩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죽어가든 모세가 비로소 살아났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탈출은 반드시 죽음을 경유한 자의 탈출이어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그냥 애굽 사람과 똑 같은 자들로 탈출하면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할례 언약체결 후 이삭을 낳습니다. 이삭은 죽은 자에게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죽음을 품은 아들이지요. 사라도 아이를 못 낳는 상태였고 아브라함도 아들을 못 낳는 늙은 상태에서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이처럼 애굽에서 탈출시키는 이스라엘 자손들도 이삭과 동일한 자로서 탈출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출 시킨 분만 자랑하게 됩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는 모세가 만일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보여주는 것을 담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모세를 애굽으로 보낼 이유가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세우신 분이 그 언약을 이루심을 보여주는 역할로 모세가 동원되었습니다.

 

따라서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지 못하는 모세라면 얼마든지 도중에 바꿀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모세가 주체가 아닙니다.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인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숙소에서 죽이시려는 모습입니다.

 

모세 자신이 피로 용서 받은 자, 즉 죽음 속에서 구출 받은 자로서 자기 자신이 부인되는 위치에서 이스라엘 구출에 동원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능력을 담고 있는 자가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결코 자신들이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구약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과 할례언약을 맺었다. 우린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래서 우린 할례 받았다. 그러니 우린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다라고 하는 논리를 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할례 자체가 이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논리를 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들이 자랑하는 할례를 앞장세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립니다. 율법 지켰다는 것이지요. 그것도 영원한 율법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를 언급합니다. 우린 이 본문 보면서 난 그런 것 생각해 본적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혹시 생각해 본 분 있습니까?

할례를 받는 것이 중요하냐 아니면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하냐?

 

우린 믿음이 워낙 좋아 그건 의미가 없기에 생각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만일 그러하다면 오늘 본문 삭제해 버리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우리가 읽을 이유가 없잖아요. 한번 정도는 읽을 필요가 있겠지만 전혀 생각할 가치가 없는데 다시 읽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중요한 율법인 할례를 갖고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할례 지킴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로 중요할까요?

천국가고 못가고가 결정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목숨 걸고 할례를 행하는 겁니다.

 

그런데 부르심을 입은 후 그 할례가 너무 쪽 팔립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자신들은 할례를 통해 구원 얻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즉 그리스도의 할례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육신의 할례를 지우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왜 이런 마음이 생기는 줄 아시지요.

잘 모르겠습니까?

 

그 다음 보면 할례를 받지 않고 부르심을 받았으면 할례 받으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부르심을 받고 성경을 보니 할례라는 것이 영원한 언약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할례를 행하고 싶은 겁니다.

왜 행하고 싶을까요?

 

할례자로 구원받은 자나 무할례자로 구원받은 자들 모두 누군가 부럽다는 겁니다.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게 감이 오지요.

 

나 할례 괜히 받았어. 할례흔적 지우고 싶다는 것은 부르심에 대해 감사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나 할례 받고 싶어라는 것도 역시 부르심에 감사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더 완벽한 구원을 꿈꾸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나 술 안 먹고, 나쁜 짓 안하고 예수님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나 그만큼 잘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할례라는 영원한 언약을 갖고 너무나 사소한 우리의 생각들을 들추어냅니다.

 

부르심이라는 것은 더 이상 자신에겐 소망이 없는 자로 확정했다는 말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로 확정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확정을 인정하지 않고 자꾸 자신이 구원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려고 합니다.

 

남들이 성경지식을 많이 알면 부럽습니다. 그래서 나도 저 사람처럼 성경지식을 알고 싶어 하지요. 그럴 때 주님이 성경지식 몰라서 구원받은 자는 성경지식 몰라도 된다는 말씀과 동일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가는 것은 성경지식이 아닙니다.

 

성경지식이 많은 상태에서 구원받았으면 나 성경지식 없었으면 좋겠다고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린 자꾸 남이 부럽습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 해요. 말씀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조금 더 내가 완벽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부르심 그대로 감사하지 못하고 자신이 뭔가 훌륭한 사람, 괜찮은 사람임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기도하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헌금하는 것도 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셨는데 자꾸 자신이 자기를 책망합니다. 그러면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의 신앙을 꿈꿉니다. 이게 탐욕입니다.

 

할례라는 것은 십자가의 피를 전하는 것이 할례입니다.

할례를 행하라는 말씀은 너희는 주님의 피만을 전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주님의 피만 자랑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만 중요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할례 행하는 것, 할례 행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처음부터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만 전하도록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책망하시는 겁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이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자꾸 뭔가 미진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미진함을 나의 행위로 채우려고 해요.

그럴 때 하시는 말씀이 할례자로 부름을 받았느냐 할례 받은 흔적을 지우려고 하지 말고, 할례 받지 않았다면 할례 받으려고 하지 말고 다만 하나님의 계명을 기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5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라고 합니다.

 

할례의 흔적을 지우겠다는 것은 곧 십자가를 제거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할례를 받고 싶다고 하는 것도 십자가를 제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무 심각합니까?

 

우린 죄의 경중을 따지잖아요. 그런데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경중이 없어요. 모든 것에 십자가를 적용시킵니다. 모든 곳에 십자가를 갖다 댑니다.

 

그렇게 하셔서 오직 하나님의 계명만 지키는 자들로 드러나게 합니다.

 

그래서 모세처럼 십자가의 피를 전하지 않는 자는, 달리 말해 죽음을 담고 있지 않는 자들은 제거시킵니다.

바로 오늘 말씀처럼.

 

오늘 말씀을 듣고도 사람들은 난 할례의 흔적을 지울거야라고 하는 자들이 있을 겁니다. 또한 난 꼭 할례 받고 말겠어라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 있잖아요.

 

이렇게 하심으로 지금도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부활하시어 주님이 되셔서 친히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 계심을 증거 하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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