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박한 환난
고린도전서7장25-28
사도바울의 개인 의견이면 참 좋을 것인데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의 개인의견이 아니라 주님의 계시입니다.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임박한 환난이라고 말하면 유난을 떠는 자들이 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들이 상상하는 그런 임박한 환난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15장19절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임박한 환난이라는 단어를 이해하려면 이 말씀에 근거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로 살아간다는 자체가 환난 속에서 사는 삶입니다. 미움 받는 삶입니다.
세상에서 미움 받기 때문에 너희들은 결혼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하십니다.
이게 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린 결혼을 왜 했습니까? 행복하기 위해 결혼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 불행하기 위해서 결혼했습니다.’라고 하는 사람 있습니까?
아니면 28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육신의 고난을 받기 위해 결혼했습니다.’라고 하는 사람 있을까요?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결혼에 대해서 나름대로 해석을 갖고 있습니다. 임박한 환난에 대해서는 어떤 관심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미움 당하는 자로 확정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떤 관심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임박한 환난에 대해 고려하면서 결혼을 할까 말까 했습니까?
아니지요. 무관심입니다.
이 땅에 결혼하는 사람치고 임박한 환난, 주님 때문에 당하는 환난 때문에 결혼한번 고려해 보아야겠다는 사람 없습니다.
만일 고려했다면 그 사람의 결혼생활은 육신의 고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받아 드려야 하겠지요. 그런데 육신의 고난 받기 위해서 결혼하겠다는 사람 없습니다.
결혼은 뭔가 보충하는 거잖아요. 지난주 월요일이 한국에서는 공휴일이었습니다. 석가탄신일이라고 해서 말입니다. 텔레비전을 우연히 보는데 어떤 유명한 철학가와 중이 나와서 사람들을 해탈시켜 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사십대 여자들이 나왔는데 그 중 한 여자는 애기 둘 낳자마자 남편과 사별했고 지금까지 혼자 두 딸을 키우면서 살았다는 겁니다.
결론을 말씀드리면 그 여자에게 해탈이란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라는 겁니다. 결혼을 통해 경제적 문제도 해결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만일 그 여자에게 결혼은 육신의 고난이 있는 삶이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확정해 놓은 것이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젊을 때 남편 사별하고 한번 제대로 남편으로부터 경제적인 도움 등, 자신이 꿈꾸든 결혼 생활을 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이 서려있습니다.
남편 죽는 육신의 고난이 있구나. 그래서 결혼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구나.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나를 살리는 구나가 되어야 되는데 다시 육신의 고난 속으로 반드시 들어가고 말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데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고 마태복음10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집안 식구끼리 원수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결혼이라는 것이 깨어지는 일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린 이런 상상하지 않잖아요. 결혼하면 상대편이 예수님을 잘 믿어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이 상대편이 되어 예수 안 믿는 사람 많습니다.
이렇게 되니 결혼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나오지요.
그러면 왜 결혼하지 않으려고 합니까? 고난 받기 싫어서 결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결혼하지 않으면 고난이 없습니까?
결혼하지 않은 사도 바울도 고난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면 왜 사도바울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까?
그 이유는 인간들이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을 이상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야곱을 보게 되면 자신이 사랑하는 라헬과 결혼하는 것이 꿈이었지요. 그런데 그 사랑은 야곱에게 엄청난 육신의 고난을 갖고 왔습니다.
14년간의 수고만이 아니었습니다. 라헬과 레아 사이에서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그것뿐입니까? 자식들은 어떤 고난을 갖고 왔습니까?
야곱자신의 아들들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요셉을 죽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결혼이나 결혼하지 않는 것에 대한 확정된 답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결혼으로 몰아 넣어 시든지 아니면 결혼하지 않는 상황이나, 남편이나 아내에게서 놓이는 상황으로 만드십니다.
이런 상황으로 만드셔서 주님은 그 곳에서 주님의 피 흘리심을 끄집어냅니다.
그런데 끄집어내는데 있어서 반드시 주님의 피에 동참하도록 하셔서 끄집어냅니다.
결혼 하셨습니까? 그러면 남편이든 자식이든 여러분을 속상하게 할 겁니다. 즉 여러분들은 주님께만 소망을 둔 것이 아님이 드러나는 현장이 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드러나게 됩니다.
얼마 전에 제가 아는 어떤 분의 아들이 암에 걸렸습니다.
축구를 너무 잘하고 공부도 너무 잘하고 친구들과도 너무 잘 어울리는 중학교 이학년 학생입니다.
그런데 죽을지도 모르는 병에 걸렸습니다.
내일 최종결과가 나온다고 하는데.
이런 육신의 고난을 당하라고 결혼 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이 말씀을 듣겠습니까?
자기 가족에게는 이런 일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잖아요. 그래서 결혼해서 자식 낳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당하면 죄 아래 사는 자는 당연이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구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의 피를 바라보면 되는데 헛것인 목숨에 더욱더 집착합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육신의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 없음이 제대로 들통 났습니다.
평소에 믿는다 믿는다 해도 결국 혈육의 죽음 앞에서는 그 믿음이 믿음이 아니었음이 드러나면서 주님의 믿음만이 참 믿음임이 증거 됩니다.
만일 나사로가 자신들의 오라비가 아니었다면 즉 결혼의 산물이 아니었다면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남이 죽었으면 그런 유별을 떨겠습니까?
처음 아담을 창조하시고 하와를 만드신 것은 한 몸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 만드신 결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한 몸이란 것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으로 드러나 버렸습니다. 이 사건 후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한 몸의 관계가 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남편은 여자를 다스리고 여자는 남편을 사모하게 될 것이라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남편 아내가 서로 주도권을 쥐려고 하는 것이 죄인들의 결혼생활입니다.
따라서 결혼을 한다는 것은 저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합니다. 육신의 고난은 죄인인 나에게 당연하다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이 고난이 없는 곳을 찾으려고 합니다.
앞서 임박한 환난이야기 했지요.
이것은 앞으로 있을 이야기가 아니라 늘 현재형의 환난을 말씀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은 성도에게 주어진 필수 코스입니다.
그래서 결혼 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는 겁니다. 결혼 하게 되면 이 고난에 또 육신의 고난이 주어지지요. 사도바울은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결혼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고난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모르겠네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영을 받았기에 결혼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육신의 고난이 어떠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만일 결혼한 우리에게 육신의 고난이 오면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으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피 흘리심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왜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않으려고 합니까?
아니면 왜 결혼하려고 합니까?
육신이 당하는 고난이 싫어서 그렇습니다.
결혼하지 않으면 자식이 없지요. 아내가 없습니다. 혼자 먹고 사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잖아요. 나를 위해 사는 인생인데 내가 왜 자식들, 아내를 위해서 살아야 하느냐입니다.
내 편하면 최고라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않으려고 하지요. 결혼 해 봐야 죽도록 고생만 하는데.
그런데 만일 그런 사람에게 돈 많은 여자나 남자가 있다면 이 마음이 싹 바뀝니다. 당장 결혼하려고 할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편하게 살고 싶으니 그렇습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본능은 자기 몸에 고난이 없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께서 이마에 땀을 흘려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아멘하고 받을 인간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일하지 않고 먹고 살고 싶은 겁니다.
데살로니가 후서3장10절에서는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하기 싫다는 것은 육신의 고난이 싫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와서 육신의 고난을 없이 하고자 목사 된다거나 아니면 뭔가 공짜로 먹고 살 궁리를 하는 겁니다.
결혼하고 싶은 것도, 아니면 혼자 살고 싶다는 이 모든 것들이 자기 욕심에서 나왔습니다.
탐욕에서 나왔습니다.
그 탐욕은 육신의 고난을 제거하고 싶은 탐욕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오히려 육신의 고난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제가 이 주 전 설교 때 말씀드렸지요.
우린 결혼을 당하는 것이고 결혼 못함을 당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도에겐 오늘 이 말씀의 성취를 위해 결혼 하지 않는 것이 되며, 결혼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환난을 당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육신의 고난이 당연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어미와 딸이 원수 되는 것 당연하다고 여겨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말씀대로 되어 질 뿐입니다. 복음 때문에 당하는 환난으로 인해 혼자 살게 하신다고 믿는 믿음을 주님이 주십니다. 육신의 고난을 당하는 것이 당연함을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린도후서4장17-1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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